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담대한 제안, 황제국 고려 >
수렴청정(垂簾聽政)
군주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올곧은 정치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태후와 같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섭정제도이다.
그런데 작금의 고려는 그 경우가 정상적인 수렴청정과는 달랐다.
본래 군왕의 친정이 이뤄졌으나 그 미숙함이 나라를 혼란케 한다는 도당의 정치적 판단으로 수렴청정이 이뤄졌다. 하여, 군왕의 나이와는 무관하게 연속성이 보장됐다. 이를 거두는 건 또 다른 정치적 합의로 가능하다는 게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수렴청정이 오랫동안 지속 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고령의 명덕태후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명을 미뤄볼 때 군왕의 친정은 늦어도 수년대로 이뤄질 게 자명했다.
그런데 모든 게 변했다.
명덕태후가 수렴청정을 물리면서 내린 마지막 말 때문이다.
완산공 왕선. 그리고 그의 수렴청정.
...무엇보다 아직 이립(而立)에도 이르지 않은 왕선의 나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한 가지다.
...향후 고려는 수십 년간 완산공 왕선이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다른 군웅과는 달리 법도의 인정을 받은 명실상부한 완벽한 영지를 기반으로 한 강대한 세력을 보유한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적 수완은 그 끔찍한 가능성의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고 분명하게 이르고 있었다.
그랬다. 지금 고려는 사상 초유의 정국으로 돌입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군웅할거를 넘어서는 수준의 충격이었다.
“흐흐흐.”
“···미쳤소?”
“흐흐흐.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정도전은 연신 싱글벙글.
왕선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작전. 짰소?”
“기가 막힌 방도를 준비...”
“말해보시오.”
“하려고 했는데 태후마마께서 다 하셔버렸지 뭡니까. 이 보다 더 완벽한 판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공 전하?”
...죽여달라고 머리 박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기가 살았다.
“군사? 계속 일 이렇게 띄엄띄엄할 거요?”
“띄엄띄엄 이라니요. 그토록 갈망하던 재상 총재제가 낮은 단계에서 구현됐습니다. 소생 너무나도 기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 뭡니까.”
“그렇소? 음. 그렇지 않아도 직속 군사부를 하나 설립하려고 하오.”
“이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왜?”
“예?”
“군사부의 수장이 꼭 당신이라는 그 위대한 착각은 어디서 나온 거요?”
“소생이 아니면 누가 합니까?”
“진심이오만?”
“······.”
“요즘 군사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져서.”
“적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반대할 겁니다. 영공 전하의 영전을 말입니다.”
“오. 이제 위기감이 드는 거요?”
“험험. 그러나 그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어차피 칼자루가 완전히 우리 손에 넘어왔습니다. 재상일 때도 강했는데 무려 영공 전하가 되셨으니 볼 것도 없지요. 심지어 수렴청정! 위대합니다. 이 정도전. 과거 주공을 군사가 되기로 한 선택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시오.”
“입에 침을 바르지 않고도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고수지요.”
“됐고.”
“딱 한 가지. 오등작은 제후국의 제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고려에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걸 걸고넘어질 것이다?”
“예.”
“됐소. 그건 내가 정리하리다.”
“음. 쉽지 않을 텐데요? 이건 고려 내부를 떠나서 명나라와 북원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할 수 있소. 아주 쉽게.”
“예?”
“물론 저들의 반응을 마음껏 만끽한 다음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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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등작은 황제국의 제도입니다. 제후국인 고려가 이를 범한다면 큰 화가 미칠 겁니다.”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정몽주와 수백 명의 사대부가 연좌를 시작했다.
목이 터지라고 외쳐댔다.
그 결기가 실로 대단했다.
때마침 지나치던 왕선은 감탄하며 박수쳤다.
그리고 도발하듯 외쳤다.
“열심히 하시오!”
몇 차례 박수를 더 쳤다.
정몽주가 굳은 안색으로 다가왔다.
“···진정 수용할 생각이시오?”
“이시오? 하. 진짜 미쳤네.”
“뭐요?”
“됐고. 이미 수용은 했는데?”
“대동군 대감!”
왕선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수문하시중 정몽주. 지금 내가 누구라고 보이지?”
“대동군 왕선. 됐소?”
“마지막 기회였거늘.”
그 순간 본궐에서 수백의 병사들이 달려왔다.
선두는 당연히 나세였다.
정몽주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연좌를 탄압한 게 아니라 수렴청정하는 제왕을 능멸한 죄를 벌하는 것이지.”
고개를 돌려서 나세를 쳐다봤다.
“개처럼 끌고 가게.”
“예. 영공 전하.”
“최영 대감이 이를 알고 가만히 있을 거라고 보시오?!”
정몽주가 대갈성을 질렀다.
“끝까지 미쳤네. 약 드셨나?”
“!!!”
“조금 더 기다리게. 그 최영 대감은 당신 옆에서 콩밥 먹고 있을 거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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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뒷짐 진 채로 먼 산을 쳐다봤다.
“대, 대감.”
“응?”
왕선은 도끼눈을 뜬 채로 임정유를 쏘아봤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뭐? 대감? 지금 죽고 싶나?”
“그, 그것이 아니라.”
“자. 이 영공 전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네.”
“송구합니다. 영공 전하. 이놈이 어리석어 법도를 잘 알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 그런데 네 주인도 법도를 잘 모르나 본데?”
“···영공 전하.”
“제왕의 위치에 오른 종친이 왔거늘 방구석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네 주인은 대체 어느 나라 신하인지 모르겠구나. 심지어 나는 수렴청정을 통해서 이 나라 고려의 지존을 대신하는 몸이거늘.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군.”
“영공 전하. 문하시중 최영 대감은 칩거를 선언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주십시오.”
“칩거? 웃기고 있네. 그러면 사직해야지. 그리고 사직했다고 하더라도 수렴청정하는 제왕이 왔거늘 코빼기도 안 보인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네 주인을 만나려면 순번을 정해서 며칠 동안 기다려야 하느냐? 정말 비싸게 구는군.”
“여, 영공 전하.”
“닥치고 들어가서 전해.”
왕선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셋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아주 박살을 내주겠다고.”
“여, 영공 전하.”
“하나.”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세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둘.”
임정유가 황급하게 뛰어가려는 순간
-쾅!
최영이 문을 박살 내면서 나왔다.
왕선은 비릿하게 웃었다.
“거. 환영 인사가 아주 격하오? 문하시중?”
“감히!”
“감히?”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오만 불순하게 행동하는 것이오?!”
“하. 진짜 하늘이 바뀌었거늘.”
왕선은 매섭게 노려봤다.
“평소 북진을 부르짖으며 황제국 고려를 주창하던 인사가 오등작을 반대하는 명분이 참으로 같잖지 않은가. 당신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틀려먹었는지 잘 알게 되었소이다.”
“!!!”
“나세!”
최영 사가의 대문이 박살 났다.
나세의 언월도가 위협적으로 진입했고, 그 뒤로 병사들이 빼곡하게 보였다.
최영이 눈을 부릅떴다.
“하. 나와 전면전을 하겠다?”
“나는 수렴청정을 하는 제왕. 당신은 뭐요?”
“······.”
“묻겠소. 얌전히 따라서 오겠소? 아니면 개처럼 끌려서 오겠소?”
덧붙였다.
“확실하게 하겠소이다. 내가 완산공이 되어 수렴청정하는 순간부터 이 나라 고려는 역도와 역적이 부활했소. 왜? 고려 왕실의 힘이 당신들과 자웅을 겨룰 만큼 강해졌으니까.”
최영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왕선은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내가 고려 왕실이고, 내 힘이 고려 왕실의 힘이오. 하여, 이 나라 고려 왕실은 강하오.”
등을 돌렸다.
“버티면 그냥 죽이게.”
“알겠습니다. 영공 전하.”
최영은 참담한 표정으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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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십니까? 고려국의 제왕이신 완산공이 아닙니까?”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왕우는 대놓고 이죽거렸다.
“강녕했지요. 아주 강녕했지요.”
“그렇사옵니까?”
“예. 아주 그렇습니다. 완산공이 물어보니 너무나도 감개무량하군요.”
“다행이옵니다.”
“예. 다행이지요. 과인도 전하. 완산공도 전하. 과인도 왕. 완산공도 왕. 이거 너무 다행입니다? 하늘 아래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있습니까? 차라리 이참에 용상에 앉으시지 그럽니까?”
왕선은 싱긋 웃었다.
왕우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했다.
정말로 용상을 가지겠다고 하면 어찌하지?
반대할 재상은 모두 옥에 잡혀 들어간 상태가 아닌가.
...괜한 말을 한 거 같다.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그래서 신이 오늘 주상 전하를 알현한 것이옵니다.”
“하. 뭐하러 이 허수아비를...”
“창제하고 건원하시옵소서.”
왕우는 멈칫했다.
눈을 껌뻑이면서 왕선을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보옵니다. 칭제건원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왕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치, 칭제? 건원?”
“예.
“과, 과인이 황상이라고요?”
“오봉작은 황제국의 제도. 한데, 신으로 인해서 그 법도가 적용되었사옵니다. 그러니 응당 고려는 황제국의 위상을 다시 가져야 하는 게 옳사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왕우의 눈동자가 거세게 철렁였다.
왕선은 몸을 천천히 숙이면서 말했다.
“일찍이 계속 고했사옵니다. 신은 용상에 아무런 욕심이 없사옵니다. 단지, 이 나라 고려를 위해서 살고자 하옵니다. 그 방법을 두고 많은 사람이 신을 욕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사옵니다. 왜? 신의 길이 옳다는 십 할의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강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 칭제와 건원을 제안하는 것처럼 말이옵니다.”
“···반대가 심할 건데?”
“반대하던 무리는 모조리 잡아 가뒀사옵니다.”
“명나라와 북원이 시비를 걸어 올 거요.”
“신이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칭제건원 이후 수렴청정은?”
“지속합니다.”
“······.”
왕선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군주는 빛나고 모든 욕은 신하가 가져갈 것이옵니다. 장차 만세에 이를 고려의 태평성대는 모두 군주가 가져갈 것이옵니다. 사관의 붓은 이 모든 영광을···.”
진중한 눈으로 왕우를 쳐다봤다.
“황상 폐하께 바칠 것이옵니다.”
황상폐하.
그 광오한 단어, 위대한 칭호를 들은 왕우의 눈과 얼굴에는 거대한 탐욕이 치밀었다.
당장 친정을 하지 못하더라도.
당장 실권을 쥐지 못하더라도.
...황제라고 하지 않은가.
비루한 제후국의 군왕이 아니라 천하 대국의 상징 황제라고 하지 않은가.
온몸에서 찌릿한 감각이 멈추지 않고 꿈틀였다.
왕선은 차분하게 말했다.
“눈속임에 불과한 외왕내제가 아니라 진정한 황제국 고려. 신과 함께 그 위대한 문을 여시겠사옵니까?”
“과인이 해야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감히 아뢰옵니다. 틀렸사옵니다.”
“틀렸다고요?”
“과인이 아니라 짐이라고 하셔야 하옵니다.”
왕우의 입꼬리가 미친 듯 씰룩였다.
양손의 손가락이 부들거리면서 괴상하게 움직였다.
“짐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일전에 고했사옵니다. 그대로 계시옵소서. 영광만 가지시고 찬란하게 빛나소서.”
“숨만 쉬고 있으리다. 그러니 나를 황제에 올리세요.”
왕선은 시원하게 웃었다.
“아. 그런데 물어볼 게 있습니다.”
“음. 바로 번복하시옵니까?”
“그저 궁금한 일이라서 그럽니다.”
“이르시옵소서.”
“정몽주와 최영은 어찌 됩니까?”
“정몽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최영의 평소 신념은 황제국 고려였사옵니다. 그런데도 저러고 있사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옵니다.”
“음.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어떨까요?”
“그들의 고집이 아주 강하옵니다.”
“완산공이 허락한다면 짐이 그 사람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왕우는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이 나라 고려는 제후국이 아니라 황제국이노라고.”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천은이 망극하옵니다.”
< 129화 담대한 제안, 황제국 고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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