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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31화 (131/187)

< 131화 영공전하의 외교 >

역시 나세였다. 정말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 축맹은 말 그대로 개처럼 질질 끌려나갔다.

핏발선 눈으로 악을 쓰는 꼴이 영락없는 똥개의 그것이었다.

참으로 절묘했다.

“영공 전하.”

“아. 통역하지 말게.”

“예. 그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역관의 말.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자가 혹시 고려를 욕하나?”

“아닙니다. 영공 전하를 욕하고 있습니다.”

“······.”

“송구합니다.”

“됐네. 썩 가보게.”

“다시 찾아주십시오.”

배포 좋은 역관은 허리를 접으면서 예를 취하더니 물러났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상당히 공격적인 목소리.

포은 정몽주다. 그의 곁에는 최영과 이성계도 보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그대로지.”

“지금 대명 선전포고를 하셨습니다.”

“제대로 듣고 봤군.”

“영공 전하. 상대는 천하를 집어삼키고 있는 대명입니다.”

“집어삼키고 있는 거와 집어삼킨 건 다르지.”

정몽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요즘 저 곱디고운 미간이 참으로 자주 찌푸려지는 거 같았다.

“이 사람 역시 명의 작태가 좋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는 사정이 완벽하게 다릅니다. 없어도 될 일이 아닙니까.”

“거쳐야 할 일이지.”

“그게 아니지요. 이는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 겁니다.”

“다시 말해야 하나? 반드시 발생할 일이었다.”

“명은 분명한 강자이며, 우리는 약자입니다.”

“강자는 지껄여도 되고 약자는 그러면 안 된다? 그리고 약자는 강자가 지껄이지 않게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야 하나?”

왕선은 비웃었다.

“그래. 강자와 약자가 있지. 강자는 왜 강자이며, 약자는 왜 약자인가. 강자는 힘이 강하기에 강자이고 약자는 힘이 약하기에 약자이지.”

“그건 현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영공 전하는 강자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또 말해야 하나? 당신이 말하는 해결책은 결국 아첨이야.”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칭제건원을 철회하고 고려의 제왕을 명으로 보내려고 한 그 발상이 놀라울 뿐이지.”

...대체 어떻게 알고 있을까.

정몽주는 멈칫했다.

“말해주지. 약자가 해야 할 일은 아첨이 아니다.”

왕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더 강해지면 되는 것이지. 그게 유일한 정도.”

“······.”

“강자보다 더 강해질 방도를 찾는 것. 그게 이 나라 고려의 재상이라면 해야 할 일이외다. 어떻게 하면 명나라 황제가 던지는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을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알겠나?”

왕선은 비웃으면서 정몽주를 쳐다봤고 시선을 최영과 이성계에게로 돌렸다.

“쫄리면 빠져도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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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지금 나 미쳤다고 생각했소?”

“아닙니다.”

“귀신을 속이시오.”

“아닙니다.”

정도전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다만, 이번 일을 이렇게 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오.”

“그렇긴 합니다만.”

“준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오?”

정도전은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면서 쓰게 웃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최영, 이성계, 정지, 박위, 나세, 이옥, 변안열, 배극렴, 최무선, 우인열, 양백연···.”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들의 이름.

왕선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정도전은 담담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이 나라 역사에 이런 맹장들이 총망라된 적이 있소?”

“없지요.”

“그런데 뭐가 부족하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물자가 하는 겁니다.”

“군웅할거는 고려를 사분오열 냈소. 그런데 그거 아시오? 그 전력을 모두 모아내면 현종 치세에 준하는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이외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소? 군웅할거가 고려 전체의 힘을 더 강하게 하다니.”

...현종?

정도전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너무 빡빡하게 따지지 맙시다.”

“혹시 그 전력을 가정하여 대명 선전포고를 하셨나 해서요.”

“만일 그렇다면?”

“당시의 고려 국력과 작금의 수준은 천지 차이입니다. 또한, 과거 싸웠던 요나라는 대륙 일부를 가졌으나 현재 적대하는 명나라는 대륙을 손 위에 올리고 있습니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요.”

“결정적인 차이?”

정도전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당시는 요격이었으나 지금은 선제공격이지요. 아닙니까?”

“선제공격이라. 압록강을 넘자? 요동을 점령하러?”

능청스러운 왕선의 말.

대충 상황을 무마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정도전은 말려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소생에게까지 비밀로 하실 생각입니까?”

“음. 좋소. 우리가 압록강을 건너면? 요동을 취할 수 있소?”

“어렵지요. 지금으로서는.”

“자. 그러면 말해주리다. 가능하게 하시오.”

“예?”

황당한 표정의 정도전.

왕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북원이 쇠퇴했으나 여전히 현존하는 나라.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명과 일전을 치르고 있소. 또 어디 그뿐이오? 이성계는 여진족을 영향력을 두고 있소. 어디 한번 보시오. 우리가 판을 잘 만들어내면 천하의 모든 세력이 명나라를 공격하게 할 수 있소.”

“쉽지 않습니다.”

“쉽고 어려운 것은 문제가 아니외다. 우리가 얼마나 해내는가에 모든 것이 달렸으니까.”

왕선은 곧장 말을 이었다.

“밀교에 속한 모든 정보원을 북방에 투입하시오.”

“여, 영공 전하.”

“대명 전선을 구축하는 데 첫 번째로 할 일은 오늘 발생한 요동의 사정을 내일 내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외다. 밀교의 모든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시오. 총력을 다하란 말이외다.”

“여, 영공 전하. 그리하면 군웅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소생이 할 말은 아니지만, 일전에 최영의 수작에 넘어가서 난관에 봉착했었습니다. 더욱이 대명 선전포고까지 펼쳐진 정국이 아닙니까. 그들이 어찌 움직일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더 많은 밀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아. 군웅들은 내가 알아서 할 거요.”

“영공 전하.”

“걱정하지 말고. 그들이 허튼 생각을 하면 바로 파악할 수 있소. 그러니 날 믿고 모든 밀교원을 북방에 투입해서 질 좋은 정보를 많이 거둬오게 하시구려.”

“······.”

“여기까지. 그러면 어서 움직이시오.”

정도전은 입술을 깨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건 없습니까?”

“응?”

“대명 선전포고의 다른 이유가 없는지 여쭤보는 겁니다.”

아. 있지. 당연히.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군사.”

“예.”

“자고로 내부의 심대한 도전은 강대한 외부의 위협으로 정리하는 법이라오.”

“설마?”

“그 설마가 맞소.”

정도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도 잠시 양 손바닥을 격하게 비벼댔다.

“이거 굉장히 재미난 상황이 펼쳐지겠군요.”

“원하면 직접 만지게 해주리다.”

“정말입니까?”

“물론이오. 군사라면 잘 할 거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정도전.

왕선은 입맛을 다시다가 슬쩍 말을 건넸다.

“아.”

“예?”

“하나만 물어봅시다.”

“예.”

“거. 정말 노비 출신이오?”

정도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공 전하.”

“아니면 말고.”

“···맞습니다.”

“알겠소.”

“예?”

“알겠다고 했소.”

“···한데, 어째서 이를 언급하십니까?”

“하나 묻지요. 그거 심각한 비밀이오?”

“···소생의 흠이지요.”

“비밀로 하는 게 좋소?”

“예. 한데, 어찌 아셨습니까?”

...포은 정몽주가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발칙한 수작이 바로 그거라서.

왕선은 잠시 고민했다.

진실을 말해주려니 정도전이 너무 상처받을 거 같다.

말 안 하고 알아서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긴 하다.

그런데 몰래 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도전이 알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정도전이 정몽주의 협잡질을 모르면 그 원망이 왕선에게 쏠리게 될 거다.

왕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괜히 두 사람 우정 지켜주려다가 욕만 들어먹는 거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 아닐 수 없다.

“포은 정몽주가 그걸로 군사를 공격하려고 하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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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은 불안정했다.

칭제건원만 하더라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천하 대국 대명의 사신을 개처럼 내쫓지 않았는가. 심지어 선전포고까지 했다.

오등작과 칭제건원도 부족해서 대명 선전포고까지 이어졌다.

고려 조정은 격랑으로 들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고려를 망국으로 떠미는 길입니다.”

이번에도 사대부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조금 더 신박한 방법은 없는가?”

조롱이 가득 담긴 왕선의 외침.

사대부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대들은 할 줄 아는 게 연좌밖에 없나? 정말 식상하군. 식상해.”

혀를 차면서 조롱을 이어갔다.

사대부들은 분기를 숨기지 못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하던지 왕선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힘내게. 이 나라 고려는 그대들에게 달려 있네.”

“······.”

“더 모아서 연좌하게. 적극적으로 지지하네.”

왕선은 양팔을 벌리면서 덕담을 쏟아냈다.

사대부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만 봤다.

연좌를 지나친 왕선은 곧장 선인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성발언을 내뱉었다.

“북원에 사신을 보내서 영원한 친교를 맺을 것이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하추와 통하여 군사 협정을 맺을 것이외다.”

재상들은 술렁였다.

북원과 나하추는 명의 주적이다. 그들과 손을 잡는다는 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북원은 오랫동안 고려 조정을 농단한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어찌 영원한 친교라는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북원은 어제의 원수였으나, 명은 내일의 적일세.”

“명을 내일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북원이 살아 있으면 친구가 되겠지. 그런데 북원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명의 머슴이 될 거야. 이것도 모르나?”

“북원의 국운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망한 건 아니지. 우리가 숨을 불어 넣어준다면 충분히 저력이 있지.”

“몽골족은 우리의 국운을 갉아먹은 무리입니다. 어찌 돕겠다고 하십니까.”

“명나라를 세운 한족놈들은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그렇게 따지면 그놈들이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가? 이 나라의 국호가 고려인 이상. 안 그런가?”

“······.”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지.”

왕선은 오른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명이 천하를 집어삼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황상 폐하의 위력이 사해에 떨쳤다. 그러나 고려가 어여쁘게 말도 참 잘 듣고, 꼬리도 열심히 흔들어대니 동방의 작은 땅을 내리노라. 열심히 다스려라.’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태조께서 이 땅에 터를 잡으셨고, 500년 동안 우리가 주인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마치 제 놈들이 이 땅을 내린 것처럼 주인행세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북원이 살아서 명과 열심히 싸워야 한다. 만일, 북원이 무너지고 명이 천하를 집어삼킨다면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비약이 아니라 정세를 보는 혜안이라고 하지.”

왕선과 재상들의 날카로운 설전은 이어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단지 개인의 의견으로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 그러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외교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병신이 되자는 건가?”

“···일단 부딪혀 봐야 하는 겁니다.”

“부딪혀본다? 밖에서 떠들어대는 사대부도 그런 말을 하긴 하더군.”

왕선은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교라. 그게 정말 가능성이 있소?”

누그러진 태도.

정몽주는 반색하며 나섰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

“재상들을 믿어보십시오.”

“음. 연좌하는 무리를 모조리 오라고 하게.”

“예?”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오늘 끝을 보지. 아니지. 내가 직접 갈 것이다.”

곧장 일어나서 연좌장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상들은 불안했으나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던 사대부들은 왕선과 재상들이 몰려오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왕선은 사대부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명이 천하의 대국인가?”

“그렇습니다.”

“만일 싸우면 고려는 무너지는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 그렇군.”

“명에 사신을 보내서 이를 철회해야 합니다.”

“사신을 보낸다?”

“예. 그리하여 명 황제의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한가?”

“전쟁보다는 합당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대가 가면 되겠군.”

대들 듯 따지던 사대부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그대가 가서 죽으면 옆에 있는 사람을 보내지. 그리고 또 죽으면 뒤에 있는 인사를 보내고. 좋아. 그대들 사대부가 이 나라 고려의 운명을 책임지면 될 것이야.”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과연 이 나라 고려의 유생들이로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죽음을 각오한 채로 사지로 들어가다니. 좋다. 내 너희의 의기를 수용하겠노라.”

“여, 영공 전하.”

“뭐지? 그새 생각이 바뀌었나?”

왕선은 싸늘하게 노려봤다.

“너희가 제시한 외교적 해결책을 수용했다. 그런데 왜 그러지? 너희 입으로 천하 대국이라고 부르는 명나라 전쟁위기에 놓여 있다. 그래. 그런 거군. 너희는 내부에서 분란을 유도하고 있는 거였군.”

“!!!”

“역시 너희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종자들이다.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다니.”

“소생들은 거짓을 말한 게 아닙니다.”

“좋아. 그러면 증명하라.”

그 말과 함께 왕선의 표정이 변했다.

빙그레 웃으면서 호탕하게 외쳤다.

“순번을 정하겠다. 명 황제가 닥칠 때까지 순서대로 사신을 보내겠다.”

“!!!”

“이 나라 고려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목숨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라고.

잘 보라고. 이게 영공 전하의 외교니까.

겸사겸사 내부에서 설쳐대는 무리도 정리하고.

< 131화 영공전하의 외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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