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오리무중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마.”
“이번에 재상들을 제대로 혼쭐 내주라고 했네.”
명덕태후는 노기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렸다.
최영이 독대를 하고 물러났다길래 사정을 알아보고, 상소하면서 설쳐대는 무리를 쓸어버릴 청을 하러 왔는데 저러고 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 사람이 그래도 그동안 수시중 최영만은 믿었네.”
“마마.”
“이인임과 동반자일 때도 그만은 왕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세. 그런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아주 잘못 봤네.”
왕선은 어설프게 나서지 않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오랜만에 찾아와서 신우 사건을 들먹이며 자네와 엮더군. 그래. 이건 이해할 수 있네. 그러면서 이성계를 풀어주라더군. 하. 나와 거래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고작 사대부 몇 명의 상소를 꺼내서 나를 겁박한 게 아니면 뭔가.”
그랬다. 최영이 명덕태후의 자존감을 건드린 거다.
오랜 세월 쥐죽은 듯 살아왔던 그녀다.
이제야 왕실의 위엄이 소생하고 있다.
이제야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하고 있다.
이제야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짓고 있는 명덕태후다.
그런데 최영의 행동은 그녀에게 과거의 좋지 않았던 기억을 끌어낸 것이다.
이래서 최영의 독대가 빨리 끝난 거다.
명덕태후가 대로하여 내쳤을 거다.
최영이 아주 제대로 도와준 셈이다.
사실 명덕태후가 왕선을 신뢰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태도였다.
왕족이기도 했으나 철저하게 허리를 숙이고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왕선의 태도야말로 그녀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왕선은 속으로 웃었다. 물론 겉모습은 아주 진중하기 이를 데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는 건 어깨를 나란히 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수렴청정을 하시는 마마께 그리했다? 이인임과 다를 것 없는 작태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해서, 물어보겠네. ‘신우’ 사건. 자네와 무관한가?”
...이거 왜 이러실까.
딱 깨 놓고 ‘신우’ 사건과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거다.
문제는 증거와 증인이었고.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자네가 용상에 뜻이 있다는 말.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지. 내가 나서면 찬탈이 아니라 양위의 형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이 분 또 큰일 날 소리 한다.
하지만
-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이 동하건만.
왕선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명덕태후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를 끌어내는 방법을 도출하려는 것이다.
해서,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마마의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연 명덕태후의 표정이 무척이나 온화해졌다.
“이 사람이 자네를 물심양면 돕겠네.”
“감사합니다. 태후마마.”
“저 무도한 무리가 다시는 떠들지 못하도록 하게.”
“왕실의 위엄이 싹틀 수 있게 하겠습니다.”
다른 신하가 하면 권신이 된다. 그러나 왕선이 하면 왕실의 권위가 올라간다.
이 또한 명덕태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바로 그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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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지금 뭐라고 했나? 증인이 대동군에게 있다고?”
“소생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최영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습니다. 대동군이 너무 조용합니다.”
“어찌하면 좋겠나.”
“어차피 제공한 빌미입니다. 이대로 강수를 던져야 합니다.”
“강수? 하지만, 대다수 사대부는 포은 정몽주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네. 목은 선생의 힘으로 동원한 사대부는 소수에 불과해. 지금 보고 있지 않나.”
“모든 재상이 승부수를 띄워야 합니다.”
“그 말은?”
“사직 상소를 올리십시오.”
“하륜!”
대경한 최영.
그러나 하륜은 단호했다.
“대감. 대동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상대적으로 안정된 작금의 군웅할거가 과거로 회귀하는 겁니다.”
“음. 그렇긴 하지만 그걸 빌미로 더 공세를 취할 수도 있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대동군이 머뭇거릴 때 선수를 쳐야 합니다.”
“알겠네. 내가 재상들을 설득하지. 어렵지 않을 것이야.”
“대, 대감!”
최영의 부관 임정유의 다급한 목소리.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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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태후의 재가를 얻어낸 왕선은 전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상소를 올린 사대부를 모조리 잡아 오시오.”
나세는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짧게 답했다.
“예.”
“···나세 장군.”
“예.”
“십리가 탈출했소.”
“!!!”
“반드시 우리가 찾아낼 것이외다. 그러니 맡은 임무에 충실하시오.”
나세는 핏발선 눈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고, 모든 걸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목은 이색이 주도하던 상소는 순식간에 몰수됐다.
연관된 사대부는 모조리 잡혀 들어왔다.
“대동군!”
“아. 목은 선생.”
“사대부의 상소를 이렇게 탄압하는 법도는 없소!”
“법도라. 이거 우습군요.”
“뭐요?”
“그 참혹한 이름을 다시 꺼내면서 법도를 운운하다니.”
“그, 그건···.”
“이 사람은 확신하오. 이번 상소가 조민수와 지용기라는 역도와 관련 있다는 걸.”
“어, 억지요!”
“그건 국문해보면 알겠지요.”
구, 국문이라니!
이색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나세 장군.”
“예.”
“목은 선생은 상소를 올리지 않았소?”
“주모자로 알려져 있긴 한데 목은 선생의 상소는 없었습니다.”
왕선은 무릎을 '탁' 치면서 이색을 쳐다봤다.
“과연 탁월한 처세이시오. 대단하오. 배워야겠소.”
한껏 조롱해줬다.
“과연 고려의 유종이시오. 하하하”
이색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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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은 틈도 주지 않고 시작됐다.
놀라울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십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네. 그런데 찾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남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공의 언질이 아니었다면 하륜에게 잡혀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남은.”
“소, 송구합니다. 주공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개경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십리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도주했다면 이곳으로 왔을 겁니다.”
“···상태가 멀쩡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군.”
“고문의 후유증 등으로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시체라도 찾아내시오. 그래야 하오.”
“그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때 정도전이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어둡다.
“포은 선생은 어떻소?”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입니다.”
“하륜과 접선했을 건데?”
“예. 솔직하게 말하긴 했습니다.”
“솔직하게?”
“예. 갔더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륜을 크게 야단쳤다는군요.”
“확실하게 말 하시오.”
“포은은 이 상황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백로가 볼 때 까마귀들의 싸움이니까요.”
“음. 이성계의 사가는?”
“이옥 장군과 마 대장이 철저하게 감시 중입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오갈 수 없습니다.”
정도전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이 진흙탕을 정리해야 합니다.”
“적의 움직임을 예상해보시오.”
“주공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릴 겁니다.”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
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군웅할거의 회귀?”
“예. 집단으로 사직 상소를 던질 겁니다.”
“골치 아프겠군.”
“상소를 정리하면서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멈칫할 겁니다. 우리의 의지를 알렸으니까요.”
“됐군. 멈칫하고 우왕좌왕할 때 다시 타격하면 지리멸렬하겠군.”
“예.”
“방법은?”
“상소를 올린 사대부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효시하십시오.”
강수였다.
이인임도 하지 않았던 극단적인 공격이었다.
“좋소.”
덧붙였다.
“그림을 그릴 화공은 누가 좋겠소?”
“윤소종입니다.”
“오. 설득했소?”
“물론입니다. 사정이 급박해서 주공께 인사를 올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윤소종이라면 충분하다.
그는 앞을 보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니까.
“다음은?”
“반대하는 인사도 죽이는 겁니다.”
“나쁘지 않군.”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다.
“명분은?”
“기군망상이지요.”
“화룡점정은 누가 좋겠소?”
“가장 좋은 건 강안전입니다. 기군망상이니까요. 그런데 어려우니 태후전이 나서야지요.”
“아. 아니외다. 강안전으로 준비하시오.”
“예?”
“내가 강안전을 움직일 것이니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해야지.”
“확실하게 하십시오.”
“뭐요?”
“험험. 잘못하면 제 발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그러면 공세의 주도권을 빼앗깁니다.”
“걱정하지 말고 도화지나 잘 준비하시오. 화공들이 만족할 수준의 최상품으로.”
덧붙였다.
“끝으로 십리를 무조건 데려오시오. 살려서.”
이것이야말로 지금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죽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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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정몽주는 돌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직 한곳만을 또렷이 쳐다볼 뿐이었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몽주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으...”
정몽주의 눈썹이 살짝 씰룩였다.
그랬다. 정몽주 앞에는 웬 남자가 상처를 입은 채로 누워있었다.
잠시의 시간의 더 지났다.
“으...”
다시 소리가 났다.
정몽주의 입이 열렸다.
“일어났으면 눈뜨게.”
“······.”
“반쯤 죽어가던 자네를 구한 사람일세. 의식이 끊어질 때 나를 봤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누워있던 남자가 어물쩍 일어났다.
“소인이 의식을 차린 걸 아셨습니까.”
“숨소리의 규칙이 언제부터 바뀌더군.”
“소, 송구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늦은 밤. 크게 다쳤지. 충분히 경계할 만하지.”
“구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눈앞에서 기절하는 사람을 뿌리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네.”
일전에 하륜을 만나고 돌아가던 정몽주가 길가에서 구한 사람.
바로 십리였다.
십리는 눈치를 살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모를 수가 없다.
...포은 정몽주.
머릿속이 복잡했다.
포은 정몽주가 우호적이라고 들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만일 이성계나 하륜에게 잡혔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그간의 일을 모두 보고해야 한다.
“하면,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아. 그러게.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정몽주는 몸을 조금 내밀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십리는 움찔했다.
...아무리 포은 정몽주가 우호적이라도 말해줄 수 없다.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오리라고 합니다.”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주친 정몽주의 눈빛.
십리는 오금이 저렸다.
백면서생에서 나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서슬 퍼런 살기.
한겨울의 바람보다 차가운 기세.
그 검은 눈동자가 온몸을 잡아먹을 것만 같다.
존재만으로 사지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자네 이름을 물었네.”
그 어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어조.
그런데 무미건조함은 겉을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 안에 담겨있는 무저갱의 깊이.
그것은 온몸을 바싹 말라 틀어버릴 정도로 사납고 광포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십리는 느꼈다.
...이 사람은 평소 알던 그 포은 정몽주가 아니라는 걸.
“이름.”
십리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고
“시, 십리라고 합니다.”
그 순간 정몽주는 온화하게 웃었다.
...십리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 120화 오리무중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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