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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24화 (124/187)

< 124화 백로의 몸에서 피어나는 흑화 >

왕선은 자찬하듯 말했다.

“최영 대감은 설득했네.”

“대단하십니다.”

“이 사람이 원래 좀.”

“원래 좀?”

남은은 멀뚱히 쳐다본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손사래를 쳤다.

“됐네.”

그때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감. 포은 선생께서 오셨습니다.”

남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물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나?”

“무슨 상황이 펼쳐질지 가늠이 됩니다.”

“그래서?”

“살고 싶어서요.”

“이런.”

“무사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보지.”

때마침 들어온 정몽주.

남은은 황급히 나갔다.

“하하하. 어서 오세요.”

“······.”

정몽주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쳐다만 보던 그의 입이 느리게 열렸다.

“대동군은 이 사람과의 신뢰를 협잡으로 보답했소.”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담긴 분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은 없었다.

평소 침착하고 이성적인 정몽주와는 다른 모습이 분명했다.

그런데 왕선은 싱글벙글 웃었다.

“이미 진흙탕에 들어온 백로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거 같구려.”

왕선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포은 선생의 신뢰와 은혜로 인해서 20일을 확보한 게 아니오. 그 20일은 당신과 이 사람의 거래로 도출된 결과가 아니었소?”

“해서, 협잡이 아니다?”

“우리의 약조는 딱 거기까지였다는 말이오.”

“지금 이 사람과 말장난을 하자는 거요?”

“음. 이거 정확하게 말해야 하겠군요. 우리 두 사람이 한 거래 범위에는 전주 이씨 삼분지계는 없었다는 것이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래도 모르겠다면 아주 친절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줄 의사가 있소. 어찌하면 되겠소이까. 수시중 대감?”

정몽주가 거래의 끝에 수문하시중을 얻어간 걸 꼬집었다.

그러니까 진흙탕에 들어온 걸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동군은 이 사람과의 약조를 이용해서 이성계 장군을 공격한 것이오.”

“원래 진행 중이던 일이었소. 단지,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본 거라오. 마음에 들었으면 좋았을 건데 아니라고 하니까 아쉽긴 하오.”

“양쪽의 치부를 덮으면서 휴전 상황을 만드는 것. 이것이 거래의 종점이었소. 설마 이를 몰랐다고 할 것이오?”

“수시중 대감의 뜻은 잘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거래에 포함되었소?”

“이건 지켜야 할 선이라고 생각했소만?”

“학문을 토론하고 간언하고 상소를 올리고 연좌할 때는 지켜야 할 선이 있지요. 그걸 세상 사람들은 정도라고 부르오. 이 정도라는 건 참으로 고고하고 훌륭하지요. 그리고 참으로 쉽지요. 왜? 떠들기만 하면 되니까. 하여, 그들의 정도를 명분이라고 부르오.”

왕선의 목소리는 상당히 꼬여 있었다.

“그러나 정치와 전쟁은 다르오. 이기는 것. 그것만이 정도요. 수시중 대감은 이겨야 하는 정치판에서 학사와 간관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나의 행동을 협잡이라고 하는 거요. 잘 들으세요.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명분을 말하는 겁니다. 간관과 학사들의 떠들어대는 명분 말입니다. 어찌하여 이게 쉬운지 아십니까?”

“······.”

“시절을 한탄하는 건 쉬우니까. 다른 사람의 정책을 비판하는 건 간단하니까. 군왕이든, 백성이든. 뭐든지 팔아서 지껄이면 되니까. ‘나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와 ‘이런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이걸 할 것이다’ 의 차이? 바로 그거라오.”

“······.”

“학사와 간관이 조심해야 할 건 사실 여부이지요. 상대의 말이 책에 있는 내용인지, 이 상황이 책에 나온 내용인지. 그걸 파악하면 되오. 그러나 정객과 장수가 조심해야 할 건 사실이 감추고 있는 내용이지요. 음. 정치와 전쟁 혹은 정객과 장수의 차이도 있지만 이건 다음에 말하리다.”

실컷 할 말을 다 한 왕선은 과장되게 손사래를 쳤다.

“이거 고려 최고의 석학을 앞에 놓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었군요.”

“···정치라.”

나지막한 목소리.

정몽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정치를 보여주리다.”

“음. 몸을 담고 있는 곳이 백로의 세상이 아니라 까마귀들이 아전 투구를 벌이는 곳이라는 걸 깨달았소?”

“그건 진작 알고 있었소만?”

“아. 그렇군요. 실은 이 사람의 피를 뽑아 먹으려고 했지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정몽주는 몸을 조금 틀었다.

“알고 있었소?”

“당연하오.”

“확실하게 싸우게 되었구려. 아쉽소?”

왕선은 싱긋 웃었다.

“아쉽기는요. 이 사람은 수시중 대감이 재상 총재제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소.”

“음. 그건 그대로 놀랍군요.”

“어렵지 않소. 당신은 철저한 근왕파이니까.”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왜? 재상 총재제를 언급했을 때 흔들리던 정몽주의 마음을 읽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단지 흔들렸을 뿐이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으니까.

‘신우’ 사건은 단지 거들뿐이었다.

뼛속까지 근왕파. 그랬다. 정몽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차갑게 웃었다.

“이런 알고 계셨소? 이거. 참으로 아쉽소. 이 사람은 대동군이 최대한 늦게 알았으면 했는데.”

“최대한 늦게 아는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알기를 바랐겠지요. 군웅할거가 끝장나는 순간 나를 도모할 계획이었으니까.”

“너무 자세히 알고 있구려.”

“나는 미륵이라오.”

정몽주는 지그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백성은 군왕의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하오.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품는 건 군왕만이 할 수 있으면 해야 할 일이외다. 군왕이 아닌 신하가 백성에게 다가간다면 민심이 흔들릴 뿐이외다.”

“그 모든 걸 결정하고 도출하는 것이 재상의 일이오. 군왕은 그 자리에 있으면 되오.”

“그걸 바로 잡는 건 재상의 역할. 군왕의 눈과 귀가 되어서 옥새가 찍힐 위치와 붓이 움직일 방향을 간언하고 또 간언하는 것이오. 딱 여기까지가 재상이 할 일이외다.

“천세에 이를 동안 군왕이 모두 명군이라면 그래도 무방하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오. 역사를 되돌아보시오. 광포한 폭군이 나라를 어지럽힐 때도 구국의 명재상은 항상 존재했소. 바로 그때 그 어려운 시절에 그 재상들이 나라의 실권을 쥐었다면 혼란은 없었을 것이외다. 분명하게 이르겠소. 재상의 역할은 붓을 직접 들고 옥새가 찍혀야 할 공간을 정하는 것이오.”

“바로 그것이 재상 총재제. 유사 이래 어떤 곳에도 없던 기괴한 형태의 찬탈을 구현하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재상 총재제. 유사 이래 어떤 곳에도 없던 혁신적인 형태로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뤄내는 것이오.”

정몽주는 차갑게 웃었다.

“장담하리다. 재상 총재제는 권신의 국정농단을 방어하는 명분이 될 거요.”

“나 또한 장담하오. 재상 총재제는 아무리 머저리 같은 왕이 등장해도 전대의 성세를 이어갈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오.”

“그 재상이 되고자 신하들은 싸울 거요. 조정은 나눠질 것이고. 아울러 언제고 하늘이 내린 왕재가 등장할 것이며 명군의 치세를 펼치고자 할 것이오. 이때 재상 총재제는 군왕의 국정 운영을 방해하는 걸림돌. 왕의 힘이 강해지면 대대적인 숙청이 발생할 것이외다.”

“재상이 모든 실권이 있는 것이 재상 총재제. 그런 일은 불가능하오.”

“왕과 재상은 끝없이 반목할 거요. 정치 조직에는 왕권을 강화하는 기구와 견제하는 기구로 양분하여 싸우게 될 것이외다. 하여, 군약신강이라는 기묘한 정치가 탄생할 것이오. 재상 총재제? 그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오.”

덧붙였다.

“됐소. 다 필요 없소. 백성에게 직접 다가간 대동군의 모습은 현명한 재상이 아니라 용상을 갈구하는 추악함이었소.”

“이거 앞으로의 정국이 아주 기대되오.”

“실망하지 않을 거요.”

그때 소식이 전해졌다.

서찰을 읽은 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정몽주에게 건넸다.

“이거. 이성계 장군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구려.”

정몽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번에 수시중 대감의 정치를 견식 해도 되겠소?”

덧붙였다.

“이 사람은 강 건너 불구경 좀 해야겠소. 그동안 수시중 대감께서 해온 것처럼 신선놀음하면서 말이외다.”

“음. 이거 어쩌지요? 이 사람도 그럴 생각인데?”

“이성계 장군의 남경 공격은 난세를 지독하게 틀어버릴 건데?”

“재상 총재제는 더 멀어지겠구려?”

“군왕의 정치는 가까워진답니까?”

“아쉬운 사람이 나서야지요.”

“허. 치킨게임?”

“···다시 한번 느꼈소. 당신은 좀 이상하오.”

“아. 도솔천의 언어라오.”

“관심 없소. 일을 만든 사람이 처리해야지.”

왕선은 슬쩍 흘겨보면서 말했다.

“그 고고하던 백로는 없어지고 검은 꽃을 부리에 문 까마귀 한 마리가 보입니다.”

아주 잠시 정몽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서 막아보시오. 대동군 대감.”

“이거 수시중 대감께서 일거리만 던져주는군요.”

“자승자박이지요. 아주 완벽히 보기 좋소.”

“하하하. 그렇소? 그런데 이거 어쩐다. 일을 시작할 때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고 보시오?”

“거는 기대가 아주 크오. 이번에도 이 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길 바라오.”

“최선을 다해보리다. 그러면 물러가 주시겠소?”

축객령.

정몽주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은.”

문밖에서 정도전이 쓰게 웃고 있었다.

정몽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여기서 뭐 하나?”

“···포은.”

“그리고 사대부란 사람이 남의 말이나 훔쳐 듣나? 자네 못쓰겠군.”

“포은.”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세. 길은 달라도 벗이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고맙네.”

“벗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닐세. 그러면 가보겠네.”

정몽주는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정도전은 굳은 안색으로 왕선의 앞에 앉았다.

왕선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불편한 어조로 말했다.

“고맙네? 어처구니가 없군. 이보시오. 군사. 지금 정몽주가 우리를 이용하려고 한 거요.”

“어째서 소생에게 모든 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구나.

정도전은 제대로 성질이 난 거 같다.

왕선은 어물쩍 말을 돌렸다.

“드디어 때가 됐소.”

정도전도 더 따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은 매우 급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참으로 저돌적이군요.”

“그러니까 이성계지.”

“어쨌거나 포은의 말대로 주워 담아야지요? 남은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최영 대감을 설득했다고요?”

“아. 그 전에 정치의 가장 백미가 뭔지 아시오?”

능글거리는 왕선의 미소.

정도전은 뭔가 불안했다.

“···뭡니까.”

“내가 벌인 일을 다른 사람이 수습하게 하는 거라오. 나는 그동안 다음 판을 준비하고. 아름답지 않소?”

“포은을 이용하실 생각이라면 거두십시오.”

“그 이유에 포은 정몽주와 벗이라는 게 들어가면 당신은 조용히 이 방을 나가면 되오.”

“소생이 포은과 함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늘이 무너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서?”

“그러나 사리분별은 할 줄 압니다. 지금 이 상황은 포은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째서?”

“병력이 움직이는 순간 정치는 힘을 잃게 되니까요.”

혹시라도 정도전이 흐트러질 걸 우려한 거다.

눈으로 직접 본 포은 정몽주에 대한 삼봉 정도전의 마음은 무척이나 컸기 때문이다.

하여, 그의 다짐을 받아내기 위해서 괜한 말을 해본 거다.

정도전의 속내를 읽어내고 있긴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

“조금 부족하긴 한데 그 정도로 넘어가리다.”

정도전은 숨을 크게 쉬며 복잡한 미소를 띠었다.

“짐승 사냥. 시작하겠습니다.”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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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를 나온 정몽주는 쓰게 웃었다.

설마 왕선이 벌써 눈치를 챌 줄은 몰랐다.

...조금 더 그의 힘을 이용해서 정국 주도권을 잡았어야 했거늘.

아쉬웠다.

“음. 벌써 여기구나.”

미처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생각이 많았기 때문일 거다.

정몽주는 발을 디디고 있는 개경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지교.”

다시 생각에 잠기려고 할 때 느닷없이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숙부님.”

< 124화 백로의 몸에서 피어나는 흑화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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