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25화 (125/187)

< 125화 개판 며칠전 >

정몽주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평생 이토록 불쾌함은 느껴보지 못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입술이 몇 번이나 들썩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다.

“방...원이가 아니냐.”

“예. 방원이가 맞습니다.”

참으로 서늘했다. 이방원 목소리가 정몽주의 오감을 자극했다.

본능적으로 절대 경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하지만 곧장 정몽주는 자세를 최대한 편하게 고쳐잡았다.

...그러면서도 이방원의 주변을 살피고 있는 자신을 확인했다.

헛웃음을 삼켰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네 아버님을 찾아가려고 했다.”

이방원은 말없이 고개를 기괴하게 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정몽주의 심장은 크게 울렁였다.

“아버님은 바쁘십니다.”

“···그래. 정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하여, 오늘 숙부님은 아버님을 만나지 못하십니다.”

묘했다. 참으로 묘했다.

정몽주는 온몸을 감싸오는 이 끈적함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면 네가 말을 전해주겠느냐.”

“얼마든지요.”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정몽주의 머릿속은 이방원의 말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복잡하게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기괴하게 틀어졌던 이방원의 고개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숙부님. 어서 말씀하시지요. 실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먼저 들어도 되겠느냐?”

“안됩니다.”

“어째서 아니 된다는 것이냐.”

“일의 선후는 분명하게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말씀하시지요. 숙부님.”

꽤 불순한 태도.

그러나 정몽주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원래 이방원의 성정이 이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어수선한 정국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는 거니까.

하여, 왕선의 사가를 나온 뒤 선지교까지 걸어오면서 내린 결론을 꺼냈다.

“회군.”

이방원의 눈썹이 씰룩였다.

혀를 날름거리면서 입술을 핥았다.

“이유가 궁금하군요.”

딱 한마디.

회군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이방원의 반응이 너무나도 희한하다.

무슨 뜻인지 묻는 게 아니라 이유를 묻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기괴했다.

“지금 대동군의 독주가 가능한 이유는 개경 안의 병권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이성계 장군의 가별초가 개경진입에 성공한다면 기울어진 판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전주 이씨의 율법을 꺼내 드는 것이다. 물론, 개경에 사병을 들일 수 없으나 이는 이미 해산한 도당에서 결정한 일. 그러니 명분은 충분하다.”

...거짓은 보이지 않는다.

이방원의 검은 눈동자는 정몽주의 눈과 입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자연스럽게 혀가 입술을 핥더니 순식간에 입속으로 들어갔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그래. 어서 아버님께 전하거라.”

“숙부님. 저는 이 선지교를 볼 때마다 늘 허전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이 다리 어딘가에 대나무가 자라면 참으로 보기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지요.”

“대나무?”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생각이 조금 변했습니다. 선지교. 이대로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습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아무쪼록 선지교의 이 모습이 오랫동안 유지되길 바랍니다. 대나무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하면, 물러가겠습니다.”

이방원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물러났다.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던 정몽주는 안도하듯 한숨을 쉬었다.

“허.”

...안도의 한숨이라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 순간 정몽주는 자신의 손과 등이 땀으로 가득 찼다는 걸 깨달았다.

“······.”

온몸을 감싸던 불쾌한 끈적거림의 원인이 이방원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거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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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물러난 이방원의 뒤로 철퇴를 든 조영규가 나타났다.

“말씀하세요. 조영규 대장.”

“어째서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이대로의 선지교가 참으로 마음에 들더군요.”

“예?”

눈을 껌뻑이는 조영규.

뒤돌아보는 이방원의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포은 정몽주를 죽이는 일입니다. 아버님께서 아시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만큼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는 명확한 사유가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조금 전에 보아하니 대동군 왕선과 밀월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또 포은 정몽주의 목숨 따위야 언제라도 끊으면 됩니다.”

이 나라 고려에서 누가 이토록 엄청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포은 정몽주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압박감도 거대한데, 심지어 고려의 집정 대신이다.

그런 거물을 끌어 내리고자 한다면 무수한 정치공작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방원은 숨통을 끊어 버리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다.

“명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생각에 대한 확고한 확신. 그거지요. 작은 틈이 생겼으니 행동은 보류하는 겁니다.”

그랬다. 이방원은 일반적인 궤를 벗어난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조영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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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순조롭습니다.”

“규모는?”

“1,500여 명입니다.”

왕선은 내심 놀랐다.

“굉장히 많구려?”

“주공의 신영지에 많은 백성이 몰렸지요.”

“좋소. 명분은?”

“백성의 사병화. 개경에 있을 수가 없으니 전주로 내려간다고 하는 거지요.”

나세의 본궐 수비병과 달리 신영지의 병사는 분명하게 사병이다.

알게 모르게 훈련을 했으나 그들의 손에 병장기를 쥐게 하고 집결시키는 건 개경에 사병을 주둔시키는 행위가 된다.

이것이 공식화된다면 재상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할 건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바로 이걸 명분으로 삼아서 사병을 개경 밖으로 내보는 것이다.

“이성계 장군의 가별초가 남경으로 진군하더라도 최영 대감이 최선을 다해서 중재하려고 할 겁니다.”

“그럴 생각이더군.”

“예. 그때 우리 사병이 가별초의 후미를 타격한다면 어설픈 중재는 끝나게 되겠지요.”

“가별초는 최영 대감이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할 거고.”

“그리되면 결국 최영 대감의 손으로 가별초를 공격하겠지요.”

“우리 사병은 이문정 선생의 친위대니까. 명분도 완벽하고.”

“예. 전주 이씨의 이해당사자니까요. 음. 그런데 웬일입니까?”

“뭐가 마음에 안 드오?”

“이문정 선생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아. 이제 전주 이씨 직계 가주인데 존중해야지. 안 그렇소?”

“역시 탁월하시군요.”

“기본이외다.”

자잘한 웃음이 오갔다.

“그나저나 최영 대감은 백전의 장수. 우리 계책을 파악할 가능할 가능성은 없겠소?”

“음. 소생의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겁니다. 정치의 영역을 넘어선 전투의 영역이니까요.”

“그러면 어쩔 생각이오?”

“어쩌긴요. 그대로 하면 됩니다. 최영 대감이 다 알아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걸었으니까요. 비록 전투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이번 일의 본질은 정치가 아닙니까.”

“정답이구려. 바로 이게 정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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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군.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지만 본래 나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닐세. 적을 무찌르는 장수지.”

최영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호함. 그 자체였다.

“대감.”

“이번이야말로 대동군 왕선의 국정 농단을 끝장낼 절호의 기회일세.”

“······.”

“그러니 이 사람의 말대로 하시게.”

이성계는 차분한 표정으로 최영을 쳐다봤다.

“대감. 소직의 대에서 전주 이씨가 분열하는 걸 지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장군.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건 대동군 왕선이 책동한 것일세. 이 늙은이가 정치에 어두워도 그 정도 상황은 알고 있네.”

“······.”

“이문정은 왕선의 수하. 이원계는 남은이 선동질했어. 만일 대동군 왕선을 끌어내릴 수 있다면 이 모든 걸 다 정리할 수 있네. 그 사특한 작자만 없어지면 전주 이씨의 분열은 바로 끝날 것이야.”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소직을 내치고 수렴청정을 거두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최영의 미간이 휘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어찌 자네를 내칠 수 있나.”

노여움이 잔뜩 실린 목소리.

어찌나 흥분했는지 최영의 수염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대감.”

“필시 대동군 왕선은 자네가 남경을 공략할 때 이문정의 이름을 이용해서 배후를 공격할 것이야. 그때 자네와 내가 합심하여 일격에 토벌한다면 사정은 달라지네.”

“그다음은 어찌 보고 계십니까.”

“대동군 왕선의 힘이 빠졌을 때 총공세를 펼쳐야지.”

“가능하겠습니까? 어쨌거나 개경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있습니다.”

“이건 정치가 아니라 전쟁의 영역. 이길 수 있네. 제아무리 정략이 뛰어난 대동군이라고 할지라도 전략과 전술로 우리를 당해낼 수는 없어.”

최영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성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최영을 배웅한 이성계는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봤다.

...개경은 동북면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버님.”

이방원이었다.

“최영 대감에게 회군에 대해서 이르시지 않은 연유라도 있으십니까.”

“최영 대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단지, 마지막 한 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니라.”

“과연 아버님이십니다.”

이성계의 시선이 이방원에게로 향했다.

...뭔가 찝찝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속에 있는 말을 하거라.”

“···최영 대감과는 확실하게 손을 잡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나와 최영 대감은 막역한 사이니라.”

“하지만 회군이 결행되는 순간 최영 대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회군이 급박하게 결정된 것처럼 해야지. 동서고금에 회군을 계획한 장수도 있다더냐.”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이방원.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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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습니까?”

초조한 기색의 하륜.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깔려있었다.

“회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더군.”

“······.”

“정치라는 게 참으로 고약하지 않나? 그토록 막역했던 나와 이성계 사이에 비밀을 만들어내게 하다니.”

하륜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밀려왔다.

“포은 사형의 회군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네라면 그 계책을 거절할 건가?”

“······.”

“포은 정몽주가 내게 와서 모든 일을 말하면서 기울어진 개경 군권을 바로 잡자고 말했지. 참으로 절묘한 계책이 아닐 수 없었지. 회군이라니. 그런데 그때 내가 든 생각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말을 정몽주가 아니라 이성계가 해야 했다는 거였지. 그래도 섭섭함을 참고 직접 찾아갔네. 그러나 이성계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지. 이유를 떠나서 참으로 고약한 시절이 아닌가.”

최영은 쓰게 웃었다.

하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성계를 떠나서 최영의 제일 군사가 되었다.

사실 하륜으로서는 이성계와 최영은 큰 차이가 없는 주인이었다.

그러나 개경에서 정략을 더 수월하게 펼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최영이었다. 해서, 말을 갈아탔다.

...그런데 최근 그의 마음을 흔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방원.

그 젊은이가 계속 떠올랐다.

해서, 최영과 이성계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길 바랐다.

그래야만 이방원의 그릇을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야 훗날 그의 제일 군사를 차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일이 고약하게 흘러갔다. 고민이 깊어졌다.

“하륜.”

“예. 대감.”

“분명하게 이르겠네. 함구하게.”

“···알겠습니다. 한데,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최영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해야지.”

최영은 수염을 한 가닥 뽑았다.

“최영답게.”

그 나지막한 단호함을 본 하륜은 목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 125화 개판 며칠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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