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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27화 (127/187)

< 127화 개중지왕 최영 >

정도전의 시선은 빠르게 왕선을 살폈다.

...싸늘했다. 너무나도 싸늘했다. 그리고 그 싸늘함은 정몽주를 향하고 있었다.

황급하게 말했다.

“주, 주공. 포은은 소생이 설득하겠습니다.”

“시끄럽소. 군사는 이 자리를 지키시오. 가별초가 한치라도 다가온다면 화약 병기를 총동원하여 격멸하시오.”

“주공.”

왕선은 답하지 않고 성벽을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정몽주와 사대부도 성벽 지척까지 다가왔다.

“길게 말하지 않겠소. 해산하시오.”

“해산하려면 죽여야 할 거요.”

“미쳤군.”

“뭐요?”

“안 보이시오? 지금 이성계의 가별초가 법도를 어지럽히고 있거늘.”

“법도? 지금 법도라고 하셨소?”

“예. 법도라고 했소.”

정몽주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수천의 기병이 개경을 향해서 돌격했는데 법도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다니. 고려의 집정 대신으로서 참으로 원통하오.”

“오. 그렇소? 그러면 역도라고 하면 되겠구려.”

“역도지요. 그런데 대동군이 이성계 장군을 역도로 규정하고, 이 사태를 역모라고 선언할 수 있소? 그럴 힘이 있기나 하오?”

“그래서 지금 이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거요?”

“당신의 작태가 참으로 한심하다는 걸 질타하는 것이외다.”

왕선은 이죽거리듯 웃었다.

“바쁘오. 짧게 합시다.”

“성문을 여시오.”

“도당이 해산했으니 사병 진입을 금하는 법도는 없다?”

“물론이외다. 또한, 수문하시중으로서 충분히 집행할 수 있는 일이외다.”

“그래요. 그러면.”

왕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문하시중으로서 어디 한번 해보세요.”

“뭐요?”

““이 나라 고려의 수시중 대감께서 이르신 대로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역모라고 봐도 무방한 일이오. 그리고 이거 아시오? 지금 당신은 역모를 거들고 있는 거요.”

“닥치시오!”

“지금 이 나라에 정치를 실종하게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과 저들이오. 후회하지 마시오.”

왕선은 손을 거칠게 휘저으면서 외쳤다.

“천목!”

“예. 형님.”

“모조리 끌고 가.”

“알겠습니다.”

“대동군! 우리를 해산하려면 죽여야 할 것이외다!”

“알아서 죽어주면 참으로 고마울 거 같소.”

냉소적으로 답했고

“천목! 좋게 끌려가지 않으면 그냥 죽여.”

냉소적으로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정몽주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내 오늘의 일은 잊지 않을 것이외다.”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이 사람이 알아야 하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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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개경 성문을 쳐다봤다.처명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군.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또 당했군. 처음부터 농락당한 걸 수도 있고.”

“장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성벽을 돌파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리 군웅할거라고 할지라도 용납되는 건 여기까지. 성벽을 뚫는 순간 사태는 걷잡을 수 없네.”

“장군께서 대동군 왕선을 제압하면 어찌 역적이 되겠습니다. 이기면 됩니다.”

“개경에 내 식솔들이 있네.”

처명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장군.”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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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별초가 물러납니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었다.

“성문을 열어라.”

“형님?!”

“승리를 만끽해야지. 가별초를 한껏 비웃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가별초가 물러났는데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왕선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허.”

“···최영 대감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천목. 군사는?”

“여기 있습니다.”

어두운 표정을 한 정도전이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정몽주의 처우로 인한 것일 터.

왕선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최영 대감이 미쳤나 보오.”

“···이상합니다.”

“무슨 말이오.”

“개경 진입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저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음.”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입은 실패했는데 주둔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천목이었다.

왕선과 정도전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그를 쳐다봤다.

“허. 군사.”

“이럴 수가. 주공.”

“천목이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구려.”

“예. 이래서 사람은 길게 살고 봐야 하나 봅니다.”

마천목은 시뻘게진 얼굴로 눈만 껌뻑였다.

왕선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네 말대로다. 이제 보니 최영 대감의 숨은 책략이 이거였어. 그래. 이거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그렇습니다. 이성계 장군의 가별초가 이렇게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건 개경 지척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철원의 병력을 움직일 명분이 없었던 최영 대감으로서는 많이 아쉬웠을 겁니다. 이번이 딱 적기였군요.”

“그래서 나와 태후마마 사이에 끼어들었던 거고.”

“예. 이간질이 성공하면 그대로 좋은 거고, 만일 봉합된다면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용을 쓸 거니까요.”

“모든 시선을 남경에 집중하게 한 거였어.”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최영 대감이 이런 기가 막힌 수를 내다니.”

“그 덕분에 우리가 놓친 걸 알게 되었구려.”

“바로 그렇습니다.”

왕선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외쳤다.

“당장 나세 장군에게 명하시오.”

“예. 이 나라 고려의 왕실은 재상들의 사병이 개경 지척에 주둔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리겠습니다.”

“마무리는 깔끔하게.”

“전군을 동원하겠습니다.”

“아주 지당한 말이외다.”

그 즉시 나세는 개경 안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진군했다. 꼭꼭 숨겨뒀던 재가화상과 상인으로 위장한 사병까지 보냈는데 본 궐 수비병력까지 더하여 그 수가 2천 명에 육박했다.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 충돌도 불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니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왕선은 기분 좋게 성벽에서 내려왔다.

“태후전으로 가실 겁니까.”

“아. 그래야지요. 경과와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까.”

그런데

“결과라. 너무 섣부르군.”

웃음이 담긴 외침.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왔다.

...무척이나 익숙한 이들이었다. 바로 재상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좌우로 갈라졌는데

“!!!”

“!!!”

왕선과 정도전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거세게 철렁였다.

“전장에서 섣부르게 결과를 예단하는 건 졸장이나 하는 걸세.”

최영이었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군.”

그 말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노비들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노비로 위장한 재상들의 사병.

재상 1인당 대략 10명 남짓한 최소한의 사병을 숨겨뒀다.

이는 왕선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진짜 노비는 모두 내보내고 그 자리를 사병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이 적힌 노비 문서까지 들고 와서 들이밀었으니까.

재상의 사가에 노비를 아예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별수 없이 넘어간 일이 악수가 되어서 돌아온 거다.

...다 모아내니까 대충 100명은 됐다.

“···이거 개경에 계셨습니까? 미처 몰랐군요. 알았으면 진작에 빅엿을 드렸을 건데.”

“그 알아들을 수 없는 해괴한 말은 여전하군.”

최영은 싸늘하게 웃었다.

“무릇, 전장에서 가장 상책은 적장을 흔드는 거지. 그래야 아군의 비밀스러운 행보가 감춰지거든.”

...성 밖에서 달려온 이는 최영의 당여 변안열이었다.

그리고 하륜과 함께 움직인 사람도 최영이긴 했다. 중간에 샛길로 빠진 걸 파악하지 못한 거다.

완벽하게 속았다.

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이렇게 나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내 이름이 최영이라는 사실을 잊은 대가지.”

“그래서 이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피 토하는 심정으로 그러고 싶네.”

“뭐. 해볼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설마 명분을 찾나? 이 시절에 명분이 어디 있다고.”

왕선은 우스웠다.

“명분은 무슨.”

같잖다는 듯 쳐다봤다.

“이보세요. 내가 개경의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데 눈엣가시 같은 당신들을 살려둔 이유가 명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허.”

“그랬다가는 당신들이 알박기해둔 땅에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살려둔 거지. 죽이긴 개뿔.”

“나는 다르네.”

“웃기지 마세요. 최영 대감. 그거 알려줄까요? 누구라도 모가지부터 날리는 일이 발생하면 고려의 사직은 끝입니다. 진짜 몰라요?”

“······.”

사실이다.

그러는 순간 해당 군웅의 거점에 대한 영향력은 완벽하게 상실하게 되니까.

이미 군웅할거를 만끽한 군현의 독립성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개경의 장악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군웅할거가 개경의 정치력을 무너뜨렸는데, 군웅할거가 개경의 위치를 지탱하고 있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모를 수 없다.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눈빛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최영은 살기를 담아서 말했다.

“잊었나? 조민수와 지용기에게 했던 거처럼 가둘 수는 있네.”

왕선은 비웃었다.

“그러세요.”

“허.”

어차피 그럴 생각 없는 거 안다.

왕선은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아니면 원하는 걸 말하던가.”

“개경 사병 진입.”

“하. 정말. 정말 지독하게도 사병 타령하시네요. 나라를 말아먹고 싶어서 환장했지요?”

“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건 자네고.”

“아. 네.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습니다. 맛이 끝내주네요. 됐습니까?”

“이상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답변은?”

꺼져.

이렇게 말하려고 할 때 정도전이 옷깃을 잡았다.

슬쩍 쳐다보니까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참으라는 거다.

-최영이 미쳐 날뛸 수도 있습니다. 부디.

...하. 정말.

그런데 바로 그때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또다시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얼핏 들어도 2천을 넘는 대군이었다.

전주 이씨 연합군.

그러니까 이옥과 이원계였다.

왕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거 상황이 변했군요?”

“그렇게 보이나?”

최영은 비웃었다.

“그러면 이러지.”

순식간에 최영이 칼을 뽑았다.

마천목이 창을 휘저으며 막으려 했으나 정지와 박위가 개입하면서 허무하게 밀려났다.

순식간이었다.

“자네는 못 죽여도 당여들 쫌이야.”

정지와 박위의 칼이 마천목의 목을, 최영의 칼이 정도전의 목을 향했다.

왕선이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러면 당신들도 죽어요.”

“해보던가.”

“하. 진짜 이건 뭐 정치도 아니고 협잡도 아니고. 진짜 개판입니다?”

“헛소리 말고. 어쩔 건가.”

“하. 정말. 다시 협상할까요?”

최영은 옅게 웃었다.

“나의 사병만 진입하겠네.”

“가별초는요?”

“원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비웃었다.

그랬다면 관심법이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뭐?”

“뭐.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믿지요? 이번에도 사기 칠 수도 있는데.”

“나는 사기 친 적 없네. 이성계를 잡기로 해서 잡았지. 그런데 비밀로 하기로는 안 했지. 안 그런가?”

“허. 이거 정치가 예술입니다?”

“개판이라고 말한 건 자네야.”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이건 정치가 아니라 전략과 전술이지. 나 최영의 전장에서 통용되는 거. 전장에서는 이기는 것이 정도이며 법도니까.”

“아. 네.”

왕선의 답변과 함께 정도전과 마천목의 목을 향하던 칼이 거둬졌다.

“아주 크게 배웠습니다. 앞으로 기대하세요. 아주 시원하게 해줄 테니까.”

“자네야말로.”

생각할수록 열 뻗쳐서 한마디 보탰다.

“가별초. 내치세요. 계속 지척에서 대라 소리 내고 그러면 협상 무효입니다.”

“사전에 없던 내용일세.”

“그러면 하지 말든가요.”

이옥이 점차 가까워졌다.

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하겠소? 대동군 대감?”

...하. 진짜.

< 127화 개중지왕 최영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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