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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21화 (121/187)

< 121화 백로와 까마귀 >

적의 심장에 꽂아 박을 비수를 준비하던 정도전은 예상외의 방문객을 보고 크게 반색했다.

“아니. 포은.”

“왜 이리 놀라나?”

“칩거를 깬 건가?”

“칩거는 무슨. 잡다한 일을 처리하느라 그리되었네.”

정도전은 코를 찡그리면서 웃어댔다.

“자네가 하는 일에 잡다한 게 어디 있겠나.”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지.”

“하긴. 자네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보니 꼭 잡다한 일은 아닌 것 같네.”

“응?”

정도전은 이제야 정몽주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자네 무슨 일이 있나?”

“자네 식솔. 내가 데리고 있네.”

사람은 너무 놀라면 그대로 굳어버린다.

지금 정도전이 그랬다.

냉철한 그의 이성도 정지됐다.

“반응을 보니 내 말을 바로 알아 들었나 보군.”

“포, 포은. 일단 내 말을 좀 들어보게.”

“됐네. 오늘은 자네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내 말을 전하러 온 것일세.”

정도전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모든 신경이 정몽주의 입으로 집중됐다.

...긴장감이 타올라서 온몸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게.”

“포은. 그게 무슨 말인가.”

“묻지도 따지지도 말게나.”

그 말을 끝으로 정몽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연실색한 정도전은 하던 일을 멈췄다. 지금은 이 일을 한시라도 빨리 왕선에게 알리는 게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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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포은 선생에게 못난 꼴을 보였구려.”

“못난 꼴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쨌거나 이렇게 갇힌 신세가 아니오. 그러니 못난 꼴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정몽주는 얕게 숨을 내쉬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데 못난 꼴이라고 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포은 선생이 그렇게 말해주니 답답하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오.”

“그런데 억울하지 않다면 못난 꼴이 맞지요.”

맑고 부드럽게 자리 잡던 이성계의 미소가 멈췄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순식간에 미소가 다시 올라왔다.

“포은 선생.”

“이 장군. 오늘 장군을 찾아뵌 것은 벗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음. 확실히 오늘따라 달라 보이는구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동북면 조작 사건.”

“그건 말 그대로 조작이오.”

“이미 소생이 모든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결과는 진실이었습니다.”

“그깟 먹칠한 종이를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오.”

“끝까지 거짓말을 하시는 겁니까.”

“포은 선생이 거짓에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정몽주는 흐트러짐 없이 이성계를 곧게 쳐다봤다.

“이 댁에 있던 대동군의 식솔. 소생이 데리고 있습니다.”

여유를 보이던 이성계는 멈칫했다.

정몽주의 눈동자는 그 모든 걸 놓치지 않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동북면 사건을 조작하셨습니까?”

“하나만 약조하시오.”

“예.”

“포은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처결하시오.”

“물론입니다.”

“사실이오.”

“알겠습니다.”

정몽주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너무나도 담담했다.

...이성계는 가슴 한편이 허전해졌다.

“이 장군.”

과연.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이성계는 차분하게 시선을 바로 잡았다.

“소생이 다시 찾아뵐 때까지 자중하십시오.”

“···포은 선생.”

정몽주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이성계의 표정은 참으로 씁쓸했다.

어느새 정몽주가 방문을 나서고 있다.

이성계는 지금이라도 그를 잡고 싶었다.

그래. 그러자.

하지만, 마음을 먹었을 때 정몽주는 보이지 않았다.

쓴웃음이 치밀었다.

“숙부님.”

이성계의 사가를 나서려고 할 때였다.

“방원이구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그래. 너도 동북면에서 고생이 많았다.”

“개경에서 협잡과 싸우시는 숙부님의 노고에 비교할 수는 없지요.”

정몽주는 이방원을 지그시 쳐다봤다.

“방원아. 자중하거라.”

“숙부님.”

“그게 네 아버님을 위하는 일이다.”

“······.”

“알겠느냐?”

“······.”

“알겠느냐고 물었다.”

“···숙부님의 말씀은 잘 새기겠습니다.”

끝내 알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방원을 훈계할 시간 따위는 없다.

이성계의 사가를 벗어난 정몽주는 한탄하듯 밤하늘을 쳐다봤다.

“오늘 밤이 참으로 길구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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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가 없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왕선은 헛웃음만 나왔다.

일이 꼬여도 너무 더럽게 꼬였다.

“거참. 괜히 고생했소. 안 그렇소?”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 기다리라고 했다고?”

“예. 무슨 생각인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가늠할 필요 없소. 만나보면 알 거니까. 어차피 칼자루는 넘어갔으니까.”

“음. 주공.”

“아. 방책이라는 걸 꺼내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예.”

“포은 정몽주. 죽여도 되오?”

정도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덜덜 떨리는 볼살은 흉측하게 보일 정도였다.

“주공.”

“군사. 잘 들으시오. 만일 포은이 우리를 파괴하려고 한다면 그는 적이오.”

“주공.”

“본인 입으로 말했지 않소이까. 그는 타협하지 않는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포은 정몽주와 치러야 할 전쟁은 그가 죽어야만 종전될 거요. 틀렸소?”

“소생이 설득할 수 있습니다.”

“내 말 똑바로 듣고 새기시오. 그를 죽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방책을 가져오라는 거요. 나와 전주를 거덜 내려는 적에게 어설픈 감정을 들이밀면서 일을 망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랬다. 죽자고 덤비는 적을 상대로 손을 내밀면 손이 잘리고, 말을 건네면 혀가 잘릴 거다. 그러면 피만 철철 흘리다가 죽는 거다.

그 험한 꼴 피하려면 손을 내미는 척하다가 먼저 칼로 찔러야 한다.

왕선은 이 지극한 원칙을 이른 거다.

삼봉 정도전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은 정몽주라는 이름 앞에는 유독 무뎌질 것이 뻔하기에 확실하게 언급한 것이다.

정도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몽주가 찾아왔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사람을 기다리셨소?”

“안 그러면 혼쭐내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하길래.”

정몽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대동군이 이 사람에게 말한 재상 총재제. 거짓이었소.”

“뭐. 그랬다고 합시다.”

“···역심을 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오?”

“이 사람이 볼 때 이 나라 고려에서 가장 불통인 사람은 당신이오. 만일, 내가 역심을 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그대로 진행할 것이 아니오? 뭐하러 구차하게 변명하겠소. 그럴 생각 없소.”

정도전은 죽을 맛이었다.

지금 왕선이 정몽주를 대놓고 도발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파국이다.

하지만,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몽주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정도전의 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면, 이 사람의 제안을 수용하실 의사가 있소?”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말을 수용하실 의사는 있소?”

“선택지는 없소. 무조건 따라야 하오.”

“그건 싫소.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나 잘못한 거 없소.”

“그러면 파국이오.”

“약조하리다. 파국은 포은 선생이 아니라 내 손에서 시작할 것이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건 성미와 맞지 않소.”

“그러나 이 사람을 기다렸지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어찌 이리도 당당할까?

‘신우’ 사건의 증인이 나왔는데 말이다.

둘 중 하나다. 정말 찬탈할 생각이므로 어떤 정세가 펼쳐져도 개의치 않거나, 단지 책략에 불과했다는 거다. 하지만, 후자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신하로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에 손을 댄 것이니까.

“이 사람은 죽으나 사나 고려의 신하요.”

“나는 죽으나 사나 고려의 왕족이외다.”

“덮겠소.”

“고맙구려.”

“대신 이성계 장군의 일도 덮으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어차피 이성계 장군의 일은 법도로 벌할 수 없소. 중앙군에 합류하기 싫어서 안 한 거고, 자신의 영지를 지키러 나간 거요.”

“정치적으로 타격을 줄 수는 있소. 민심도 잃을 거고. 명성도 작살 날 거고.”

“대동군도 마찬가지요. ‘신우’ 사건의 배후라는 명확한 증인이 있다면 정치적 위상이 많이 실추될 것이외다. 그간 대동군이 가장 앞세운 것은 왕실의 위엄이었으니까.”

“그렇긴 하오. 그런데 괜찮소.”

“아. 만일 진정으로 찬탈할 생각이었다면 상관없을 수도 있겠구려.”

이것 봐라?

아주 훅 들어오는걸?

왕선은 싱긋 웃었다.

“타협하자?”

“타협이 아니라 중재하는 거요.”

“중재가 아니라 거래겠지.”

“무슨 말이오?”

왕선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입꼬리는 희한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내뱉듯 말했다.

“수문하시중.”

느닷없는 말이다.

그런데 정몽주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답했다.

“이 사람이 해야겠소.”

“그 자리는 최영 대감이 있는데?”

“문하시중에 올리시면 될 것이외다.”

구 도당의 최고 관직은 문하시중이다. 그러나 실권은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실질적인 권한은 내정을 총괄하는 수문하시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권신은 대부분 수문하시중이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영의정이지만 좌의정이 실권을 쥔 것과 비슷했다. 해서, 조선 시대의 권신도 대부분 좌의정이었다.

“이거 놀랍구려. 포은 정몽주가 이 문제로 야합을 하려 하다니. 백로가 까마귀들이 더럽게 노니는 진흙탕에 뛰어든 꼴이 아니겠소?”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감축드리오. 수문하시중 정몽주 대감.”

“이 나라 고려의 조정에서 까마귀는 모두 없어질 것이외다.”

“지켜보지요. 그 희고 고운 깃털이 어떤 색으로 변할지.”

“얼마든지.”

“아.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조건?”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생각 좀 해보겠소.”

정몽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이오?”

“덮는 문제부터 수문하시중까지. 생각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소? 이 사람도 정치판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데 주판 두들겨볼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외다.”

“그게 아니라 새로운 판을 짜려는 거겠지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시간. 얼마나 필요하오.”

“음. 넉넉하게 20일 만 주시오.”

“하루도 넘기지 마시오.”

“물론이외다.”

“오늘 우리의 대화는 20일 후에 공개하겠소.”

“당연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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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관심법을 좀 사용했소이다. 거래하러 온 걸 처음부터 알고 있으니 아무 말이나 던져댄 거요.”

...이런 상황에서 농이 나오다니.

정도전은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소생 심장이 쫄깃해져서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면 더 자주 할 거요.”

정도전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파국은 피했소만?”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 할 일은 해야 했다. 20일 동안.

시간은 충분하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니까.

“군사. 시작하시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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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계는 복잡한 눈으로 남은을 쳐다봤다.

“장군. 오늘 답변해주시지 않으면 소생도 더는 어쩔 수 없습니다.”

“대사헌.”

“어쩌실 겁니까.”

“하아.”

무거운 한숨. 머뭇거림이 가득하다.

남은의 눈에는 실망감 생겼다.

“답변은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하겠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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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울 정도로 성장하는 전주 지역의 서원을 꼼꼼하게 검토하던 이문정은 막 당도한 서찰을 펼쳤다.

한참 들여다봤다.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 121화 백로와 까마귀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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