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17화 (117/187)

< 117화 우리의 봄은 무척이나 짧았다 >

호바투의 대군을 격퇴한 전쟁 영웅의 귀환을 반기는 행사였다.

엄청난 열기로 달아오르던 바로 그 자리에 찬물을 아주 제대로 씌웠다.

장내의 공기는 차갑게 식었다.

대역죄가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다.

심지어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여 대승을 거둔 장수가 아닌가.

의기가 치솟는 구 도당의 의사들은 이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함을 따지고자 했다.

...그런데 이 불합리함의 원흉이 자리를 뜨고 있다.

이건 곤란했다.

명령을 내린 주체가 제 말만 하고 사라진다?

수하들은 명령을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결국,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고, 어떤 과정이 발생할지라도 일을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거다.

...과연, 왕선이 떠난 자리는 창을 고쳐잡은 마천목과 화살을 겨누고 있는 이옥이 지켰다. 그리고 남은이 강경한 어조로 외쳤다.

“이성계 장군. 개경에는 사병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발로 걸어가거나 오라를 받거나. 선택하십시오.”

이제 할 수 있는 건 파국을 향한 격분이거나 사태 수습을 위한 이성 회복이었다.

한편, 겉보기에는 느긋했으나 왕선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당장 정도전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아서 빠르게 걸어갈 수도 없다.

“대동군.”

아. 젠장. 빌어먹을.

어지간하면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하겠으나 그럴 수 없는 상대다.

“예. 최영 대감.”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아까 듣지 못하셨습니까? 어명입니다.”

“···협잡은 집어치우고.”

“이성계 장군이 협잡을 펼친 거지요.”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왕선은 미세하게 고개를 틀었다.

“대감께서도 의심했지 않습니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네.”

오. 최영에게 이런 모습을 볼 줄은 몰랐다.

이제 제법 정치적 대응을 하지 않은가.

불리한 내용이 나오면 말을 돌리는 정치적 화법 말이다.

“가택 구금 정도로 하지.”

“이 사람이 왜 그래야 합니까?”

“이성계의 가별초가 칼을 뽑으면 어쩔 건가.”

“그건 곤란하지요. 뭐. 알겠습니다. 그 정도로 하지요. 아. 가별초는 개경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리하지.”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지금 최영과 길게 말싸움할 상황이 아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하륜의 속내를 읽은 것이다.

-내일이면 포은 사형을 설득할 수 있다.

이를 악물었다.

그새 정도전의 사가에 도착했다.

“군사!”

정도전은 눈을 멀뚱히 뜨면서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이성계가 버팁니까?”

“가택 구금으로 합의했소.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외다.”

“허. 가택 구금이라니요? 왜 그런 합의를 하셨습니까. 모든 증좌가 명확한데.”

“시끄럽소.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시오. 밀교원 중 행방이 묘연한 이가 있소?”

“그럴 리가요.”

“대답하시오.”

왕선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정도전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없습니다.”

왕선은 이를 악물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면 남은이 보고를 하지 않았거나 하륜이 헛짓을 하는 거다.

최악의 가정이 더 있다.

...남은도 모르게 하륜이 밀교원을 끌고 갔을 경우다.

“하륜이 밀교원 한 명을 잡아갔소.”

정도전은 격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큰일이다. 이거 일이 너무 복잡해진 거다.

이런 상황이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가 잡혀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원부터 파악해야 한다.

“지금 당장 모두 집결시키시오.”

“주공. 개경에 배치된 밀교원의 구멍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 듣지 못했소? 모두 집결시키시오. 확인해봐야겠소이다.”

정도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공. 만일 그랬다가 공백이 발생하면 어쩔 겁니까? 망국적인 도당의 정치를 끝장내고 선인전 정국을 구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데, 바로 결정적 시기에 이성계가 가별초를 이끌고 왔습니다. 상승 불패의 명장이 말입니다. 아주 도발적으로요.”

“가별초는 개경에서 내쳐질 것이외다.”

“예. 그런데 개경 지척에 주둔하고 있겠지요.”

“군사.”

“딱 깨 놓고 말씀드리지요. 지금 이성계와 개경에서 전면전을 펼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말씀드릴까요? 이성계와 대회전을 펼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고려에 없습니다. 최영 대감이요? 무리입니다. 이 나라 고려의 최고 무장은 최영 대감이 아니라 이성계 장군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주력군이 전주에 있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보세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이걸 이성계가 알고 대놓고 도발한 겁니다. 개경의 기울어진 군사 전력을 흔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륜인지, 조준인지 누군지 모르겠으나 어떤 책사 놈이 이 생각을 했을 거란 말입니다. 이 서릿발 같은 정국에서 별다른 증거도 없이 밀교의 공백을 자초한다고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절대로 찬성할 수 없습니다.”

“있소.”

“예?”

“포은 정몽주.”

“주공.”

“지금 하륜이 우리 밀교원의 자백을 받아서 포은 정몽주를 꾀어내려고 하고 있소.”

“···설마 포은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관심법이라고 할 수도 없고 해도 안 믿을 거니까.

왕선은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만일 신우 사건이 우리 짓이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서슬 퍼렇게 엄포를 놓더이다.”

정도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정국에서 포은이 적의 편에 선다? 상황이 참으로 아름답게 흘러가겠군요.”

“장담하리다. 이성계의 옷깃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거요.”

“겨우 그 정도로 그러십니까. 선인전 체제가 와해될 수도 있습니다.”

“음. 그 정도는 아니오.”

“주공은 포은의 진면목을 모릅니다.”

“응? 이인임 집권기에는 당하기만 하던데? 나 이인임보다 강하오.”

“주공이 이인임보다 강하다는 걸 증명하려면 이성계를 이겨야지요. 이인임은 고려의 모든 세력과 싸운 작자입니다. 그것도 주공처럼 아슬아슬하게 이긴 게 아니라 세 치 혀로 편안하게 이겼습니다.”

“이보시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인임은 단지 권신에 불과했지요. 해서, 포은은 싸울 때도 정도만 구현한 겁니다. 즉 점잖게 옳은 말만 떠들어 댄 겁니다. 그러니 이인임에게 당한 거지요.”

“응? 그게 무슨 말이오?”

“신우 사건이 우리 짓이라면? 주공께서는 찬탈을 꾀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찬탈자와 싸우는데 포은이 아름답고 위대하게 정도를 따를 거라는 착각은 버리십시오. 그는 고려 사직을 위해서라면 백번이라도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궁금하면 한번 보세요.”

“안 보고 싶군.”

“밀교원. 다 집결시키겠습니다.”

“당장.”

정도전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봄이 무척이나 짧았군요.”

“원래 봄은 느끼지도 못할 때 지나가는 법이라오.”

“뭐. 괜찮습니다. 소생은 원래 봄 안 좋아합니다. 잠만 오고.”

“나 또한 그렇소.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이 좋소.”

-----

하륜은 매섭게 노려봤다.

평소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다시 묻지. 배후가 누구지?”

“대동군 대감입니다.”

“그러니까 왕선이 시킨 거다?”

“예.”

여기까지는 쉬웠다.

그런데 마지막 한 가지가 열리지 않았다.

“왜?”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아니지. 알고 있을 거야. 찬탈을 꾀한 거지. 안 그런가?”

“정말 모릅니다.”

“모르긴.”

“소인이 아는 건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저, 정말입니다. 아는 대로 다 말씀드렸습니다.”

하륜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 그러면 찬탈을 생각할 때까지 고생 좀 하게나.”

“서, 선생. 하륜 선생.”

하륜은 더 말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밀교원이 찬탈까지 토설했으면 좋았겠으나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정몽주에게 보이는 게 좋다. 동이 트기 전까지만 더 추궁한 다음에 정몽주에게 보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신우’ 사건의 자초지종만 알리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왕좌 지재 포은 정몽주는 알아서 분연히 일어날 것이다. 이성계를 자유롭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륜은 삼봉 정도전이나 사부인 목은 이색보다 그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했다.

왜? 처 백부 광평군 이인임 집권 시절 그와 자웅을 겨룬 건 바로 자신이니까.

그러니까 정몽주의 진면목을 아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왕선이 만끽하는 봄이 끝나고 무더위와 장맛비를 내릴 시기가 단 하루 남았다고 장담했다.

바로 포은 정몽주의 손에서 그건 시작될 것이다.

“하륜 선생. 다시 서찰이 왔습니다.”

“음.”

서찰을 받아든 하륜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졌다.

...대체 이 표식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처음 밀교원을 잡았을 때 그의 거처에서 봤던 표식이었다.

한참 동안 그것들을 살폈다.

그러다가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딱 한 장에만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랜 세월 중앙 정계에서 정략을 펼쳤던 그의 오감이 신호를 보냈다.

...이 한 장은 사태의 엄중함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머지는?

일상적인 서찰을 주고받을 때 사용한 것 일 테고.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었다.

밀교원을 잡아낸 후 그에게 서찰을 전달하는 방법을 추궁한 것이다.

그는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방법도 간단했다.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고 했다.

결국, 하륜은 여기서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조금이라도 일이 지체되었다면 밀교원은 더 복잡한 표식을 다양하게 남겼을 거다. 그러면 절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륜은 말없이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단 한 장의 서찰.

[적발]

그리고 나머지 서찰의 표식.

[이상 무]

...대체 무슨 뜻일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

정도전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누가 없는 거지?”

“일전에 직접 기름을 사용했던 십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흔적은?”

“···그게 이상합니다.”

“무슨 말이지?”

“계속 연락이 왔습니다.”

“밀교원의 연락은 오직 미륵의 글자로만 사용한다.”

“예. 당연합니다.”

밀교원들은 주섬주섬 서찰을 꺼냈다.

미륵의 글자가 적힌 서찰이다.

[이상 무]

헛웃음을 지었다.

“거처에 들켰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의 임무는?”

“하륜을 감시하는 겁니다.”

“휴. 빌어먹을.”

정도전은 사태가 짐작됐다.

...아무래도 하륜이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군사. 밀교원의 지침이 무엇인지 기억하시오?”

“만일 발각되면 아는 대로 토설하라. 반드시 구한다.”

“···그렇소.”

“십리는 지침대로 모든 내용을 토설했을 겁니다.”

“하륜을 그걸 들고 포은 선생을 만날 거고.”

“최악이군요.”

“당장 구해야 하오.”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장 가능성 큰 곳은?”

“최영 대감의 사가입니다.”

“빌어먹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주공. 침착해야 합니다. 막무가내로 최영 대감의 사가를 수색할 수는 없습니다. 도당 해산과 이성계의 가택 연금으로 재상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자극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됩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외다. 만일 병사를 이끌고 가서 십리를 구하더라도 그건 더 큰 문제로 비약될 것이오. 신우 사건의 비밀이 폭로될 거니까.”

“···예. 진퇴양난입니다. 결국, 아무도 모르게 십리를 빼 와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최영 대감의 사가가 맞는지부터 알아야겠지.”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알아서 하리다. 군사는 대기하시오.”

정도전은 저 멀리 저무는 석양을 쳐다봤다.

“혹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오. 하지만 빨리 움직여야 하오.”

“동이 틀 때까지 처리해야겠군요. 그러지 못하면 포은은 재상 총재제의 동지가 아니라 사상 최대의 정적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건 곤란하다. 포은은 적대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덤벼들 거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를 파악하고 포은을 잡아두겠소. 하륜을 만나지 못하게.”

“어찌하시려고요.”

“역시 방법이 있소.”

정도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주공. 만일 실패하면.”

“둘 중 하나지. 여기서 불타오르거나 전주로 가거나.”

“전 선생에게 서찰을 보내놓겠습니다.”

“그러시오. 전주에서 군웅할거의 대미를 장식할 수도 있으니까.”

< 117화 우리의 봄은 무척이나 짧았다 > 끝

ⓒ 날아오르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