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전주 이씨 삼분지계 >
명덕태후는 놀란 듯 말했다.
“포은 정몽주를?”
“예. 마마.”
“음. 포은 정몽주라면 흠잡을 데가 없는 인사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왕선을 쳐다봤다.
“소인이 수문하시중이 되면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하긴. 자네는 적이 많지.”
“하하하. 꼭 그렇게 집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이 늙은이가 젊은이의 마음을 상하게 했군.”
“어찌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그저 속상해서 그럽니다.”
왕선의 농을 들은 명덕태후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네. 포은 정몽주라면 수문하시중으로서 이 나라 고려의 혼란을 잘 걷어내겠지.”
“소인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바로 이르겠네.”
“아. 마마. 청이 있습니다.”
“말하게.”
“조금만 미뤄주십시오.”
“그러지.”
아무런 의심도 없는 간결한 대답.
“감사합니다.”
명덕태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수록 아깝도다. 어찌 이리도 권력에 의연할 수 있을까.
...또 이런다.
-용상에는 욕심을 가져도 될 것인데.
왕선은 황급히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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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님.”
“말하거라.”
이방원은 입속의 혀를 살살 움직이면서 말했다.
“숙부님만 믿고 막연하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다른 경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방원. 너는 나서지 말라.”
“아버님.”
“포은 선생이라면 일을 잘 풀어낼 것이다.”
이방원은 왼손 엄지로 코를 몇 번 쓰다듬었다.
“잘 풀어낼 겁니다. 그런데 더 잘 풀어낼 수 있게 옆에서 돕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네 생각이 무엇이냐.”
“사직 상소를 올리십시오.”
“뭐라?”
“그리고 동북면으로 가겠노라 엄포를 놓으십시오.”
“파국을 초래하자?”
“파국이 아니라 선수를 취하는 겁니다.”
“그건 안됩니다.”
방문을 열면서 들리는 목소리.
하륜이었다.
최영의 당여가 되었으나 이성계와 한배를 탄 운명이기도 했다.
이방원은 고개를 틀었다.
“호정 숙부님.”
“네 말이 아주 옳다. 나 역시 그 방법을 취하려고 했어. 모든 재상의 사직 상소로 왕선을 압박하려고 했지.”
“···한데, 어찌하지 않으셨습니까.”
“포은 사형이 찾아와서 겁박하더군.”
“겁박? 고작 겁박에 할 일을 멈추신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군요.”
“시일을 두고 약조한 것이다. 이 난국을 정리할 것이니 기다리라는 말도 덧붙였네.”
“이거 보아하니 대동군 왕선과도 거래한 모양이군요. 그쪽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게 의아했는데.”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륜은 속으로 감탄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보통 그릇이 아니다. 그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방원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속으신 겁니다.”
“뭐?”
“포은 숙부님은 대동군과 밀약을 체결했을 겁니다.”
“근거는?”
“우위를 점했던 대동군이 멈췄습니다. 밀약이 없으면 불가능하지요.”
“그건 추정이지. 근거를 말해보게.”
“근거? 그런 건 없습니다.”
“허. 한데, 어찌 그런 판단을 내리는 건가.”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수세로 몰리게 되는 게 정치가 아닙니까. 저는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결론을 말씀드린 겁니다.”
하륜은 골똘히 생각했다.
이방원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숙부님. 약조를 걷어내십시오. 지금 당장 사직 상소를 쏟아내야 합니다.”
“음.”
“그만.”
이성계의 경고.
이방원은 멈칫했다.
“아버님.”
“그만하라고 했다.”
“장군. 방원이의 말을 고민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포은 선생의 말을 전하러 온 게 아닌가?”
“아.”
이방원의 입에서 묘한 탄식이 흘렀다.
“이거 정황 증거가 하나 더 있군요.”
“뭐라?”
“아버님. 보십시오. 우리는 한 걸음도 못 나갑니다. 이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밖에서 들어오는 건 가능합니다. 포은 숙부님도 그랬고, 호정 숙부님도 그렇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누구든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껏 정적을 묶어놓고 이럴 이유는 없지요.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드디어 하륜도 무릎을 '탁' 치면서 동조했다.
“방원이의 말이 맞습니다.”
“해서, 포은 선생이 중간에서 협잡을 펼친다?”
“소자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이 상황을 정리하면 이겁니다. 포은 숙부가 아버님을 얼마든지 만나게 할 수 있게 판을 짜둔 겁니다.”
“그러고 보면 포은 사형이 소생도 막았습니다. 뭔가 묘합니다.”
이성계의 낯빛에는 거대한 불편함이 내렸다.
“그러니까 포은 선생이 왕선과 한편이다?”
“아버님. 밀약을 체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두고 거래했다는 거군.”
이성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방원은 단호하게 답했다.
“예.”
“방원이.”
“포은 숙부는 전주 이씨가 아닙니다.”
“포은 선생은 동북면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그게 뭐 대수입니까. 대동군 왕선이 알고 있으니 전해 들었겠지요.”
“···대동군 왕선. 그 자도 아무런 행동이 없어.”
“어차피 동북면 일로 우리의 숨통을 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숨 고르기에 불과합니다.”
공기가 참으로 퍽퍽해졌다.
하륜이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장군. 만사불여 튼튼이라고 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지금 두 사람은 조심하자는 게 아니라 판을 엎자는 거지.”
“포은 사형이 약조한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대비는 해야 합니다. 아직 10일이나 남았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호정 하륜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말에 흔들리다니.”
“···방원이의 말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륜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재상들의 사직 상소. 진행하겠습니다.”
“하지 말게.”
“잊으셨습니까? 소생은 최영 대감의 당여입니다.”
“알지. 내가 허락한 일인데.”
“하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다시 이방원이 끼어들었다.
하륜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사직 상소를 거둬서 포은 숙부님에게 전하는 겁니다.”
하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호정 하륜이 오늘 새로운 세상을 보았네.”
“과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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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조금씩 다가왔다.
“다시 생각해보게.”
최영은 진심으로 만류했다.
“대감. 이해해주십시오. 그러나 소직은 대감의 당여로 남을 겁니다.”
“이 사람아. 이 늙은이가 그깟 세력 때문에 만류하는 거로 보이나?”
“······.”
“이성계는 자네 아우일세.”
이원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 겁니다.”
“···자네 결심한 건가?”
“생각을 바꿀 여지는 없는가?”
“송구합니다. 대감.”
“허.”
최영이 한탄하자 이원계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대의와 비교하면 참으로 옹졸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직은 가문을 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아.”
“적어도 전주 이씨가 협잡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다 그래. 정치판에서 안 그러는 사람이 누가 있나.”
“예. 다 그러지요. 그러나 전주 이씨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우리 가문이 얼마나 멸시를 받으면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십니까?”
“······.”
“해서, 아버님께서는 협잡을 멀리하셨습니다. 당당하게 고려의 일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 선대의 과오를 바로 잡고자 항상 정도만 걸었습니다. 그런데 소직의 아우는 너무 멀리 갔습니다. 이를 바로 잡을 겁니다.”
이원계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최영은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다만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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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하는 건가?”
“재상들의 사직 상소입니다.”
정몽주는 하륜을 지그시 쳐다봤다.
한참을 말없이 그러기만 했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이 대동군과 밀약이라도 체결했다고 생각하나 보군.”
...어찌 알아낸 걸까.
하륜은 기가 막혔다.
“···예. 실은 그렇습니다.”
“밀약은 아니고 적당한 거래는 했네.”
“예?”
“모든 걸 덮기로. 됐는가?”
...이건 또 무슨 전개란 말인가.
하륜은 난생처음으로 버벅댔다.
정몽주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이 중간에서 고생했으니 답례도 하나 받았네.”
“답례요?”
“수문하시중.”
“!!!”
“됐는가?”
“어...”
“어?”
“소, 송구합니다. 사형.”
“하면, 이제 물러가게. 꼴 보기도 싫은 이 사직 상소는 모조리 태워버리겠네.”
“그, 그리하십시오.”
하륜이 나간 뒤 정몽주는 물끄러미 양손을 내려봤다.
“아직은 변함없다.”
양손을 조금씩 들었다.
“이 길의 끝에 섰을 때도 여전히 흰색이길 바랄 뿐.”
표정이 고통스럽게 씰룩였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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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약조한 날이 됐다.
이성계의 사가를 포위했던 모든 군사는 철수했다.
“내가 뭐라고 했더냐.”
“송구합니다. 아버님. 소자가 너무 예민했습니다.”
“앞으로는 더 겸손해야 할 것이다.”
“예. 아버님.”
대답은 했으나 이방원은 찝찝함을 걷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아이고. 이거 반갑구려.”
무척이나 거슬리는 목소리.
이방원의 눈길이 천천히 옮겨졌고 재수 없게 웃는 왕선이 보였다.
“대동군. 무슨 일이시오.”
“무슨 일이긴요. 구경 왔지요.”
“구경?”
“불구경.”
“불구경을 왜 여기서 하오?”
“전주 이씨의 담벼락 너머에서 불구경이 났으니까.”
“뭐요?”
이성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때 사가의 문을 넘는 사람이 있다.
“아우님.”
“형님께서 오셨습니까.”
“백부님. 오셨습니까.”
이원계다.
왕선은 어깨를 들썩이면서 끼어들었다.
“재주껏 불 꺼보시오.”
왕선은 신이 난 듯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이성계는 그 뜻이 궁금했으나 이원계를 앞에 두고 왕선을 잡을 수는 없다.
“형님. 안으로 드시지요.”
“아닐세. 오늘은 아우님께 긴히 할 말이 있네.”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왜 마당에서 이러고 있을까?
이방원의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동북면 조작 사건이 진실인가?”
“···형님. 그건 소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사실이냐고 물었네.”
“···사실입니다.”
“허.”
“형님. 사정이 있습니다.”
“직접 들으니 너무나도 참담하도다.”
이원계는 한탄했다.
“아버님께서는 얼마도 통탄하시겠는가.”
“형님. 전주 이씨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이 못난 형도 전주 이씨를 위하고자 하네.”
옆에서 듣던 이방원의 눈썹이 크게 씰룩였다.
그의 감각이 경고를 보냈다.
...저 입을 일단 막아야 한다고.
“백부님. 오해가 큰 거 같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오늘 이 조카가 모시겠습니다.”
“최영 대감의 세력에서 벗어났네.”
“감축드립니다. 과연 백부님이십니다.”
“남경을 기반으로 전주 이씨의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네.”
“!!!”
이방원의 눈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성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이 사람이 형이었으나 전주 이씨의 가주가 되지 못했음을 원망하거나 아쉬워한 적이 없네. 왜? 이성계가 내 동생이니까.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니까.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아우님이니까. 다름 아닌 이 나라 고려 최고의 상승 불패의 명장이니까.”
“지금 제가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심지어 아버님이 남기신 동북면의 안위를 걸고?”
“다시 묻습니다. 형님.”
“내가 자네보다 재주는 부족하지만, 전주 이씨의 정도가 어그러지는 걸 볼 수가 없네.”
이원계는 냉정하게 말했다.
“전주 이씨. 내 지분을 가져가겠네.”
“제가 이를 용납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가문의 내분이지. 피비린내 생사결. 나는 준비됐네. 자네는?”
덧붙였다.
“비록 자네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절대 만만하게 봐서는 아니 될 것이네. 나 역시 아버님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이성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이 늙은이도 빼지 말게.”
꼬장꼬장한 목소리.
시선이 쏠렸다.
현존 전주 이씨의 최고 배분을 가진 이문정이었다.
이성계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발을 들이미시오.”
이원계도 의아한 듯 쳐다봤다.
“이 선생께서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이문정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흔들리는 전주 이씨를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네. 이 늙은이의 얼마 남지 않은 삶. 가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볼까 한다네.”
“갈!”
이성계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이문정은 손바닥을 슬쩍 올렸다.
그 즉시 사가의 담벼락 밖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는 자네들처럼 군마는 없으나 이 나라 최고라고 자부하는 선비가 있고, 지역적 거점은 없으나 고려에서 가장 훌륭한 서원을 가지고 있지.”
이문정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전주의 서원에서 밤낮으로 공부한 이 나라 고려의 신지식인들일세.”
족히 수백 명의 인원이었다.
분위기는 실로 기묘해졌다.
“이원계 장군.”
“예.”
“자네는 내게 군사적 지원을 해주게. 그러면 이 늙은이는 자네에게 지혜를 주겠네.”
그제야 이원계는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했다.
“어떤가. 나와 손을 잡겠는가?”
“하지만 가주가 여러 명일 수는 없습니다.”
“무릇 가문은 항상 방계가 존재하는 법일세.”
이문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적통 직계를 논하지.”
덧붙였다.
“전주 이씨 최고 배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방원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핏줄이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로 힘을 꽉 주었다.
역시 밀약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왕선의 모습이 진하게 그려졌으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는 다른 인사가 대신했다.
포은 정몽주.
감히.
이를 빠뜩 갈았다.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험악했다.
마치 악귀와도 같았다.
< 122화 전주 이씨 삼분지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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