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18화 (118/187)

< 118화 물맛이 아주 좋더이다 >

왕선은 고개를 조아리며 간곡하게 청했다.

“마마.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이 사람은 대동군을 믿네. 하지만 재상들을 지나치게 압박한다면 탈이 날까 두렵네.”

정치에서 말은 말이 아니다.

글자의 조합이고, 언어의 수식이며, 의지의 숨김이다.

...그러니까 지금 명덕태후는 자세한 사유를 말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왕선은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명덕태후를 설득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친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재상 중 누군가가 소인의 정보원을 구금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물론 관심법과 신우 사건을 제외하고.

그녀 역시 ‘신우’ 사건에 왕선이 개입했다는 걸 대충 알겠지만 분명한 사실이 되는 것과는 사정이 달랐다.

왕실의 위엄을 필생의 가치로 삼는 그녀로서는 ‘신우’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폭로된다면 어찌 나올지 가늠할 수 없다.

물론 그래서 반대로 이를 꺼내 들어 설득할 수는 있지만, 그러는 순간 명덕태후를 겁박하는 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마마. 소인의 정보원을 고문하여 일을 크게 만들 겁니다.”

“찾을 수 있겠는가?”

“해서, 선인전에 재상들을 집결시키는 겁니다. 그사이 소인의 당여들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명분은?”

“이성계 가택 연금입니다.”

“소집하게.”

“예.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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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소집된 선인전 회의.

재상들은 불편함을 굳이 숨기지 않고 왕선을 쏘아봤다.

명덕태후가 이를 주도하지 않았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대동군. 연유를 알 수 있겠나?”

수시중 최영이다.

도당이 해산된 이후 수시중이라는 관직은 집정 대신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했다.

단지 관리 중 가장 고위직에 불과한 관직이었다.

“글쎄요?”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아나?”

“허. 선인전입니다. 태후마마께서 아시겠지요.”

얼토당토않은 소리.

그러나 왕선이 말할 의지가 없다는 걸 알아낼 수 있었기에 최영은 더 힘을 빼지 않았다.

...그런데 정몽주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륜과 약조한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오늘 보자고 하다니. 설마 그의 말이 정말일까?

...오늘?

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음. 하륜이 내일부터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했는데. 왕선이 뭔가를 알고 수작을 부리는 걸까?

...최영도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다른 재상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지전능한 관심법의 무력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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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한참이나 왕선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의 안색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입궐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별이 없다.

...이거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게 분명하다. 십리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거다.

입술을 깨물었다.

“휴.”

물론, 손 놓고 왕선의 연락만을 기다린 건 아니다.

하륜에게도 사람을 붙였다.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정보가 올라왔다.

...움직이고 있단다. 정몽주의 사가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라고 했다.

아마도 정몽주를 직접 데려가서 십리를 대면하게 할 생각이 분명하다.

“주공께서는 어째서 아직 연락이 없으신가.”

답답했다.

포은 정몽주가 하륜과 함께 움직이는 걸 막고자 무리수를 던져서 최영의 사가를 덮치더라도 확신이 있어야 한다.

백 가지 명분을 꺼내서 덮쳤는데 십리가 없으면 낭패도 그런 낭패는 없다.

사상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될 건 불 보듯 뻔하다.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에 대비해서 예성강에 군선을 대기 시켰다.

...일이 더럽게 꼬이더라도 왕선만은 전주로 피해야 하니까.

“주공께서 연락을 취하셨습니다.”

밀교원의 보고.

정도전은 다급히 서찰을 펼쳤다.

“!!!”

...최영은 아니다?

그리고 재상들은 모두 무관하다고?

정도전의 손이 떨렸다.

하늘로 솟은 게 아니라면 이게 말이 되는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선인전 회의를 명분으로 정몽주를 붙잡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하륜은 정몽주가 입궐한 건 모른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 잡아둘 수는 없다.

“대체 십리를 어디에···.”

그 순간 정도전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우리에게 의심받지 않고 하륜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개경에서 가장 철저하게 감시되는 곳.”

바꿔말해서

“개경에서 가장 안전한 곳?”

눈을 부릅떴다.

등잔 밑이 어두워도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는가.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정도전은 황급히 움직였다. 미친 듯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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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멋쩍게 웃으면서 먼 산을 쳐다봤다.

“대동군. 태후마마는 언제 오시오?”

아직 명덕태후는 선인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십리의 소재를 파악한 다음 오지 않은 명덕태후를 데리러 가면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을 정도전에게는 비보만 전했을 뿐이다.

“그걸 왜 이 사람에 묻소?”

“대동군이 모르면 누가 아오?”

“이 사람 또한 소집령을 받고 왔소이다.”

“그걸 우리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박위 장군. 그 말은 태후마마께서 이 사람의 말을 듣고 국정을 운영하신다는 거요?”

“허.”

“그렇소? 기가 막히는군.”

맞긴 한데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박위는 우락부락해진 몰골로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왕선의 머릿속은 미친 듯이 돌아갔다.

...하륜을 덮칠까?

...아니다. 이 시국에 하륜을 대놓고 덮치면 정몽주에게 심증을 주는 거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포은 정몽주다. 이 정치적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대번에 파악할 거다.

그렇게 되면? 포은 정몽주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아 어렵다. 어려워. 설마하니 포은 정몽주 때문에 봄이 위기를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 웃기는 건 포은 정몽주는 자신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거다.

...답답했다.

“일단 강안전을 가보겠소이다.”

“···최영 대감. 강안전이라니요?”

“어쨌든 선인전이외다. 아무리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으나 주상께서도 참석하셔야 하오.”

“물론이지요.”

“이 사람이 주상을 모셔오리다.”

“음. 주상께서 선인전에서 제3자를 기다리는 법도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대동군이 태후마마를 모셔오시면 되지 않소이까.”

...이 사람. 최영 맞아?

언제 이렇게 정치력이 좋아졌을까?

지금 만약 군왕이 선인전에 들어오면 명덕태후가 안 오고 버틸 재간이 없다.

그러면 끝이다.

왕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선택할 방법은 하나다.

...협상한다. 이성계의 가택 연금을 명분으로 삼아서 협상한다.

그걸로 시간을 더 끌어내야 했다.

그동안 정도전이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

재상들은 무관하다는 걸 알렸으니 그라면 수를 쓸 것이다.

...일국을 창업한 인물이 아닌가.

그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수시중 대감.”

조금 전 본 최영의 정치적 수사도 믿기로 했다.

이 사람이 전과는 달리 제대로 정치에 입문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그러오.”

“가끔 대감의 사가에서 마셨던 물이 그립습니다.”

“무슨 말이오?”

“하하하. 거기 물맛이 참으로 좋지 않습니까.”

...이건 무슨 뜻일까? 갑자기 물맛이라니? 정말로 사가의 물이 먹고 싶다는 뜻은 아닐 건데.

최영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쳐다봤다.

“요즘도 그대로입니까?”

최영은 미세하게 웃음을 보였다.

“개경 제일의 물맛이오.”

...이거 정말 많이 발전했다.

옛날 같으면 대놓고 질러대면서 고함을 질렀을 건데.

왕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물을 마셔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

그것은 상대와 대화할 때 꼭 꺼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왕선이 협상의 의지를 내비치는 거다.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던 건 기선을 제압하려는 수작이었을 거고.

최영의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제대로 넘어오고 있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은 안도했다.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다른 데서는 못 구하오. 이 사람의 집에서만 구할 수 있소이다.”

“그렇습니까? 이거 대감께서 허락해주실지.”

“못할 건 없소.”

모든 재상의 시선이 집중됐다.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떤 정치적 함의가 있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반면, 정몽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두 사람이 이 시국에 협상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그냥 지켜만 봤다.

“밤에 마시는 물이 가장 좋소이다.”

지금 선인전을 파하고 나가자는 말이다.

최영이 압박의 강도를 올린 거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다. 지금 이러는 이유는 정몽주를 밖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서니까.

“그처럼 좋은 물을 우리끼리만 알면 되겠습니까. 태후마마께서도 아셔야지요.”

기어이 선인전에서 끝을 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자 최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렇게 하지요.”

“말 하시오.”

“포은 선생이 중재하고 대감과 이 사람이 논의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포은 선생?”

포은 정몽주는 이성계와 친분이 돈독하다.

최영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좋소.”

“태후마마께서 시간이 걸리시는 거 같으니 천천히 논의해보지요.”

“그러시오. 이 사람은 강안전을 다녀오겠소.”

“···대감.”

“도당은 이제 없소. 신하들끼리 무엇을 할 수 있소이까.”

“······.”

왕선의 말문이 막히자 최영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무슨 핑계로 막을 건가?”

...더는 막아설 방도가 없었다.

얼마후 명덕태후와 왕우가 선인전에 모습을 보였다.

어색함이 크게 감돌았다.

그리고 최영이 나섰다.

왕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동군과 대화를 조금 나눴사옵니다.”

그때 왕선의 눈에 헐떡이며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아주 낯익은 인사. 정도전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성계에 대한 처결을 논의한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정도전만 쳐다봤다.

정도전의 옷은 땀으로 뒤덮였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수하를 시키면 되겠으나 자신도 모르게 직접 달려온 것이다.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인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명덕태후와 군왕이 있지 않은가.

정도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다. 정도전은 선인전에 참여할 수 있는 품계가 아니었다. 남은에게 대사헌을 내린 것과는 달랐다. 이는 정도전의 행보를 최대한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였다.

제일 군사인 사람이 조정의 업무에 시달리게 되면 곤란한 법이니까.

정도전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금 선인전에 난입해서 말을 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

모든 재상이 여기 잡혀 있을 때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평생 쌓았던 방대한양의 지식이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그때 왕선과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라면?

그 순간 정도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냥 이렇게 하면 왕선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왠지 왕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정도전의 간절한 눈에 피식 웃는 왕선이 보였다.

그리고 선인전을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영 대감.”

“왜 그러시오.”

“새로운 물의 맛집을 찾았습니다.”

“뭐요?”

“그렇다는 겁니다.”

“허.”

“잊지 마십시오. 협상은 대감이 깬 겁니다.”

왕선은 빙그레 웃더니 용상을 향해서 예를 취하며 말했다.

“주상전하. 죄인 이성계의 사가에 그의 사병인 가별초의 일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사옵니다. 지금 당장 나세를 보내서 색출하는 게 옳사옵니다. 윤허하여주시옵소서.”

왕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윤허하노라.”

명덕태후가 허락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선의 화답.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정도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 118화 물맛이 아주 좋더이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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