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아직 패배는 끝나지 않았다 >
왕선이 쏘아 올린 봉쇄령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대동군 왕선.
그는 고려 최고의 옥토라고 할 수 있는 전라도의 북부와 충청도를 장악한 군웅이다. 어디 그뿐인가? 쇠퇴의 길로 접어든 다른 상단과 달리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한 남상을 거머쥐고 있으며 최근 서역 상인과의 독점 무역도 이뤄냈다.
말 그대로 왕선의 영지는 고려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반면, 나머지 지역은 군웅할거 전과 비교해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많은 군현이 남상의 물자에 의존했고, 더 많은 군현이 전라도의 쌀을 갈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왕선의 봉쇄령이 집행된다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말 그대로 생지옥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봉쇄령을 시행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만큼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가 고립된 섬이 아니기에 차단한다는 게 어렵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봉쇄령이 이뤄졌을 때 다른 군웅의 조직적인 저항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게 된다. 현 고려 최고의 전력이 있다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왕선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군웅이 4명이나 있지 않은가. 또한, 봉쇄령은 엄밀히 따진다면 고려 내부를 초토화할 수 있는 계책이기도 했다. 그만큼 봉쇄령은 다른 차원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복잡했다.
이를 왕선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봉쇄령이 의미하는 건 한가지였다.
재상들은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수렴청정을 고수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예. 친정 상소를 막기 위한 왕선의 계책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정신 나간 인사라고 할지라도 봉쇄령이라니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미쳐도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예. 소직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정 상소와 협상하기 위한 방책입니다.”
재상들의 아우성은 끝없이 이어졌다.
말없이 듣던 최영은 고소를 삼켰다.
“협상해야 합니다.”
“협상하는 게 옳습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왕선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재상들은 봉쇄령이 실제로 집행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는가? 적의 수를 다 파악했는데 반격하는 게 아니라 협상을 주장한다는 꼴이 말이다.
그랬다. 그들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상대의 수가 엄포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운 것이다. 아무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모를 제 세력의 피해를 걱정하는 것이다.
하나로 단결되어 싸워야 할 때 보신주의에 빠진 것이다.
참으로 오합지졸이다.
...그리고 이들과 싸우더라도 내부의 분란만 커질 뿐이다.
재상들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친정을 청하는 행위를 멈추자는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걷어내는 공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원만하게 정치적인 협상을 마련하자는 거였다.
최영은 쓰게 웃었다.
어쨌거나 친정 상소를 거두는 건 왕선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는 걸 의미했으니까.
“결국, 이번에도 왕선이 이겼군.”
그렇게 내부결의를 마친 최영과 재상 앞에 싱긋 웃는 왕선이 도착했다.
“···친정 상소를 거두겠소.”
수치스러웠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왕선의 고꾸라뜨리겠노라 그렇게 단언했건만.
기어이 군왕의 친정을 도출하겠노라 장담했건만.
...지금 이렇게 사실상 백기를 들고 있지 않은가.
최영의 감정을 느꼈을까?
재상들은 매섭게 왕선을 쏘아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왕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최영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요?”
“···대동군. 더는 이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말게.”
“욕되게 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루 만에 도당의 중론을 철회한다길래 놀라서 그럽니다. 그리고 그걸 이 사람에게 말해주니 더 이상하고요. 언제부터 수시중 대감께서 이 사람을 그렇게 살뜰하게 챙기셨지요?”
최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볼이 씰룩였고 수염이 떨렸다.
보다 못한 박위가 나섰다.
“대동군 대감. 협상을 제안하는 것이외다.”
“협상이라니요? 음. 자세한 건 모르겠으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이 사람의 이해도 얽혀 있는 거 같군요. 그러면 그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주시겠소? 박위 장군?”
“···친정을 거뒀으니 봉쇄령 선언도 철회해줄 것이라고 믿겠소.”
“응?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동군 대감. 우리가 친정을 거둔다고 했소. 그러니 대감도 선언을 철회해달라는 것이오.”
“협상이라는 건 양쪽이 원하는 걸 가져와서 주고받는 거. 뭐.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오?”
“맞소.”
“그러니까요.”
왕선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 없구려. 이 사람은 친정을 거둬달라고 말한 적이 없소. 그런데 무슨 협상을 하자는 거요?”
“···대감의 입으로 그 말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친정 상소의 철회를 바란다는 걸 어찌 모르겠소. 그러니 이쯤 하시오.”
“친정 상소. 올리세요. 괜찮으니까.”
“뭐, 뭐요?”
“거. 협상이라면서요? 이 사람의 봉쇄령이 불편하다면 상응하는 걸 가져와야지요.”
“이, 이보시오.”
“못 들으셨소? 저울의 균형을 맞춰보라는 거요.”
생각지도 못한 왕선의 말.
재상들은 말문이 막혔다.
“음. 보아하니 다른 걸 내놓을 게 없나 보구려. 좋소이다.”
좋소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 굴욕적인 협상이 마무리되는 건가?
재상들은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데
“병법을 하나 일러드리겠소.”
...병법? 갑자기?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비웃으면서 말했다.
“전쟁에서 적군이 물러났다고 손뼉 치며 떠나보내는 건 모자란 인사들이나 하는 거지요. 곧장 쫓아가서 적의 후미를 가격하고 본진을 궤멸시켜야 두 번 다시는 덤벼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오.”
이 자리에 있는 재상의 상당수가 백전의 노장이다.
왕선이 살아온 시간보다 전장을 누빈 세월이 더 길었다.
그런데 지금 왕선이 병법을 운운하면서 조롱한다.
수치심이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이 엄청난 현실은 그조차도 대수롭지 않은 감정으로 만들었다.
“아. 지금쯤이면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 곳곳의 길목이 모두 차단됐을 겁니다.”
“!!!”
이제야 도당의 재상들은 느꼈다.
자신들이 상황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파악했다는 걸.
“나라 안의 큰 제언이라고 불리는 김제, 익주, 부안의 쌀은 단 한 톨도 반출되지 않을 겁니다.”
왕선은 가락을 읊듯 말을 이었다.
“남상의 물자는 단 하나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아. 서역 상인과의 교류도 마찬가지.”
왕선의 입꼬리가 크게 올라갔다.
“아시겠습니까? 이 사람의 정치가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그랬다.
왕선의 봉쇄령은 도당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시행된 것이다.
“아. 하나 더 알려드리지요. 만일 봉쇄령을 어기고 물자를 빼돌린다면?”
싸늘하게 웃었다.
“다 죽는 겁니다. 못할 거 같지요? 이 사람은 합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그냥 하면 됩니다.”
오른손 손가락을 기괴하게 움직였다.
“명분?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유치하게 말로 싸우지 않을 거라서요.”
기괴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아. 오는 길에 태후전을 들렸지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서찰? 아니다. 옥새가 찍혀있다.
이는 명덕태후의 의지라는 것이다.
“본궐의 경계를 이 사람에게 맡기셨지요.”
“!!!”
“세상이 뒤숭숭하다 보니까. 그동안 본궐 경계가 형편없지 않았습니까.”
본궐의 경계를 맡았다? 이건 다른 말로 수렴청정하는 명덕태후와 훗날 친정하게 될 군왕의 신변이 왕선의 손바닥에 올라갔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사병을 배치할 수 없는 현실에서 본궐의 경계는 책임지게 된다면 법도에 따라 병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재상들에게 왕선은 더 큰 선물을 말했다.
“혹시라도 허튼 생각을 할까 봐 미리 말하지요. 이번 일 나세 장군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덧붙였다.
“대략.”
대략?
“1천 명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1천 명의 정예병과 나세.
이것이 의미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어떤 식이라도 본궐을 범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친정 상소는 명덕태후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고, 왕선이 이를 역이용해서 본궐 경계를 거머쥔 것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완패했다. 아주 처참하게.
“정말 노파심으로 말하는 겁니다. 봉쇄령. 철회 안 합니다.”
재상들은 너무나도 지극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다시 상기시켜주는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 도당의 패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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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잘 하고 오셨습니까?”
“어찌 그렇게 한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모르겠소.”
“덕분에 본궐 경계를 책임지게 됐습니다.”
“뭐. 적의 아둔함은 항상 축복을 가져다주는 법이니까.”
“개경의 백성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선출하겠습니다. 딱 천명.”
“나세 장군이 알아서 잘 할 거요.”
정도전이 콧잔등을 만지면서 넌지시 말했다.
“태후 마마께서 불교에 아주 애착이 크시지 않습니까?”
왕선은 헛웃음을 삼켰다.
“설마?”
“승려들이 태후전을 방문하여 법회도 열고, 마마와 담소도 나누고. 아름답군요. 마마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이런.”
“생각만 해도 위대합니다. 도끼 든 승려들이 궐을 드나든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의 위상! 대단합니다.”
“···몇 명 생각하시오?”
“100명 정도면 적당하겠지요?”
“많군.”
“이로써 본궐에 주둔할 우리 병력은 1,100명이 되는군요. 철옹성이 만들어졌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이번에는 아주 강하게 확신처럼 느껴졌다.
...정도전은 돌아이가 분명하다.
“어쨌거나 사방이 적이니까 좋은 게 있더이다.”
“그렇지요? 그냥 다 죽이면 되니까 편하지요?”
“포은 선생도 죽이라고?”
“장난합니까?”
“당연히 농이오. 그나저나 참으로 다행이오. 포은 선생을 미리 설득해둔 게.”
“허.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포은은 원래 소생과 한길을 갑니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다.
왕선이 묘하게 웃자 정도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뭡니까. 그 웃음의 의미는?”
“아. 별거 아니외다. 그나저나 그 절친한 벗과 영 사이가 안 좋은 거 같던데?”
“누가요? 소생과 포은이요? 하하.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만난 지도 오래됐지 않소?”
“그건 얄팍한 관계에서나 해당하는 거지요.”
“거. 그러지 말고 좀 만나시오.”
“왜 그럽니까?”
“확실하게 당겨올 자신 있다면서.”
정도전은 조금 머뭇거린다.
그러면 그렇지.
포은 정몽주를 한 번에 끌어당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 사람은 말 그대로 신념의 화신인데.
“자신 없소?”
“허. 누가요? 소생이요? 이거 왜 이럽니까? 포은은 소생과 영혼을 공유한 사이란 말입니다.”
괜히 버럭버럭하는 모습이 우습다.
왕선은 고개를 살짝 틀면서 말했다.
“다음 회의 때 포은 선생도 함께할 수 있겠구려. 이거 거는 기대가 크오.”
“끙.”
“아. 일전에 상소를 올렸던 윤소종? 그 인사도 좀 데려오시구려.”
“윤소종 바쁩니다.”
“그러면 고생하시구려.”
“윤소종 바쁘다고요.”
왕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거. 답답하오?”
“예?”
“내가 친히 보험을 하나 들어준 거요. 벼락 맞아 죽을 가능성으로 포은 선생을 못 데리고 오면 군사의 체면이 깎일까 봐. 꿩대신닭? 뭐. 그런 거. 알겠소?”
“험험.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보험은 또 뭡니까?”
“도솔천.”
“소생이 꼭 가봅니다.”
“환영하오. 삼봉 보살?”
“끙.”
< 111화 아직 패배는 끝나지 않았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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