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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14화 (114/187)

< 114화 아직 승리는 시작하지도 않았다(3) >

“기어이 대동군과 한 배를 타겠다고? 이 사부와 척을 지겠다는 것이냐?”

이색의 목소리에는 불편함이 담겼다.

“삼봉이 너를 망쳤구나. 망쳤어.”

정몽주는 고개를 저으면서 공손하게 답했다.

“사부님. 저는 대동군과 한 배를 타는 게 아닙니다.”

“한데, 어째서 사부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건가.”

“저는 그저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합니다.”

이색은 시선을 바로 잡았다.

“이 사부가 틀렸다는 것이냐?”

“어찌 사부님께서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저는 아직 수렴청정이 유지되길 바랍니다.”

“좋아. 자네 말대로 그 문제는 그렇다고 하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제가 사부님과 최영 대감의 당여가 된다면 어찌 수렴청정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친정을 청했을 겁니다.”

“이보게. 포은. 그만큼 대동군의 정치가 비정상적이네. 지금도 보시게. 봉쇄령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부님. 도당의 정치도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건 복원해내면 될 일이야.”

“어찌 복원의 길이 한 가지만 있겠습니까.”

“허. 포은. 지금도 도당의 재상이 모두 붙어서 그 한 명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어. 그런데 대동군의 세상이 되었을 때는 어찌할 건가. 자네의 잣대에 어긋나는 짓을 하더라도 쳐다만 봐야 할 수도 있네.”

정몽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 저는 유불리를 고민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옳다면 행하고, 그르면 막을 뿐입니다.”

“이 사부의 길을 막을 건가?”

“아닙니다. 단지, 저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사부님과 만날 수도, 대동군과 만날 수도 있지요.”

이색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라도 오길 바라네.”

“사부님.”

“이 사람아. 자네의 자리를 비워놓는 것으로도 탓을 하려고 하나?”‘

“아닙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됐네.”

“사부님.”

“내가 찾아올 것이야.”

“언제라도 시간을 비우겠습니다.”

“아. 최영 대감도 자네를 보고 싶어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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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의 표정에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냉혹한 정세에서 너무나도 한가한 말이 아닌가.

하륜은 티 나지 않게 실소를 머금었다.

“대감. 사부님은 포은 사형을 크게 아끼십니다. 적을 속이는 도구로 낙점했다는 걸 알면 절대 동의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사람은 너무나도 무르다. 절대 집정 대신의 그릇이 아니다.

전장에서 보여주는 판단력의 1할만 정치에 구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도 최영은 최영이다. 일단 결정되면 무서우리만큼 맹렬하게 몰아친다.

하여, 하륜은 설득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말했다.

“조만간 포은 사형이 대감도 찾을 겁니다. 최대한 오래 대화를 나누는 게 좋습니다.”

“휴. 알겠네. 한데, 왕선이 속을까?”

“속지 않으려고 해도 정황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봉쇄령을 분쇄하고 있는 군웅 연합을 펼칠 정도의 대범한 책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의문의 책사를 찾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럽나?”

“예. 전혀요. 어쨌든 이 묘한 시기에 포은 사형과 우리의 접촉이 많다? 심지어 포은 사형은 적과 친분도 두텁습니다. 의심은 커질 겁니다.”

“만에 하나 왕선이 포은을 핍박한다면?”

“그러면 포은 사형이 확실하게 말할 겁니다. 대동군 왕선은 악적이라고요.”

“바람직하군. 어떤 경우라도 손해 볼 게 없군.”

“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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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도전을 쳐다봤다.

“그게 뭐 중요한 정보라고 분위기를 잡고 말하오?”

“허. 사부님과 최영 대감이 포은을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한 겁니까.”

“보나 마나 꾀어내려고 하는 거겠지. 문제 있소?”

“없지요.”

“그런데 왜 그러오?”

정도전은 입맛을 다셨다.

“괜히 해본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 사람이 대경실색하는 걸 원한 거겠지.”

“티 났습니까?”

“아주 많이.”

“끙. 그나저나 희한하군요. 어느 정도 내부의 동요가 있을지 알았는데.”

“그건 그렇소. 나세 장군이 우리 의사를 아주 정확하게 전달했는데 말이외다.”

“생각보다 단합이 공고한가 봅니다.”

“공고해졌겠지. 그동안 최영 대감과 재상들에게 부족한 건 책사였으니까.”

“하륜이 능력이 있긴 하지요. 모르긴 몰라도 이 나라 고려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인물일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첫 번째가 우호적이고, 두 번째가 내 옆에 있는데.”

“허.”

“왜 그러오?”

“소생 삼봉 정도전. 학식으로는 포은보다 부족하지만, 지략까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왕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가 첫 번째요.”

정도전은 빙그레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협잡질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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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분위기는 뻑뻑했다. 상인들은 연신 한숨을 쉬었다.

전체적인 상업의 침체로 어려움을 겪다가 새로운 호황기를 맞이한 남상으로 인해서 활기가 돈 것도 잠시였다. 왕선의 봉쇄령으로 남상이 모두 빠져나가면서 급격하게 상계가 흔들린 거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삼삼오오 모여서 시절을 한탄하는 것에 불과했다.

“자네 소식 들었나? 김제 상인들이 은밀하게 넘어왔다는군.”

“이 사람아. 그걸 모르는 상단이 어디 있나. 점차 규모도 커지고 있네.”

“전주에서 봉쇄령이니 뭐니 하던데 문제가 많은 보더라고.”

“애초에 그게 될 일인가? 이 좁은 나라에서 봉쇄령이라니.”

“그렇지. 다른 군현에 팔아야 할 물건을 정해진 경계 안에서 모두 소화하려니까 답답하겠지.”

“도당에 앉아 있는 높은 분들 싸움에 우리만 죽어나는 거지.”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리고 뭐? 군웅 연합? 어처구니가 없군. 높은 분들은 뭉쳐서 내정만 지키면 되는 거니까 그런 짓이나 하는 거지. 지금도 보라고. 우리의 물자를 강제하다시피 가져가서 헐값에 넘기고 있지 않나.”

“헐값이라도 받는 게 어딘가. 저기 박가 놈은 대가를 언제 받을지 기약도 할 수 없다더군.”

“답답하네. 답답해.”

“아무리 버러지 같이 살려고 해도 입에 풀칠은 해야지.”

“바로 그 말일세. 적당히 싸우고 화해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고 보면 대동군도 문제야. 아무리 그래도 봉쇄령이 뭔가. 봉쇄령이.”

상인들의 입에서 봉쇄령의 위력과 군웅 연합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폭로됐다.

그랬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봉쇄령의 힘은 거대한 태풍과도 같았다. 이를 막아선 군웅 연합은 말 그대로 군웅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건 군웅 연합으로서 봉쇄령이 내는 바람 일부를 막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봉쇄령의 강풍이 밑으로만 밀고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뭔가?”

“그...”

“뜸 들이지 말고.”

“김제 쪽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거래를 트면 좋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사람들이 물건을 가져오면 우리가 구해서 따로 넘기는 걸세.”

“될까?”

“이 사람아. 그 먼 길을 넘어온 사람들이네. 터 잡기도 힘들 건데 제값으로 넘기겠나? 적당하게 후려쳐서 헐값으로 받는 거지. 그러기만 해도 우리는 손해 볼 게 없지. 안 그런가.”

“하긴.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같이 하겠나?”

“우린 항상 같이했네. 단짝 아닌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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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수렴한 하륜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고려 전역을 상대하던 상단이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에서만 장사하게 됐습니다. 10개를 팔다가 2개, 3개를 팔고 나머지는 남아버린 겁니다.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요. 봉쇄령의 한계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대감. 드디어 닭 모가지를 비틀 시기가 왔습니다.”

“좋아. 바로 시작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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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전녹생이 보낸 서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쥐구멍이 제 역할을 하는군.”

정도전은 기분 좋게 웃어댔다.

“불나방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 겁니다.”

“좋소. 그러면 이제 쐐기를 박읍시다.”

“예. 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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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 연합은 총공세를 펼쳤다.

모든 재력을 동원하여 전주의 물자를 사들였다.

동시에 이탈하는 중소 상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거점을 마련해줬다.

하륜은 이마를 긁적였다.

“그야말로 철옹성이군요. 이 정도 물량 공세를 퍼부었으면 봉쇄령이 분쇄되어야 하는데.”

“시간이 알아서 해주지 않겠나?”

“음. 변수는 언제라도 생기는 법입니다. 괜히 시간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대감의 말씀대로 시간을 끌더라도 이대로라면 봉쇄령은 와해합니다. 그러니 그 시간에 들 물자를 한 번에 조달하여 전주를 아사시키면 가능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그런데 그럴 정도의 물자가 지금은 없네.”

하륜은 최영의 눈을 주시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감. 군웅들의 군량을 사용해야 합니다.”

“허. 하륜.”

“뺏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물자는 군량미밖에 없습니다.”

“군웅들이 동의하지 않을 건데.”

“동의하지 않지만, 장군께서는 동의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닙니까?”

“음.”

하륜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군량고를 오랫동안 비울 수는 없지요. 왕선의 세력권에서 넘어온 상단이 잘 자리 잡았습니다. 어차피 적의 물자를 빼 오는 역할은 이들이 하지요.”

“군량미를 바로 그들에게 넘기자는 건가?”

“예. 그러면 시간이 더 단축될 겁니다.”

“음.”

“대감. 이번 한수로 전주는 바닥까지 떨어질 겁니다.”

장고를 거듭하던 최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하륜의 지략 때문이다.

자신은 그의 말을 집행했을 뿐이고.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머지않아 새벽이 조용해질 겁니다. 닭 모가지가 날아갈 거니까요.”

“바람직하군.”

최영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하륜을 쳐다봤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뭐할 건가?”

“에고. 마음 같아서는 편히 쉬고 싶은데 이 수상한 시절이 소생을 그냥 두지 않는군요.”

“음. 이보게. 하륜.”

최영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륜은 멋쩍게 웃었고.

“어떤가.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대감. 소생은 이성계 장군의 책사입니다.”

“알고 있네. 만일 이 장군이 걸린다면 내가 잘 말해보겠네.”

“대감.”

“이 늙은이는 정치를 잘 다루지 못해. 하지만 정치를 잘 다뤄야 하는 지위와 역할이 있네. 하지만 자네가 옆에서 조언해준다면 잘 해낼 수 있네.”

하륜은 재차 이마를 긁적였다.

이번에 겪어보니 최영은 정말 답답했다.

속에서 천불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최영이 가진 힘은 엄청났다.

단지 그걸 정치에서 구현하는 방도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만일 그에게 제대로 된 책사만 있으면?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만일 이대로 최영의 제일군사가 된다면 그 광활한 세력을 움켜쥐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참으로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최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네. 생각해보게.”

“예.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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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당의 분위기는 밝았다.

왁자지껄 떠들었다.

그때 왕선이 들어왔다.

모두 조롱하듯 웃어댔다.

그런데 뭔가 희한하다. 이제 막 도당에 들어선 왕선의 손에 종이가 잔뜩 들려져 있지 않은가.

...대체 뭘까?

“아. 이게 궁금하겠군요.”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백지입니다. 백지.”

백...지?

무슨 말일까?

“원래는 백기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서 백지를 가져왔지요.”

왕선은 백지를 내밀었다.

“자. 한 장씩 들어서 이 사람을 따라 해보세요.”

왕선은 백지를 오른손에 쥐더니 하늘로 들었다.

“이렇게.”

그리고

“항복.”

“흥. 이제 와서?”

“어림도 없지.”

“두 번 다시는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외다.”

“큭. 고개는 무슨. 모가지가 뽑혔는데.”

“하하하. 과연 그렇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새벽 참으로 조용하더이다. 닭이 울어대지 않아서.”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백지를 열심히 흔들어댔다.

한참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대로 항복하는 게 아닌가.

마침내 재상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왕선은 천천히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

웃기는 소리.

“우리는 대동군의 항복을 받을 생각이 없소.”

“그렇소. 전주를 아사시킬 것이니 그리 아시오.”

왕선은 히죽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이 사람이 배가 터질 정도로 배불리 먹게 해주셨으니 감사하다는 말이지요.”

...예상과는 다른 전개.

재상들의 눈에 의아함이 잔뜩 내렸다.

왕선은 비릿하게 웃었다.

“선물로 주신 군웅 연합의 상단.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무, 무슨 말인가?

조금씩 동요가 일었다.

“아. 하륜보고 아직 백 년은 멀었다고 전해주십시오.”

왕선은 흔들어대던 백지를 가볍게 던졌다.

“가르쳐드렸으니 잘 흔들어보세요.”

그렇게 도당을 나섰다.

멍하게 지켜보던 최영의 입이 열렸다.

“다, 당장···.”

거세게 떨리는 목소리.

“당장 거점에 사람을 보내서 사실을 확인해보시오!”

불안함이 엄습했다.

한편, 도당을 나선 왕선은 하늘을 쳐다봤다.

참으로 햇살이 눈 부셨다.

“캬. 날씨 진짜 좋네.”

압도적인 완승이었다.

< 114화 아직 승리는 시작하지도 않았다(3)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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