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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16화 (116/187)

< 116화 왕선은 멈추지 않는다 >

승리가 찾아왔다.

이것은 완전한 승리였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군웅 연합은 항복하고 전주의 처우에 전적으로 세력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그랬다. 군웅할거라는 사상 초유의 난세가 펼쳐지는 동안 군웅들은 세력의 확대에만 고심했다. 더 비옥한 토지, 더 많은 사병, 더 많은 지주의 지지 그리고 넓은 땅. 바로 여기에 집중했다.

최영이 그랬고, 박위가 그랬으며, 정지도 그랬다.

이는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아주 지극히 정상적인 행보였다.

그러니까 유력 군웅이 모두 같은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이 시대의 군웅할거에 대처하는 방침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만일, 그들만의 군웅할거가 펼쳐졌다면 많은 사병과 많은 군량을 확보하고 군현 대지주의 협조를 얻은 군웅이 정국을 압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선이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개입하면서 고려의 군웅할거는 보편적인 궤를 벗어났다. 전주는 양적 팽창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충실했다. 진영 내의 농본정책을 최대치로 구현했고, 투자 정책으로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상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지주를 억압하면서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여 봉쇄령 정국에서도 강고한 단결을 도출했다.

이는 군웅 연합의 세력보다 약소하면서 작금의 승리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즉, 봉쇄령처럼 화살 없는 전쟁에서 풍요롭고 발전된 전주가 압도할 수 있었다.

승리의 과실은 참으로 달콤했다.

바로 지금처럼.

왕선의 사가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상당한 수의 인원이었는데도 참으로 조용했다. 그들은 한스럽게 하늘을 쳐다보거나 고개를 떨구고 땅만을 내려봤다. 멍하게 실소만 머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고려 정치의 심장부 도당을 좌지우지했던 재상들이었다.

그리고

“고려의 고귀한 귀족들께서 이 누추한 곳은 어찌 오셨습니까.”

조롱과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누구도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고 할까?

왕선은 그 자존심을 별로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음. 고귀한 혈통을 가지신 분들이니 근본 없는 이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는 않은가 봅니다?”

곧 이어질 말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축객령일 것이다.

“대동군.”

결국, 최영이 나섰다.

“그간의 갈등을 씻고자 찾아온 것이외다.”

“갈등이라.”

“언제까지 싸울 수만은 없지 않소이까.”

...그 모습이 참으로 씁쓸했다.

마당에 초라하게 선 채로 사정하는 최영과 위에서 오연하게 내려보는 왕선.

지금 이 순간 도당의 정점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시키는 장면이었다.

왕선은 팔을 휘저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될 때

“오늘 이 시간부터 모든 정사는.”

오른손 검지를 움직였다.

...그 방향의 향하는 곳은

“이 나라 고려의 최고 권위를 가진 제1 정전. 선인전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선인전에서 정사를 본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도당을 해산한다는 뜻이었다.

재상들의 표정이 처참할 정도로 썩었다.

“이의 있습니까?”

있을 리가 없다.

있어도 말할 수 없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수치스러워도 지금은 왕선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

힘의 강약이 명확하게 증명됐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봉쇄령의 강풍이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니까.

...이 순간 모든 재상은 와신상담을 되새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맑게 웃었다.

“이동하시지요. 태후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단호하게 마무리했다.

“지금 당장.”

바야흐로 고려 왕실의 위엄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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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는 위압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멈추시오. 어디로 가시오?”

“···나세 장군.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사람은 본궐을 드나드는 모든 인원을 관리해야 하오.”

“우리는 도당의 재상들이외다. 어찌 길을 막는 것이오?”

“도당? 이 나라에 도당이 어디 있소이까.”

“나세 장군!”

“시끄럽소. 용무를 말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하오.”

“허.”

“계속 본궐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나세가 언월도를 내밀었다.

“더 말해야 하오?”

“이, 이보시오!”

“시끄럽소.”

나세는 요지부동이었다.

“나세 장군!”

“들어오시겠소?”

격분한 재상들의 일갈을 비웃으며 언월도를 휘둘러 대는 나세.

일촉측발의 상황이었다.

“선인전에 가는 길이네.”

최영이었다.

“이제 되었는가?”

이 싸움에서도 패배했다.

모두 침통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선인전에는 왜 가십니까.”

또다시 짓밟는 나세.

최영은 담담하게 답했다.

“···태후 마마께서 부르셨네. 이제 들어가도 되겠나?”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세가 종이를 내밀었다.

“사유를 적으시고 수결하십시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짓눌렀다.

공기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최영은 말없이 붓을 들었다.

“이제 되었는가?”

“들어가시지요. 대감.”

“···대동군이 이리 하라던가?”

“선인전 외에 다른 곳은 가실 수 없습니다.”

그 즉시 다섯 명의 병사가 나섰다.

“이들이 대감을 모실 겁니다.”

“······.”

최영은 이를 악물었으나 의연하게 이동했다.

나세가 언월도를 다시 휘두르며 말했다.

“정당한 사유 없이 본궐 앞에서 횡포를 부리면 모두 벌할 것이외다. 그런데 횡포라는 행위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는 모르겠구려.”

재상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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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빠르게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남은, 이옥, 나세, 마천목에게 재상의 자리를 내렸다.

불평불만이 새어 나왔으나 봉쇄령 정국의 여파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반대하는 인사는 없었다.

정국은 아주 어설프게 봉합됐다.

그건 언제라도 터질 듯 미약했으며 묶어둔 실은 약하게만 보였다.

“···나와 자네가 이렇게 만날 일은 없을 거 같네만?”

“그동안 수차례 만남을 청했으나 정국이 어지러워 성사가 어려웠지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 봉합됐습니다.”

이원계는 미간이 찌푸리며 남은을 쳐다봤다.

“봉합? 지금 이게 봉합이라고 생각하나?”

“최악은 피했으니까요.”

“그래도 재상에 올랐기에 만남을 거절하지는 않았네. 하지만 더는 대화를 이어가는 게 불편하군.”

“이제 앉았는데 벌써 축객령을 내리십니까.”

“앞으로 이렇게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음.”

“배웅은 하지 않겠네.”

다소 차가운 이원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남은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걸 보신다면 생각이 조금 바뀔 거 같습니다만?”

남은이 서찰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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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사형.”

“말하게.”

하륜은 옅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포은 정몽주와 나누는 대화의 결과가 우호적일 것이니까.

“사형. 대동군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자네도 그 말인가? 나는 대동군의 당여가 아닐세.”

“압니다. 하지만, 대동군의 행보에 우호적이지요.”

“나는 정도에 우호적인 걸세. 자네가 만약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면 정도를 걷게. 하면, 내 이름을 걸고 자네를 지원하겠네.”

“사형. 정국은 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로 미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분명한 입장을 취하셔야 합니다.”

“분명한 입장이라.”

“대동군의 말이 모두 틀린 건 아닙니다.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고려는 사안별로 입장을 취할 때가 아닙니다.”

“진영 논리가 중요하다?”

“예. 이 나라를 개혁하더라도 대동군의 방법은 틀렸습니다. 그는 개혁하는 게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부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나 역시 대동군의 방법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닐세.”

“예. 바로 보셨습니다. 이제 진영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아. 내 말을 오해했군.”

“예?”

“과격하거나 느리거나. 원 간섭기부터 지금까지 이토록 개혁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었나?”

“사형.”

“그처럼 과격한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네. 해서, 나는 대동군에게 우호적이라네.”

“그 모든 것이 찬탈을 위한 밑그림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정몽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륜. 말을 삼가게.”

“신우.”

“······.”

“진정으로 조민수와 지용기가 주도한 일이라고 보시지는 않을 겁니다.”

“대동군이 했다는 증거도 없네.”

“있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대동군의 획책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모른 척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재상 총재제.

그것이 정몽주의 심장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탈이 목적이라면 사정이 완벽하게 달라진다.

고려의 명운이 걸렸다면 기꺼이 용상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용상으로 다가가고자 엄중한 상황을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분쇄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정몽주는 무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말 돌리지 말게. 증거가 있다면 말하게.”

“정황을 보면...”

“물증을 말하게.”

“왕선의 정보원으로 보이는 인물이 바로 그 장소에 기름을 들이부었습니다.”

“······.”

“기름이 묻은 쌀은 바람에 날리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겠지요. 글자를 만들어서 말입니다.”

어차피 이걸 폭로해도 왕선에게 아무런 타격을 가할 수 없다.

...여전히 군웅할거는 유효한 정세가 아닌가.

처음 군웅들이 도당에 복귀했을 때 질서라고는 없었다. 지금에서야 왕선이라는 적과 싸운다고 단결했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면 어찌 돌변할지 모른다.

이때 어설프게 역적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려고 한다면 군웅 전체가 역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판은 순식간에 개판 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군웅들이 모조리 낙향하는 수가 있다. 그러니 자중해야 한다.

그러나 정몽주라는 충실한 인사는 다르다. 찬탈을 목적으로 한 군웅을 정몽주가 지지할 수는 없다. 정확한 사실을 인지시켜 준다면 확실하게 나설 것이다. 목숨을 걸고 왕선을 막아설 거다.

“그 정보원. 어디 있나.”

과연 반응이 있다.

그 어떤 군웅도 관심 없던 일에 이처럼 답하고 있다.

“소생이 확보하고 있습니다.”

“만나보지.”

“사형을 어찌 믿습니까.”

“나더러 함께 하자고 했네. 그러면 그걸 보여줘야 해.”

“아직 함께하지 않으셨지요. 지금처럼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신다면 만날 수 없습니다.

“하륜. 내가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한 적이 있었네. 잊었나?”

“어찌 있겠습니까. 소생의 처 백부께서 집권하던 시절 아닙니까.”

“국정 농단과 협잡이 판을 치던 시기였네. 그래서 싸웠네. 목숨을 걸고.”

“하지만 이기지 못하셨지요.”

“맞네. 매번 패했지. 한데 그거 아는가?”

“이르십시오.”

“패하면서 단단해졌고 강해졌다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나를 이용해서 대동군을 속이려 했던 일을 모를 거로 생각하나?”

...그걸 어찌 알았단 말인가.

하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셨군요.”

“그래서 자네 말을 쉽게 믿지 못한다네. 또 그래서 선뜻 자네와 손을 잡지 못하는 것이네. 나 정몽주에게 하륜이라는 사람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일세. 보신주의자이고. 기득권이지. 대체 뭘 보고 믿을 수 있겠나.”

하륜은 입맛을 다셨다.

갈수록 고되고 힘이 들었다.

...인생이 정말 꼬여도 더럽게 꼬여버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당연히 왕선이었다.

“좋습니다. 만나게 해드리지요.”

“지금 당장.”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직 고문하고 있나 보군.”

“지독하더군요. 토설하지 않더군요. 뭐. 쓸데없는 말은 많이 하지만.”

“그러면 증인이 아니지.”

“확실하게 하고자 합니다. 자백을 받아내면 보여드리겠습니다.”

“10일.”

“예. 알겠습니다. 그동안 사형께서도 고민을 정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말은 사실이니까요.”

“알겠네.”

“아. 내일 이성계 장군이 개경에 당도합니다.”

“알고 있네.”

“함께 가시겠습니까?”

“따로 가겠네.”

나오긴 나온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돈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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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가별초는 위용을 보이면서 개경에 들어섰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동북면을 지켜낸 장수의 귀환답게 많은 인파가 몰렸고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그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자작 사건 해결한다고 고생하셨소? 이성계 장군?”

방긋방긋 웃는 왕선.

불청객의 등장에 최영을 비롯한 재상과 백성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성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됐고. 어명을 전하겠소이다.”

“어명?”

“허, 어명을 전한다는 데 예를 갖추지 않는다? 과연 불순하군요. 뭐. 됐소. 이 사람이 그냥 전하겠소.”

이성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왕선이 내지르듯 외쳤다.

“대사헌 남은.”

“예.”

“죄인 이성계와 그 당여들을 모조리 압송하게.”

왕선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크게 외쳤다.

“죄목은 동북면 자작 사건?”

< 116화 왕선은 멈추지 않는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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