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십리무중 >
“경고하겠소이다. 한걸음이라도 움직이면 이 화살이 날아갈 것이외다.”
이성계는 싸늘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나세는 언월도를 휘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 해보시구려.”
“내가 쏘지 못할 것 같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이외다.”
“내가 그 화살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 같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 인생의 가장 큰 실수라오.”
차가운 밤공기는 살을 찢을 만큼 싸늘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묵직하게 내려서 이성계의 사가에 잠식했다.
여기에 이성계와 나세의 대치까지 더해지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 압박감이 치솟았다.
나세의 언월도가 이성계를 가리켰고, 이성계의 활시위는 팽팽하게 힘을 받은 상태였다.
언제 언월도가 휘둘러지고 활시위가 철렁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언월도나 활시위 둘 중 하나라도 움직이는 순간은 이성계의 사가는 피로 점철되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성계와 나세의 대치의 승자가 누구라고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을 걷어낸다면 흘러내릴 피의 주인공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이성계의 뒤를 지키고 있는 이는 소수의 당여와 하인에 불과했으나 나세의 뒤를 따르는 병력은 수백 명이다. 결과는 불 보듯 훤했다.
단지, 이성계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확연하게 기울어진 이 대치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세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도전의 다급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최대한 빠르게 이성계 사가에서 십리를 꺼내야 하오. 귀신도 모르게. 나세 장군만 믿소.]
...유혈사태가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
반드시 뚫어야 한다.
이성계의 귀에 나세의 나지막한 한숨이 들렸다.
그 한숨에는 백 가지 감정이 담겼다.
이성계의 감각이 꿈틀 이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치고 들어온다?
바로 그 순간 이성계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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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태후의 재가가 내려진 즉시 나세에게 달려가서 명령을 내린 정도전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괜찮소?”
왕선이다.
정도전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죽을 지경입니다.”
“어쨌거나 눈치 하나는 귀신이오. 곧장 달려서 나세 장군에게 말을 전하다니.”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재상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전에 일을 처리해야지요.”
“잘했소. 한데, 이성계가 반항하면 어찌 되오?”
“그건 가장 좋은 수지요. 선인전 정국인데 어명을 거역한다? 죽자는 거니까요.”
“그러다가 유혈사태가 발생하면?”
“나세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이성계를 이길 수 있을까?”
정도전이 잠시 생각하더니 쓰게 웃었다.
“수적 우위를 믿어야지요.”
“뭐. 그래도 이성계가 미치지 않은 이상 덤벼들지는 않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고생했소. 군사가 아니었으면 일이 틀어졌을 것이오.”
정도전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소생이 한 건 나세 장군에게 일을 전한 것뿐입니다.”
...아. 정도전은 관심법 모르지?
이거 말실수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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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아아앙!
화살은 엄청난 파공음을 내면서 허공을 찢었다.
그 즉시 나세가 몸을 틀면서 언월도를 휘둘렀으나
-퍼어어어어어어억!
화살은 언월도를 튕겨내는 위력을 보였다.
나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성계가 봐주지 않았다면 어깨가 관통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담하지. 다 죽는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는다.”
이성계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보였다.
“오라.”
나세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의 한수로 놀랐을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크게 외쳤다.
“그 목숨. 내가 거둬주지.”
그리고 한걸음 내디뎠다.
“죄인 이성계의 사가를 점령한다.”
드디어 나세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그러시오.”
이성계의 짤막한 대답.
나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하시오? 어서 수색하시오.”
...갑자기?
그 순간 나세의 뇌리로 스치는 게 있다.
설마?!
그리고 이성계가 지척에 다가오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 이 사람에게 목숨값을 빚진 것이오. 잊지 마시오.”
나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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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몸을 크게 휘청였다.
“주, 주공.”
나세가 황급히 잡았으나 왕선은 차갑게 뿌리쳤다.
그리고 죽일 듯 노려봤다.
“나세!”
“죽여주십시오.”
“하. 죽여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으면 그리했을 것이다.”
왕선의 노여움은 하늘을 찔렀다.
“수백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이성계와 기 싸움하다가 십리를 빼돌리는 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가!”
“죽여주십시오.”
“하.”
분위기는 참담했다.
정도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꽉 눌렀다.
“혹시 꼬리라도 잡은 게 없소?”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아무런 단서도 파악하지 못했소.”
“······.”
정도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렇게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주공.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찾아야 합니다.”
“개경을 들쑤시자?”
“어차피 이판사판입니다. 이보다 더 안 좋아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은밀하게 움직인 건 정몽주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정몽주가 십리를 대면하게 될 것이라면?
무조건 그걸 막는 게 우선이다.
왕선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반드시 찾으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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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가?”
“이제 다 왔습니다. 사형.”
하륜은 방긋거렸다.
일찍이 이성계에게 만일 변고가 생기면 반드시 십리를 빼돌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과연 이성계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정몽주는 방긋거리는 하륜을 쳐다봤다.
“나를 이 외진 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유는 아마도 일전에 말한 증인과 관련된 것일 거고.”
“예. 맞습니다.”
“자백했나?”
“예.”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고문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상태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걸.”
“그건 이 사람이 판단하지.”
“응당 그리하셔야지요.”
자신감이 넘치는 하륜.
정몽주는 무표정하게 증인을 기다렸다.
그리고
“뭐, 뭐라? 도주했다고?”
“소, 송구합니다. 선생.”
하륜은 격분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대체 일을 어찌 처리하면 그놈이 도망을 쳐!”
“그, 그놈이 배탈이 났다고 하길래.”
“허.”
“평소 협조적이었던 십리였습니다. 도주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당장 잡아 와!”
“됐네.”
하륜의 격분을 뚫고 들어온 나지막한 목소리.
“사, 사형.”
“됐다고 했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 자네 지금 나와 농이라고 하고 싶은 건가?”
“사형.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그러면 잡고 다시 찾아오게.”
“사, 사형.”
“잊었나? 이 포은 정몽주가 가장 싫어하는 게 협잡이라는 걸. 지금 자네는 내 면전에서 수작을 부렸어.”
정몽주는 불쾌함을 보이면서 등을 돌렸다.
하륜은 매서운 눈으로 수하들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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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침통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도 고약하게 꼬였는지. 정말 말 그대로
“미쳐버리겠군.”
“···주공. 이 상황에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그러면 하지 마시오.”
“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혹시 예성강에 배 띄웠으니 타고 전주 가라는 말이면 집어치우시오.”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중요하오? 지금 내가 배에 올라타는 순간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허사가 되는 거요.”
정도전은 입술을 깨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용상에 오르십시오.”
“장난하지 마시오.”
“진심입니다.”
“나도 진심이오.”
“주공. 어차피 찬탈자로 몰리게 됩니다.”
“아직 아니오.”
“그렇게 될 겁니다.”
“버틸 수 있소.”
“예.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어질 겁니다.”
정도전은 작심한 듯 말했다.
“어차피 금상은 틀렸습니다.”
“왕은 틀려먹어도 상관없소. 그래서 우리가 재상 총재제를 하려는 거고.”
“포은은 소생이 설득하겠습니다.”
“소가 말을 하는 게 빠를 거요. 포은 선생은 절대 설득하지 못하오.”
“고려의 사직. 이것만 이어간다면 포은도 동의할 겁니다.”
“누군가가 역성을 꾀하려고 한다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중과부적의 형세라면 포은 선생이 그 정도는 동의할 거요. 그러나 작금의 상황이 그렇소?”
“······.”
“잠시 후 펼쳐질 최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이나 마련합시다.”
“방책의 정의가 뭡니까. 상대와 싸우는 거라면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나 포은이 입을 다물게 하는 거라면 불가능합니다.”
“조금 전에는 설득할 수 있다고 했소만?”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찬탈로서 고려를 개혁하겠다는 것과 찬탈을 부정하는 건 완전히 다릅니다. 보세요. 조민수와 지용기를 무고죄로 몰아서 죽였습니다. 이것만 들춰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면 싸워야지. 별수 없소.”
“주공!”
남은이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
왕선과 정도전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소가 시작됐습니다.”
두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상황이 묘합니다.”
...묘하다고?
“자세히 말하게.”
“포은 선생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목은 선생을 필두로 사대부들이 상소를 올리고 있으나 소수입니다. 최영 대감은 태후전에 들렀으나 금방 나왔습니다.”
정말 묘했다.
...화력이 너무 약하지 않은가. 심지어 연좌도 없이 상소만 올린다고?
무엇보다 포은 정몽주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공.”
정도전은 황급히 끼어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합니다.”
“내 생각도 같소.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파악해봐야 합니다. 소생이 포은을 만나보겠습니다.”
“아. 그러지 마시오.”
“예?”
“이 또한 적의 계책일 수도 있소. 우리가 방심할 때 일격으로 끝내려고 덤빌 수도 있소.”
“하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거. 내가 선인전에서 군사와 눈이 마주쳤지 않소?”
“예? 예.”
“딱 보고 이성계 사가에 십리가 있다는 걸 알았소.”
“예?”
“허. 잊었소? 나 미륵이오.”
“예.”
정도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와중에 농을 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싱긋 웃었다.
“직접 알아오리다.”
왕선은 기대를 품고 일어났다.
...잘하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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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성큼성큼 걸어서 본궐을 돌아봤다.
“하하하. 걸음걸이가 영 불안해 보입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신이 난 목소리.
돌아볼 필요도 없다. 하륜이니까.
왕선은 무시하듯 걸음을 그대로 옮겼는데, 하륜이 뒤따랐다.
“오늘 상소에서 대동군이 참으로 많이 거론됐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백기 드시지요? 그러면 이쪽도 적당하게 끝내겠습니다.”
“왜?”
“예?”
“그냥 끝내면 될 건데?”
“이거 그랬다가 대동군이 칼춤이라도 추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왕선은 숨을 크게 쉬었다.
바로 확인하려고 했으나 떨려서 시간을 좀 끌었다.
그런데 하륜의 어조에서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고개를 돌렸다.
하륜과 눈이 마주쳤다.
-십리가 대동군의 손에 들어갔다면 곧장 이성계 장군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건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왕선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선수를 취하여 이성계 장군을 구하는 게 옳다.
...십리가 사라졌다?
왕선의 손에 힘이 실렸다.
이러면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쪽이 우위에 서는 것이다.
아직 봄은 끝나지 않았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데 너무 무리하는군.”
“하하하. 그렇게 보입니까?”
“십리. 무사히 돌아왔네.”
하륜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왕선은 비릿하게 웃었다.
“모조리 무고죄를 벌해주지.”
오른손 검지로 하륜을 가리켰다.
“우선 자네부터.”
덧붙였다.
“기대하게.”
< 119화 십리무중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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