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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28화 (128/187)

< 128화 영공전하 왕선 >

분위기는 침통했다.

왕선이 전주에 깃발을 꽂은 이후 이렇게 처참한 일은 없었다.

정도전은 참담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죽여주십시오.”

“그런 말 할 거면 진작에 칼에 목 내밀지 그랬소? 그랬다면 이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건데.”

“······.”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소.”

“······.”

“어쨌거나 판단은 내가 한 거니까. 그래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소.”

“······.”

왕선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그런데 말해야겠소. 이번은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오. 왜? 최영의 협잡질을 제대로 가늠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누가? 군사 삼봉 정도전이.”

“······.”

“당신의 역할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내게 선택지를 던지는 거요. 나는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고. 그런데 이번에 당신이 던진 선택지에 최영의 협잡질이 포함되었소?”

“죽여주십시오.”

“그딴 말 할 거면 최영이 칼을 들이밀었을 때 죽었어야지!”

화가 치밀었다.

“얼마나 큰 기회를 날린 건지 아시오? 전주 이씨 삼분지계로 이성계를 완벽하게 봉쇄하여 이 지긋지긋한 군웅할거의 종결을 시작할 수 있었소. 그런데 최영 때문에 완전히 물 건너갔소. 어디 그뿐이오? 그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탑이 무너졌소. 그 옆에 최영이 탑을 올렸고. 입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지금까지 왕선이 이렇게 수하를 탓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작금의 상황은 엄중했다.

왕선의 공세적인 정치를 뒷받침했던 개경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로 잡혔기 때문이다.

개경에 진입한 최영의 사병으로 인해서.

“지금 상황을 말해주리다. 최영, 이성계, 정몽주. 이 작자들이 모두 나를 적대하고 있소. 나라 전체가 다 적이오. 잡아 집어넣은 정몽주는 오늘 당장 풀어줘야 하오. 왜? 이제 나와 최영은 힘이 같으니까.”

“···소생이 반전의 수를 찾아내겠습니다.”

“하. 반전? 참으로 태평하오. 좋소. 잘 들으시오. 나세 장군.”

나세는 침통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본궐 방문 명단이 철회됐습니다.”

“들었소? 삼봉 군사? 이제 적들은 마음대로 강안전을 들락거리며 군왕의 친정을 입에 담을 거요. 나를 지탱하는 또 하나 축. 태후마마의 수렴청정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말이외다. 그다음은? 선인전 체제가 무너지고 도당이 부활할 거요. 그러면? 고려는 끝이지. 하. 좋겠소?”

정도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은 말이었다.

...제일 군사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책이 공든 탑을 박살 내버린 거다.

“죽여주십시오.”

“안 죽일 거요. 그러니 반드시 방법을 찾아오시오.”

덧붙였다.

“친정은 내가 막을 것이니 당신은 최영의 사병을 박살 낼 방법. 그걸 찾으시오.”

“반드시 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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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말하게.”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최영은 이성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할 말일세.”

“대감.”

“자네는 회군에 대해서 내게 일언반구 하지 않았네. 좋아. 묻겠네. 왜 그랬나.”

“대감을 속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니지. 아닐세. 자네가 누구인가. 백전백승의 무장, 상승 불패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이성계가 아닌가. 전장에 나서면서 아군에게 그처럼 중대한 기밀을 숨겼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겠나.”

“······.”

“먼저 손을 뿌리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일세.”

이성계는 숨을 들이쉬면서 말했다.

“하여, 소장을 내치시는 것입니까.”

“나는 자네를 내치는 게 아닐세. 따끔하게 훈계를 하는 거지.”

“···훈계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훈계.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하게.”

최영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성계를 쳐다봤다.

이성계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감. 많이 변하셨군요.”

“이 시절에 온전한 정신을 가졌으면 그게 이상하지.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하륜이라는 책사를 대감께 보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소장은 대감과 항상 함께할 줄 알았습니다.”

“나 역시.”

그 말과 함께 최영은 물그릇을 들었다.

-탁

물그릇을 내렸다.

남아 있는 물은 없었다.

이성계의 눈썹이 씰룩였다.

“머리를 좀 식히고 다시 오게. 그때는 지금과는 달라야 할 것이네.”

“···물러가겠습니다.”

홀로 남은 최영은 크게 숨을 내쉬면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미친 건 자네가 먼저였어.”

씁쓸하게 웃었다.

설마 이렇게 이성계와 결별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야박한 시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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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권근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정몽주는 옅게 웃었다.

“괜찮네.”

“참으로 흉악한 인사입니다. 대동군 왕선 말입니다. 어찌 그렇게 무도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우리가 상대할 적의 모습이지.”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이방원의 장인 민제였다.

“싸워야지.”

“어찌 싸우실 겁니까. 적은 여전히 강대합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 중 한 명인 이숭인이었다.

정몽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최영 대감의 활약으로 왕선의 힘이 약해졌어.”

“음. 왕선의 힘이 약해진 게 아니라 대척점의 힘이 강해진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왕선의 힘이 약해진 걸세. 지금처럼 했던 것처럼 전횡을 일삼을 수 없으니까.”

“그건 그렇군요. 더는 국정을 농단하지 못할 겁니다.”

“단적으로 본궐을 드나들 때 작성해야 했던 출입 명부가 없어졌네.”

“주상을 알현하여 친정을 유도할 생각인가?”

민제가 끼어들었다.

“그것도 방법이네.”

“음. 포은. 내게 방법이 있네.”

“이성계 장군과 손을 잡자는 말이라면 사양하겠네.”

“어째서 그런가.”

“민제. 자네가 이성계 장군과 사돈이라는 건 잘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이번에 확신했네. 이 나라 고려를 흔들어서 어지럽게 하고 병마를 일으키는 건 왕선만이 아니라는 걸 말일세. 나머지 군웅들도 크기가 작을 뿐, 병폐는 분명하네.”

“그러나 모두 왕선과 싸우는 과정이었네. 또한, 그들이 없으면 왕선을 제어할 수는 없어. 잊었나? 지난번 봉쇄령으로 고려 전체 군웅을 흔들어댄 그 위력을 말일세.”

“알고 있네. 해서 그들과 손잡는 게 아니라 이용해야지. 손잡는 순간 우리 사대부도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니까.”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

“······.”

민제는 정몽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치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 자네 곁에는 항상 우리가 있으니까.”

“고맙네.”

“그리고 언제라도 말하게. 이성계 장군은 우리 사대부에게 우호적이네.”

고개를 끄덕이려던 정몽주의 뇌리에 불현듯 스치는 게 있었다.

...선지교의 기억.

알 수 없는 미지의 감정이 올라왔다.

“···왜 그러나?”

“아. 아닐세. 어쨌든 자네 말은 잘 알겠네. 그러나 가장 우선되어야 할 건 이 나라를 정화할 수 있는 건 오직 우리 사대부라는 걸 분명하게 하는 것이네. 적어도 당분간은 사대부의 힘을 보여주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야.”

정몽주의 단호한 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이 나라 고려를 대표하는 사대부였다.

이들이 움직이면 고려 전체의 사대부가 들불처럼 들고 일어난다.

그런데 고약한 게 있다. 고려의 유종이라고 불리는 이색이 이 자리에 없다.

최영과 결탁하면서 자연스레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 탓이었다.

그랬다. 고려의 유종이라고 불렸던 목은 이색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군웅할거와 왕선의 정치는 많은 걸 변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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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합니다. 마마.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괜찮네. 이 사람만은 자네가 애를 참 많이 썼다는 걸 알고 있네.”

명덕태후는 탓하지 않고 자애롭게 웃었다.

얼마 전 개경을 뒤흔들었던 사태는 빠짐없이 태후전에 보고됐다.

왕선의 고군분투는 부족함이 없었다. 단지, 최영에게 밀렸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최영과 재상들이 본격적으로 떠들겠군.”

“예?”

“수렴청정을 거두라고 말일세.”

“마, 마마. 소인이 막을 것입니다.”

“어떻게?”

“마마.”

“약조했던 일이라면서.”

“약조는 깨졌습니다.”

“그러면 정치는 실종되는 거지.”

“이미 정치는 없습니다.”

“대동군. 자네의 정치는 살아야 해. 그게 이 나라 고려 왕실의 마지막 보루야.”

명덕태후의 나지막한 목소리.

왕선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막을 방도는 있습니다.”

“방도가 있다?”

“예. 애초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음. 그건 개경의 구도가 여전하고 최영의 세력이 약해졌을 때 꺼내려고 한 거 같은데?”

왕선은 내심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그 방도는 이미 폐기했습니다.”

“그러면 말해보게.”

“친정을 막는 겁니다.”

“뭐...라?”

명덕태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왕선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수렴청정을 지키는 것. 친정을 막는 겁니다.”

“대동군. 그게 무슨 말인가.”

“이르신 대로 소인의 정치가 이뤄지려면 마마께서 건재하셔야 합니다. 친정이 진행되는 순간 소인의 정치는 죽습니다. 그러니 친정을 막는 것이 방도입니다.”

“지금 각오를 보이는 건가?”

“각오. 맞습니다. 그리고 강안전이 태후전을 넘어서지 못하게 할 방도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강안전이 직접 친정을 거절하면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주상은 친정에 대한 욕구가 아주 크네.”

“압니다. 그러나 소인은 할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예. 한 번 더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음.”

“마마.”

“알겠네.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해서 버티겠네.”

명덕태후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날 밤 명덕태후는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왕선과의 대화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믿는다. 그러나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일 거다.

이번 일을 거치면서 명덕태후는 분명하게 목도했다.

고려 전역을 휘젓고 있는 군웅들의 엄청난 힘을. 그것은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알게 됐다.

그 강대한 힘을 짓누르고 있었던 건 오롯이 왕선의 능력이었다는 걸.

감탄했다. 또 감탄했다.

이 나라 고려에서 누가 그런 위력을 보였던가.

개혁의 중흥 지주라고 불렸던 선대왕도 그러지 못했다.

고려 4대 군왕이었던 광종만이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광종은 군왕이었고, 왕선은 일개 종친이다. 심지어 원래는 몰락한 왕족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잘 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이번에 강안전을 잡아둬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해낼 것이다. 왕선이라면.

그러나 그다음은?

또다시 거센 저항에 봉착할 거다.

그리고 또 그다음은?

여전히 거센 저항에 봉착할 거다.

...끝없이 반복될 거다. 그러는 동안 고려는 국운이 쇠할 것이다.

...그리고 이 늙은 몸이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수렴청정은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 친정은 언젠가는 시작될 거다.

그때는?

명덕태후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바로 그때가 고려의 몰락이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동이 텄다.

한숨도 자지 못했으나 정신이 또렷했다.

명덕태후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외쳤다.

“내관.”

“예. 마마.”

“선인전으로 갈 것이네.”

“속히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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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재상이 모였다.

삼사 오오 모여서 웅성거렸다.

왕선의 곁에는 누구도 없었다.

그런데

“대동군.”

최무선이었다.

“거들지 못해서 미안하네.”

문익점이었다.

왕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저들이 두 분을 배제한 건 알고 있습니다. 탓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이 자네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데.”

“하하하. 이렇게 말 걸어주셔서 힘이 납니다. 안 그래도 입이 근질거렸거든요.”

“대동군. 농을 할 때가 아닐세. 최영 대감이 자네와의 약조를 명분으로 친정을 청할 것이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반드시 분쇄될 겁니다. 바로 오늘.”

“뭐?”

“굳이 돕고 싶다면 두 분께서는 결사적으로 반대해주십시오. 일단 선인전이 끝나고 이 사람이 강안전으로 갈 겁니다. 그러면 다 해결됩니다.”

“음. 알겠네.”

선인전 곳곳에서 정략을 주고받을 때 왕우와 명덕태후가 모습을 보였다.

모두 긴장된 표정이었다.

바로 오늘 이 나라 고려의 운명이 바뀐다.

지금까지 이토록 시퍼렇게 날이 선 선인전은 없었다.

숨을 쉬려고 코로 들어간 공기조차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신 문하시중 최영. 고할 것이 있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명덕태후였다.

“마마.”

“기다리라고 했소. 노환이 와서 이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셨소?”

“···마마.”

“기다리시오.”

오늘따라 명덕태후의 기세가 평소와는 달랐다.

최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오늘 이 사람이 재상들에게 할 말이 있소.”

그녀의 목소리가 선인전을 울렸다.

팽팽한 긴장감은 좌중을 빼곡하게 에웠다.

...대체 무슨 말일까?

...수렴청정을 언급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재상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질 때

“이 사람의 수렴청정은 오늘이 마지막이오.”

그녀의 한마디.

엄청난 충격이 선인전을 집어삼켰다.

재상들의 얼굴에는 환희가 치솟았고, 왕선의 안색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됐다. 드디어 됐다.

...어쩌자고 저러시는 것인가.

두 가지 생각이 선인전을 채웠다.

그리고 왕우는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무척이나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는 동안 명덕태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일찍이 문종께서 이 나라의 법도를 세우시며 오등 봉작제를 이르셨소.”

...느닷없이 폐기된 오등 봉작제는 왜 언급하는 걸까?

그건 신하는 공작(국공, 군공), 후작(현후), 백작(현백), 자작(개국자), 남작(현남)의 오등작. 왕족은 공작(공), 후작(후), 백작(백)의 삼등작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봉작으로 받은 왕족은 제왕이라고 불렀다. 이는 황제국의 제도였다.

“원 간섭기 없어졌으나 선대왕이 바로 잡았소. 그러나 이 또한 얼마 가지 못했기에 이 사람의 마지막 소임으로 고려의 법도를 세우고자 하오.”

그녀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하여, 오늘 이 사람은.”

명덕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왕선을 쳐다봤다.

“대동군 왕선을 완산공으로 임명할 것이며, 전주를 그의 분명한 영지로 하사할 것이다.”

그 순간 선인전은 정적이 감쌌다.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다 멈춘 거다.

그러나 이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로써 완산공 왕선은 군왕 다음 왕실 최고 존엄을 이어받게 되었소.”

...완산공? 왕실 최고 존엄?

이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재상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될 때 그조차도 날려버리는 충격의 강풍이 날아왔다.

“하여, 완산공 왕선을 군왕의 후견인으로 삼을 것이오.”

...후견인?!

강풍은 재상들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명덕태후는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완산공 왕선은 이 사람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에 임하시오.”

공기조차 짓눌러버리는 억겁의 충격이 선인전을 내려찍었다.

모든 재상은 바닥을 파고 들어간 공기로 인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굳었다.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조차 쉬기 어려웠으니까.

...지금 나 영공전하(令公底下) 된 거야?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진한 미소를 지었다.

바야흐로 진정한 재상 총재제의 밀알이 뿌려진 거다.

하여,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리고 재상들은 드디어 이 참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고려 500년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공(公) 그러니까 제왕(諸王)이 탄생한 것이다.

...수렴청정이라는 백마에 올라탄 채로.

< 128화 영공전하 왕선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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