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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13화 (113/187)

< 113화 아직 승리는 시작하지도 않았다(2) >

“확실하게 한 거 맞소?”

“···소생을 믿지 못하십니까?”

“결과가 없으니 하는 말이외다.”

정도전이 이색에게 미끼를 던졌다.

제대로 물었다면 지금쯤 군현의 상단을 움직여서 봉쇄령을 와해시키려고 해야 했다.

“소생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봉쇄령의 끝에 남상의 전국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상단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야 합니다. 이게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음. 누가 그걸 모르오? 뻔한 말을 하는 걸 보니 전주로 내려가고 싶은가 보오? 거기서 내정이나 하시겠소?”

“그럴 리가요. 이래서 쥐구멍을 만들어 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요. 쥐구멍으로 덤벼드는 쥐새끼가 없지 않소.”

“곳간 안의 쌀을 탐하는 쥐새끼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곳간 안에 있는 쥐새끼라도 내보내야지요.”

“정확하게 합시다. 쥐새끼가 아니라 쥐새끼로 위장한 고양이지.”

“예. 계획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전체적인 틀은 변함이 없습니다.”

“음.”

“밀교원을 움직여서 면밀하게 확인하겠습니다.”

“아. 됐소. 가뜩이나 일손 부족한데 쓸데없이 인력 낭비하지 마시오. 저들의 꿍꿍이속은 내가 직접 알아오리다.”

“가능하겠습니까?”

“도당에 앉아서 몇 마디 주고받으면 훤히 보일 거요. 그러니 군사는 이대로 진행하시오.”

상대의 수를 읽어내는 왕선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도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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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도당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단단하게 뭉쳐서 결기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

슬쩍 고개를 돌린 왕선은 최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하륜의 계책대로라면 지금 왕선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울 것이다.

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하륜이 왔구나.

그래. 뭐가 이상하다고 했다.

여기에 똬리 튼 사람들은 불나방이다. 정도전이 던진 미끼를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하다.

나아갈 때와 고수할 때를 확실하게 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당의 불나방들은 그런 솜씨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륜이라면 다르다.

...그나저나 그렇게 겁을 줬는데 또 덤빈다? 배포가 참 좋다.

그리고 제법 큰 변수가 생겼다. 정도전에게 알려줘야 한다.

“회의 시작 안 합니까?”

아무도 답이 없다.

왕선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 하면 가봐도 되겠습니까?”

“해야지.”

...최영의 나지막한 답변.

왕선은 고소를 삼켰다.

“정확하게는 회의가 아니라 따로 할 말이 있소.”

“이 사람에게요?”

“물론이요.”

“궁금하군요.”

“그럴 것 같았소. 기껏 쥐구멍을 만들어 놨는데 쥐새끼가 안 들어가니 그 이유가 얼마나 궁금하겠소?”

역시.

왕선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거 놀랍군요. 쥐구멍인 줄 알아내실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별로 대단치 않은 협잡이었소.”

“뭐. 어쨌거나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습니다. 이미 봉쇄령은 고려 전역을 삼키기 시작했으니까요.”

“그게 언제까지 갈 거로 생각하오?”

“이 사람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요.”

“장담하지. 봉쇄령은 절대 오래가지 못하오.”

“뭐. 이유는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나라 고려는 상업이 쇠퇴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오. 봉쇄령이 다른 군현을 타격하는 만큼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도 피해를 주게 될 거니까.”

“상업이 쇠퇴한 게 다행입니까? 하긴. 대감과 재상들은 넓은 지옥과 열심히 일하는 두발짐승만 있으면 되니까.”

“마음대로 지껄이시오.”

왕선은 눈을 찡그리며 입을 오므렸다.

“어디 한번 잘 해보십시오. 생각한 대로 잘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말이외다. 우리도 반격이라는 걸 해주리다.”

뭐?

왕선은 멈칫했다.

최영의 눈과 마주치는 그 순간

-고려 전역이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를 봉쇄해주겠다.

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우리를 봉쇄한 게 아니라 우리가 대동군을 봉쇄하는 것이라오.”

“허.”

“적의 계책을 잘 가져다 쓰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기본이라오.”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공격이다.

왕선은 인정했다.

전라도 북부의 상업과 곡식 생산량이 다른 지역을 압도하더라도 모든 지역을 단번에 무너뜨릴 정도로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으니까.

이 상태에서 모든 군웅이 똘똘 뭉쳐서 십시일반 하면 봉쇄령은 참으로 무색해진다.

왕선이 머뭇거려서일까?

“도당에서 미친 듯이 짖어댄 닭의 모가지를 확실하게 비틀어주리다.”

기세가 오른 최영은 한껏 조롱했다.

왕선은 이마를 긁적였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허.”

“어디 제대로 한번 해보지요. 아. 그런데.”

덧붙였다.

“대감께서 이 사람의 목을 비틀 힘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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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이 개경에 있다고요?”

“그렇소.”

“허. 말도 안 됩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소. 하륜이라는 적의 책사가 도성을 활보하고 있소. 그거 아시오? 밀교원은 뭐했길래 이 중요한 사안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거요?”

“···송구합니다.”

정도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왕선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이러다가는 진짜 모가지가 비틀어질 수도 있다.

“개경의 사정을 들은 이성계가 하륜을 급파했겠지.”

“고약한 인사입니다. 동북면이나 제대로 챙길 것이지.”

“됐소. 이미 발생한 일이오. 그리고 쥐구멍을 통과할 고양이는?”

“준비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잘 들으시오. 만일 고양이가 실패하면 완전 개판 되오. 아시겠소?”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륜이 개경에 있다는 걸 안다는 건 철저하게 비밀로 하시오.”

“물론입니다. 그래야 적이 방심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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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 연합은 강고하게 단결했다. 펼쳐진 형세로만 본다면 왕선이 봉쇄령을 펼친 건지, 고립된 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륜의 보좌를 받은 최영은 지금까지 보여준 무능함과는 달랐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재상들을 통제했다.

“거점의 상단을 잘 단속하게.”

“작은 손해를 보더라도 타 군현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정치판에 들어오면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던 최영의 강력한 무력이 하륜의 정교한 계책을 만나면서 뛰어난 정치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고무적이었다.

전라도의 남부,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의 물자가 원활하게 움직였다.

한때 맹위를 떨쳤던 남상은 세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주의해야 할 건 백성의 이탈입니다.”

바로 쌀이었다.

이 문제만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사실 원래부터 가난한 백성들이다. 하지만, 모두 가난했기 때문에 그건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제, 부안, 익주 등의 쌀 생산량은 오랜 전란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눈과 귀를 현혹했다.

인접한 지역에서는 배불리 먹고 풍족한데, 자신들의 산을 오가며 풀뿌리나 먹어야 한다면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겠는가.

그랬다. 군웅 연합이 아무리 용을 쓰더라도 마땅한 방책이 없었다.

군웅할거 전후로 철두철미한 농본정책을 펼친 전주의 풍족함은 여전히 낙후한 다른 지역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통제하라고 했네. 문제는 없을 거야.”

“예. 소수의 백성이 도주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규모 있는 이동만 막아낸다면 왕선의 봉쇄령은 뿌리부터 흔들릴 겁니다. 다 왔습니다.”

“적절하네. 한시라도 빨리 그런 날이 오길 바라네.”

최영에게는 호언장담했으나 하륜은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봉쇄령이라는 초유의 방책을 꺼낸 왕선이 군웅 연합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뭔가 또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 같다.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를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불안했다.

끈적임이 짙게 드리운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찻잔 속의 태풍이었습니다.”

“예. 떠들썩하게 시작했으나 실제로는 된 게 없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완승입니다.”

재상들은 고무됐다.

그만큼 상황은 아주 호전적이었다.

그런데 하륜만큼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왜 그러나.”

“아. 송구합니다. 최영 대감.”

“괜찮으니 말해보게.”

“왕선이 너무 조용합니다.”

“이보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내린 판단은 중대 결정의 근거로 볼 수 없네.”

“소생도 그건 압니다. 하지만 그동안 왕선이 보인 행보와 이번 봉쇄령을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납니다. 잊으셨습니까. 왕선은 전인미답의 정치술을 펼치는 인물입니다.”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고 볼 수 있지 않겠나.”

정지였다.

하륜이 쳐다보니 뭔가 아는 게 있는 듯한 눈치다.

곧장 물었다.

“이 사람아. 꼭꼭 숨기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순천에서 연락이 왔네. 왕선의 세력권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있어.”

“정말인가?”

“아무렴. 아직은 수가 많지 않아서 티가 나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나와 왕선은 경계를 마주하고 있지 않나. 작은 흐트러짐이라도 파악하는 게 가능하네.”

정지와 왕선은 전라도를 양분하고 있는 군웅이다.

이는 바꿔말해서 상대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 만약 이탈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운 전라도 남부로 가는 게 합당하다. 그러니까 정지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풍족한 옥토라고 할지라도 한계가 있는 거지. 상단의 일부가 은밀하게 물자를 옮기기도 했네. 들어보니 들키면 모두 즉참이라고 하더군. 그들로서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탈주라고 할 수 있지.”

하륜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지의 말을 분석했다.

...이것도 작전일까?

...아니면 정말 왕선이 궁지에 몰렸을까.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모두 하륜의 시간을 존중했다.

그의 계책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 대감. 밖으로 나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황망함이 가득한 마름의 목소리.

최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감.”

자신감이 가득한 굵직한 목소리.

나세였다.

“···오랜만일세. 한데,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음. 주인이 시킨 일을 수행하고 있겠군.”

“허. 이거 못 본 새에 많이 변하셨군요. 그런 말씀도 하시다니요.”

“용건이나 말하게. 아. 그리고 그 언월도는 좀 치웠으면 좋겠군. 무척이나 거슬리니까.”

최영의 싸늘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세는 동요하지 않았다.

“주공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언월도 치우라고 했네.”

“기층부터 썩어빠진 군웅 연합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전주가 어찌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리고 지금이라도 포기할 것을 권유하셨지요.”

“아. 치울 게 하나 더 생겼군. 협잡. 당장 집어치우게.”

“분명하게 일러드리지요. 봉쇄령을 거둘 수 있는 건 오직 우리 주공의 의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거 안 되겠군.”

최영이 칼을 고쳐잡았다.

나세는 묘하게 웃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막으셔도 됩니다.”

나세는 더 말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최영도 굳이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지금 나세의 격장지계 따위에 흔들릴 이유는 없으니까.

한편, 재상들의 뒤에 숨어서 곁 눈길로 상황을 지켜보던 하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나세의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강수를 두는 걸까? 현 정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걸까?

그러나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왕선은 위기상황에 처했지 않은가. 또, 진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군웅 연합을 향해서 대대적인 반격을 하는 게 옳다.

생각은 깊어졌다.

...그러면 허장성세일까? 약한 고리를 들키지 않고자 일부러 강경책을 사용하는 걸까?

그렇다고 왕선이 꼬리를 말아내라는 모양새를 취했다면?

그건 그대로 위장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일까.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왕선에게 당한 과거의 흔적이 끝없이 머릿속을 흔들어 댄 탓이다.

“하륜.”

“아, 아. 대감. 송구합니다.”

“자네 나세가 왜 왔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아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부분을 가늠할 수 없네. 그건 자네의 몫이겠지.”

“알아내겠습니다.”

“오랫동안 잡히지 않은 날짐승이 있네. 많은 사냥꾼이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지. 이 날짐승이 아주 영악하거든. 어느 정도로 영악하냐면 사냥꾼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알 정도로. 잘 보게. 그러면 이 날짐승은 사냥꾼의 기척이 느껴질 때 무엇을 먼저 할까?”

“···사냥꾼의 정체를 확인할 겁니다.”

“바로 그거일세. 왕선이 우리 측에 책사가 있다는 걸 파악하지 못했을까?”

“예?”

“왕선이라면 책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나?”

하륜은 당혹감을 표출하며 눈을 껌뻑거렸다.

“물론 자네가 책사라는 건 모르겠지. 동북면에 있어야 하니까.”

하륜을 눈을 크게 떴다.

“과연. 오늘 나세가 온 이유는 책사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것이군요.”

“내 생각은 그렇다네. 그래야 차후 행보를 정할 수 있으니까.”

확신에 가까운 최영의 답변.

하륜은 둔기로 세차 게 맞은 것만 같았다.

“대감.”

“말하게.”

“봉쇄령을 둘러싼 왕선의 행보가 계책인지 궁지에 몰린 건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확실한 건 어떤 모종의 이유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해서, 사냥꾼을 파악하려는 거지요. 그러지 못하면 다시 닭장에 갇혀야 하니까요.”

“결론은?”

“덫을 치우는 겁니다.”

“덫을 사용하지 않고 사냥하려면 사냥꾼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지.”

“예.”

“우리의 책사를 노출하자?”

“예. 그렇습니다.”

“그래. 누구를 세우면 적당하겠나.”

하륜이 싱긋 웃었다.

< 113화 아직 승리는 시작하지도 않았다(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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