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패장들이 말이 많다 >
사방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화마의 실로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의지라도 가진 듯 철저하게 경계를 지키면서 타올랐다.
정지의 거점 순천, 박위의 거점 밀양, 최영의 거점 철원 등 군웅 연합의 핵심적인 군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니까 군웅들의 군량미가 일거에 불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화마가 사라진 곳에 새롭게 모습을 보인 깃발이 있었다.
[남상]
군웅 연합이 의욕적으로 도모한 일의 결과는 처참했다.
애초 그들은 전주와 김제 등에서 이주했던 상단에 기존 군현에 있던 상단의 재력을 밀어줬다. 사실상 지역별로 상단을 통합시켰다.
...그런데 그 이주한 상단들이 모두 백거마의 수족들이었다.
그러니까 쥐구멍으로 탈출한 이들은 쥐새끼를 잡아먹는 고양이었다. 철두철미한 하륜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 장기간 전주의 물자를 외부로 반출시키는 극단적인 방책을 취할 정도로 이 계책에 힘을 실었다.
이 과정에서 전주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결국 작전은 성공했고 군웅 연합의 반격 가장 앞에 있던 상단이 모두 백거마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남상의 전국화가 단번에 구축됐다.
그리고 이미 모든 물자를 소진한 군웅 연합의 패배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동안 군웅 연합이 퍼부었던 물자를 배가 터지도록 축적한 남상은 대대적인 물량 공세에 나섰다. 봉쇄령의 강풍이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듯 사방을 할퀴며 휘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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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오랜만일세?”
명덕태후의 표정이 밝지 않다.
그동안 태후전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명덕태후는 왕선의 불순함에 마음이 상한 게 분명했다. 이래저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것도 있지만, 도당 재상들과 어떤 식이라도 부딪히는 걸 피하려고 한 왕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명덕태후는 그런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굳이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는 없다. 작금의 정세가 가져온 변화가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정확하게 일러주면 된다.
즉, 믿음에 대한 보답. 그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마마께 올릴 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해서, 태후전을 찾는 것이 뜸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우선 가볍게 죄를 청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상해버린 상대를 배려해줄 필요는 있다.
왕선이 몸을 납작 숙이자 과연 명덕태후의 표정이 풀렸다.
“됐네. 자네의 활약은 잘 듣고 있네. 도당의 고약한 인사들을 아주 혼쭐내고 있다지?”
“과찬이십니다.”
“아주 잘 하고 있네. 내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그자들 모두 과거 이인임의 전횡에 침묵하던 인사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 구국의 충신처럼 행동하는 게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네.”
“그렇습니까?”
“···게다가 주상의 친정이라니. 가당치도 않네. 일국의 재상들이란 작자들이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다니. 이인임의 전횡을 눈감은 인사들 답네.”
왕우에 대한 명덕태후의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동안 진행된 강안전의 돌출 행동이 큰 영향을 미친 게 분명...
-왕선이 정통 왕족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인물이 용상에 앉았다면 이 늙은이가 편히 눈을 감았을 건데.
...하지가 않구나.
...이거 골치 아픈데?
왕선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렴청정의 덕이 고려 전역에 퍼지고 있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진심이 느껴진다.
명덕태후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왕선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재상 총재제를 꿈꾸는 그로서는 명덕태후 정도로 괜찮은 최고 존엄이 없다.
“그나저나 선물이 뭔지 궁금하군.”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이 사람은 성미가 급하네.”
“하지만 선물이 손에 올려졌을 때 확인하는 기쁨은 포기할 수 없는 거지요.”
“아닐세. 미리 듣고 만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걸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윗사람의 도리 아니겠나.”
왕씨들의 특징일까? 고집은 정말 강하다.
뭐. 그래도 정국운영에 대해서 이렇게 고집을 안 세우니 어딘가.
“과연 그렇습니다.”
“말해보게.”
“그것이···.”
왕선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덕태후의 표정은 미세하게 떨렸다.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 늙은이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네.”
“머지않아 마마께 올리겠습니다.”
“이 나라 고려 왕실의 복원은 오직 자네의 공일세.”
“과찬이십니다.”
태후전을 나온 왕선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졌다.
그동안 강안전에 너무 소홀했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제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한다.
그러고 보니 왕우는 원 역사에서도 설쳐대다가 죽었구나.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형님. 도당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강안전으로 가자.”
“예. 알겠습니다.”
전처럼 왕선의 앞을 막는 병사는 없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주공.”
“아. 나세 장군.”
“고생 많구려.”
“아닙니다.”
나세가 본궐의 병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왕선은 목을 살짝 풀면서 강안전에 발을 내밀었다.
내관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고하게.”
“예. 대감.”
“그리고 내관.”
“예. 대감.”
“나를 포함한 누구도 허락 없이 들어가게 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소, 송구합니다.”
자고로 적법한 절차는 밟아야 한다.
그래야 재상 총재제다. 아니면 권신의 농단일 뿐이다.
왕선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우는 전처럼 핏발선 눈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노려보지는 않고 초점이 허공에서 허둥거리고 있다. 겁에 질린 모습이다.
...정말 한심한 꼴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더 확신했다. 재상 총재제가 답이다.
이런 인간이 국정을 운영하면 불장난만 하다가 나라 꼴이 개판 될 거다.
...아. 실제로도 그랬구나.
“전하.”
그제야 왕선의 초점이 바로 잡혔다.
...그런데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 생각도 안 읽힌다. 정확하게는 안 읽히는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간 듯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셨습니까. 대동군.”
“예.”
“그래. 무엇을 하면 됩니까.”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옥새를 내어 드릴까요?”
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신이 보위를 노리는 거 같사옵니까?”
“아닙니까?”
“예.”
왕우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한데, 왜 강안전을 핍박하는 겁니까. 왜 군왕의 권위를 바닥에 끌어내리는 겁니까.”
점차 목소리는 격정적으로 변했다.
“···신우. 그거 대동군의 솜씨 아닙니까?”
“아니옵니다. 그건 조민수와 지용기의 짓이었사옵니다. 하여, 그들을 벌했사옵니다.”
“···대동군이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왕선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지그시 쳐다봤다.
“전하. 신은 보위에 관심이 없사옵니다. 애초 신의 자리도 아닐뿐더러 그럴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신은 이 나라 고려와 왕실의 안위를 생각할 뿐이옵니다.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옵니다.”
그 순간
-정말일까?
...잠잠하더니 정신이 돌아오니까 또 시작?
-그래. 그렇다면 보위를 가지라고 닦달하자.
...대체 이 인간의 뇌는 어떻게 생겼을까.
-비록 최영과 재상들이 큰 패배를 겪었으나 왕선이 보위에 야욕을 표출하는 순간 대대적으로 항거할 것이다. 그래. 차라리 그게 맞아.
-이제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구나. 그게 맞아. 눈앞에 있는 왕선은 이인임과는 결이 다른 괴물이야.
-그래. 맞아. 이인임은 기껏 권신에 그쳤으나 왕선은 용상에 앉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용상을 가지라고 충동질 하는 거야.
-최대한 공손하게.
-진심으로.
-당신이 용상의 주인이라고.
-당신이야말로 용상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이렇게 말해.
-그러면 없던 욕심까지 생길 거니까.
...무슨 촛불집회야?
정말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린다.
그때 왕우의 입술이 들썩였으나 왕선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전하. 이번이 두 번째 간청이옵니다. 이대로 가만히 계시옵소서. 진심이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 번째는 간청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
...지금 왕우를 군왕으로서 존중해지면 군웅할거가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할 수 없다. 겨우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했는데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
...아쉽지만, 지금 왕우에게 필요한 건 존경과 충심이 아니라 겁박과 역심의 위장이다.
“신이 권신의 길을 가게 하지 마시옵소서.”
왕우의 얼굴에는 치욕이 흘러내렸다.
대단하긴 대단하다.
이 와중에 두려움이 아니라 치욕을 느끼다니.
“신이 가는 권신의 길은 이인임과 다를 것이옵니다. 그러니 더는 신을 자극하지 마시옵소서.”
“예. 압니다. 그냥 폐위시키세요.”
“음.”
“폐위시키세요.”
...이거 안 되겠다. 배 째라고 덤비는데 겁박이 먹힐 리가 없다. 제대로 겁을 줘야겠다.
왕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공손하게 이르신다고 하셨사옵니다만?”
“···무슨 말입니까.”
“신을 충동질하겠다고 하셨사옵니다. 최대한 공손하게. 진심으로. 용상의 주인이 신이라고. 이렇게 말이옵니다. 하면, 없던 욕심이 생긴다고 말이옵니다.”
이, 이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왕우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왕선은 비릿하게 웃었다.
“벌써 잊으셨사옵니까? 신이 누구인지.”
그 순간 왕우의 머릿속을 스치는 불쾌한 한 단어.
[미륵]
왕우의 볼이 씰룩였다.
핏발선 눈에는 불쾌감이 치밀었다.
...역효과인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니까 무섭고 놀라운 것도 없나?
됐다. 그냥 밀고 간다.
“약조하겠사옵니다. 그냥 이대로 계신다면 누구도 전하의 보위를 탐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과인이 대동군을 어찌 믿습니까.”
“그건 전하께서 알아서 하셔야지요. 안 그렇사옵니까?”
덧붙였다.
“신이 고하지 않고 강안전에 들어오는 날. 그날이 신이 권신으로 탈바꿈하는 날이옵니다. 명심하소서.”
더럽고 찝찝한 기분으로 강안전을 나섰다.
“형님. 도당에서 다시 기별이 왔습니다.”
“나 기다린다고 하던가?”
“예. 어찌하시겠습니까.”
“천목아.”
“예. 형님.”
“도당의 재상들은 기다림에 익숙해져야지.”
“아.”
“그리고 하나 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지. 거만하게 도당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나를 찾아와서 기다려야 한다는 걸.”
졌으면 고개 숙이고 와서 협상안을 구걸해야지.
패장 주제에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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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은 통곡하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소생은 재주가 부족합니다.”
“······.”
“매번 패했습니다.”
“······.”
“이번에는 아예 조롱당했습니다. 애초 소생의 개입을 알고 있었는데 포은 사형으로 위장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이보게.”
“대감. 소생은 더는 자신이 없습니다.”
하륜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누구와도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왕좌지재 포은 정몽주와 겨뤄도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연이은 충격적인 완패는 거대한 자괴감을 내렸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인임이 진하게 스쳤다.
...그냥. 그냥 이인임이 지독하게 그리웠다.
만일, 함께 했다면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었을까?
아니구나. 애초 이런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평군 이인임을 생각했나?”
하륜은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최영도 자조적으로 웃고 있다.
“괜찮네. 나 역시 그를 수차례 떠올렸으니.”
“대감.”
“적어도 광평군이 집권했던 시절에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었으니까.”
“···처 백부 어른의 몰락에는 대감의 힘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후회하고 있네.”
“······.”
“그래서 대동군 왕선에게 치욕을 받아도 뭐라도 하고자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네. 이 늙은이의 과오를 씻고자.”
“······.”
“부족함은 채우면 되는 것일세. 하륜. 이 늙은이를 거들어주게.”
하륜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최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네.”
“일단 봉쇄령을 걷어내야 합니다.”
“···왕선이 만나주지 않네.”
“찾아가십시오.”
“······.”
“우리는 패했습니다. 대감. 와신상담을 새기며 왕선을 찾아가십시오. 가서 협상해야 합니다.”
“차라리 전주를 불바다로 만들면 어떤가.”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왕선은 도당을 피바다로 만들 겁니다. 잊으셨습니까? 개경은 왕선의 손바닥에 있습니다.”
“······.”
“괜한 행동은 그에게 명분만 줄뿐입니다.”
“···알겠네. 찾아가겠네.”
“소생도 와신상담을 뼈에 새기겠습니다.”
< 115화 패장들이 말이 많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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