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10화 (110/187)

< 110화 봉쇄령 >

“큭. 몇 번을 생각해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정도전은 감탄사를 몇 번이나 내뱉었다.

왕선도 손뼉을 치면서 동조했다.

“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소.”

“응? 그래야지요. 넘어가야지요.”

“어서 넘어갑시다.”

“예. 보십시오.”

모두 시선이 쏠리자 정도전은 어깨를 펴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개경 외곽에 구한 주공의 땅에 백성이 거주하는 겁니다. 정상적인 정국이라면 그들을 어찌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떤 시절입니까! 바로 군웅할거 아닙니까? 비정상도 정상이 되는 시절이지요.”

...방심했다.

하긴. 정도전이 이대로 제 자랑을 끝낼 리는 없지 않은가.

“그곳에 똬리를 튼 백성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주공께서 내린 창칼을 손에 들게 될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나세 장군이 언월도를 딱 들고 주변을 경계할 것이니 누가 와서 횡포를 부리지도 못할 겁니다. 이것만은 아니지요. 수시로 하나부터 열까지 보살필 것이니 개경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개경 안에서 구축한 새로운 관점의 영지라고 할 수 있지요.”

“······.”

“귀족들이 발악하겠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도당의 중론이 아니겠습니까? 주공을 공격하려고 만든 자신들의 방법에 완전히 발이 걸려버린 거지요. 그야말로 자승자박이지요.”

“······.”

“뭐. 그들이 쌀을 내려고 한 것도 민심을 잡아보려는 것이겠지만, 구휼미는 주공의 상징이지요. 심지어 이번에는 집까지 내립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고로 귀족들의 생색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

“물론, 그들이 쌀을 내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래도 좋습니다. 그건 그대로 도당의 정치가 완전히 박살 나는 거니까요. 쌀을 내면 우리 손에 들어오는 거고, 내지 않으면 박살. 이처럼 기묘한 계책이 하늘 아래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냥 떠들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왕선과 남은, 나세, 마천목, 이옥은 먼 산을 쳐다보며 귀를 봉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끝이 없다.

왕선은 도저히 참다못해 말했다.

“남은.”

“예. 주공.”

“감축하네.”

“예?”

“오늘부터 자네가 제일 군사야.”

“오. 이 순간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주공.”

정도전이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남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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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휼미를 풀지 않을 명분이 없소. 허. 진퇴양난이라는 게 이런 거구려.”

최영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색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구휼미를 엉망으로 준비하려는 재상들이 있소.”

“그리되면 백성의 원망이 터질 거요.”

“예. 대감의 말대로 진퇴양난이오.”

두 사람은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이인임이 그립다오.”

“···이 사람도 그렇소.”

“적어도 그가 있던 고려는 질서가 유지되었거늘.”

“부패하고 탐욕스러웠던 이인임이었으나 고려의 전통을 이렇게 흔들어대지는 않았지요.”

“···목은 선생.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오. 우리의 정치력으로는 왕선을 감당하기가 어렵소.”

“평생 전장에서 살아온 대감이나 서책이나 읽은 이 사람이 그렇게 간사한 인사를 막아내기는 어렵지요.”

도저히 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왕선이 행하는 방책은 기존의 정치와는 완전하게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니까.

차라리 이인임이 상대하기 편했다.

놀라운 정치력이 펼쳐지긴 했으나 그의 정치는 이질적이지는 않았으니까.

“왕선의 제일 군사가 목은 선생의 제자라고 들었소.”

“삼봉을 이르시오?”

“그를 빼낸다면 왕선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외다.”

“삼봉은 종잡을 수 없는 인사라오. 아무리 이 사람과 사제 간이라고 하더라도 장담할 수 없소이다.”

“목은 선생의 제자가 어디 삼봉 밖에 없소이까. 최고의 제자가 있지 않소.”

“음. 포은이라면 삼봉을 설득할 수도 있을 거 같기는 하오.”

“바로 그거요. 또, 포은 정몽주라면 왕선과 정도전이 펼치는 해괴한 정치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외다.”

최영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그동안 보니 포은은 아직 정확한 입장을 정리한 게 아닌 거 같소.”

“포은은 제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오.”

“신념도 나라가 멀쩡해야 하오. 왕선이 그리는 고려는 고려가 아니외다. 목은 선생. 포은을 확실하게 설득해주시구려.”

정몽주가 확실하게 이편으로 선다면?

어쩌면 정도전도 데려올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이 있다면 왕선의 정치를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포은은 한 번도 이 사람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소이다. 좋은 소식 기다리시오.”

“목은 선생만 믿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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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의 생각이오?”

충격과 공포를 내린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도당회의였다.

오늘 오랜만에 소집되었길래 기쁜 마음으로 향하던 왕선의 귀에 들린 청아한 목소리.

정몽주였다.

맑게 웃으면서 답했다.

“이런 간사한 방책을 꺼낼 사람이 또 있겠소?”

“삼봉의 계책은 정말 놀랍소.”

“도당에서 포은 선생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어려웠소.”

“앉아서 세 치 혀를 움직이는 것과 이런 대계를 펼치는 건 다르지요.”

“거. 삼봉 선생 칭찬 그만하시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소. 그나저나 두 사람 요즘 술이라도 한 잔씩 하시오?”

“안 만난 지 좀 됐지요.”

“왜요?”

“굳이?”

“이런.”

“일단 들어가지요.”

어느새 도당이 눈에 보였다.

“갑시다.”

무척이나 기대가 컸다.

들뜬 마음으로 도당에 들어선 왕선은 최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헛웃음을 지으면서 곧장 이색을 쳐다봤다.

...미쳤네?

왕선은 비웃었다.

뭐. 그래. 정몽주가 재상 총재제의 구현을 함께 한다는 걸 아직 모르니까 이건 논외로 하더라도 정도전에게 손을 뻗으려고 하다니.

이거 그 결과가 무척이나 기대됐다.

이왕이면 이색이 직접 정도전에게 가서 박살 나면 좋겠다.

정도전에게 꼭 후기를 알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겠소.”

최영은 왕선을 경계하듯 슬쩍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최근 개경에 너무 많은 승려가 있소.”

우스웠다.

어찌 이렇게 미숙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왕선의 재가화상을 내치려는 거다.

사실 재가화상은 사찰의 호위병력이다. 그들은 사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바꿔말해서 왕선처럼 재가화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군웅은 아무도 없었다.

이건 왕선이 ‘미륵성하’ 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습니다. 당연히 많지요.”

“개경의 사찰에 적을 두지 않은 승려가 많소.”

“보시(布施)를 행하고 있겠지요.”

“보시(布施)하는 승려가 도끼를 들고 다니오?”

“세상이 뒤숭숭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왕선이 매사 따지자 최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켜보던 이색이 못마땅한 듯 나섰다.

“수시중 대감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수시중 대감의 말씀이 끝나면 나서시오.”

“그게 아니라 일을 순서대로 풀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이오.”

“개경에서 사병을 내치자고 도당에서 결의한 걸로 아오. 그런데 어째서 변화가 없소?”

그랬다가는 개경에 왕선의 병력만 남게 된다.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위장 상인.

도끼를 들고 돌아다니는 승려.

...그리고 신 영지에서 성장할 사병까지.

미치지 않은 이상 재상들이 사병을 개경 밖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도당의 결의 사안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는지라 적당하게 위장에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왕선이 사병을 상인으로 둔갑시킨 것처럼.

“차라리 사병을 대놓고 올리자고 새로운 안건을 제출하던가. 이게 뭡니까? 도당 모양새 빠지게.”

“대동군은 말을 삼가시오.”

“뭐. 좋습니다. 이대로 가지요. 은밀하고 위대하게?”

“이보시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시오.”

결국, 최영이 중재했다.

이색이 왕선에게 말리고 있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재가화상의 문제는 꺼낼 수도 없게 됐다.

고민했다. 이대로 도당회의를 이어가야 할까?

...그런데 준비한 내용은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괜히 끌고 가면 왕선의 세 치 혀에서 무슨 내용이 나올지 모른다.

최영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도 이대로 도당회의를 종결해야 했다.

그때

“수시중 대감.”

박위였다.

“말하게.”

“주상전하의 친정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묘한 침묵이 생겼다.

군왕의 친정.

일찍이 명덕태후의 수렴청정이 거론되었을 때 이성계와 이색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했다. 그만큼 왕우의 행보가 불안했고, 연륜 있는 명덕태후가 백배 낫다는 판단이 앞선 거다. 그러나 태후의 수렴청정은 일방적으로 왕선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불편함 그 자체였다.

“주상께서 충분히 친정할 수 있는 보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강안전을 들락거리더니?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시중 대감. 소직도 박위 장군의 말에 동의합니다.”

정지였다.

현 고려에서 가장 유력한 군웅은 5명이었다.

동북면의 이성계.

강원도와 경기도를 아우르는 최영.

전라도의 남부를 장악한 정지.

경상도를 좌지우지하는 박위.

그리고 왕선.

이들 중 정지와 박위가 친정을 주장한 것이다.

다섯 명 중에서 무려 두 명이다.

...아니구나.

“이 사람 역시 동의하네.”

최영까지. 총 세 명.

그걸 시작으로 대다수 군웅이 찬성하고 나섰다.

“그건 태후마마의 권한입니다만.”

“대동군 대감. 신하 된 도리로서 청하는 건 가능하오.”

“그 신하 된 도리를 처음부터 하지 그랬소이까. 박위 장군?”

“그러면 이 사람이 나서보겠소. 나 목은 이색은 처음부터 수렴청정에 반대했으니까.”

“그래요? 이거 하나만 분명하게 합시다. 이 사람은 이 안건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걸.”

“도당의 결의가 모였소.”

“그러니까 그렇게 청하더라도 나는 반대했다는 걸 분명하게 하는 거요.”

“도당의 중론이오. 태후마마께서 거부하실 수만은 없을 거요.”

“뭐. 그건 지켜보면 알 것이외다.”

“음. 나도 반대하오.”

최무선.

“나 역시. 친정은 시기상조요.”

문익점.

“소생도 반대합니다. 태후마마의 수렴청정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포은.”

“사부님. 저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송구합니다.”

“포은. 조만간 따로 보지.”

거. 그래 봤자 소용없다니까.

왕선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만 봤다.

“그러면 이 사람이 직접 태후전과 강안전에 친정을 청하겠소이다.”

최영의 목소리는 밝아졌다.

만일 친정이 이뤄진다면 왕선의 행보는 심각하게 제동이 걸릴 것이다.

지금까지 왕선의 굵직한 일은 모두 어명의 이름으로 이뤄졌으니까.

그런데

“음. 수시중 대감. 그거 아닙니다?”

“···무슨 말이오?”

“이 사람은 안 숨어요.”

최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아. 목은 선생.”

“이제라도 친정 요청 명단에 이름을 넣어달라는 말은 사양하오.”

“그게 아니라 삼봉을 만날 때는 꼭 직접 가시면 좋겠구려. 이걸 당부드리고 싶어서.”

이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몽주는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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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절호의 기회요.”

“그렇소. 한데, 포은과 삼봉을 아직 만나지 못한 거요?”

“송구하오. 하지만 포은과 만나기로 약조했소이다.”

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위와 정지를 쳐다봤다.

“자네들은 큰일 했네.”

“아닙니다. 더는 대동군의 괴이한 짓을 볼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한데, 강안전의 뜻인가?”

박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휴. 그러고 보니 주상을 알현한 지도 참으로 오래됐군. 불충일세. 불충이야.”

“주상께서는 항상 대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늙은이의 불충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지난 일입니다. 친정을 구현하기만 한다면 다 됩니다.”

“그래. 내일 당장 태후전을 찾아갈 것이네.”

“소직들도 따르겠습니다. 나머지 재상들도 모두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찬성하는 재상들이 모두 간다면 큰 힘이 될 것이야.”

“이 사람은 사대부를 규합하여 연좌와 상소를 준비하겠소.”

이색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포은을 설득하여 함께 한다면 사대부의 힘이 하늘을 찌를 것이외다.”

“목은 선생이 이처럼 나서주니 참으로 든든하오.”

그런데

“크, 큰일 났습니다.”

최영의 부관 임정유였다.

재상들은 불안함이 치솟았다.

“대, 대동군이 봉쇄령을 선언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봉쇄령이라니?”

“전라도와 충청도. 그러니까 외부에서 자신의 세력으로 통하는 상행위를 모두 차단한다고 합니다.”

“!!!”

최영과 박위, 정지, 이색의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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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술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면서 읊조렸다.

“이거 너무 싱겁잖아?”

“더 독한 술을 드릴까요?”

정도전을 흘겨봤다.

“군사. 시비 걸지 마시오.”

“싱겁다면서요?”

“돌아가는 판이 싱겁다고요. 술은 독하오.”

“겨우 이게 독하다고요?”

“됐고. 나중에 목은 선생 만나면 잘 해드리시오.”

“소생은 항상 사부님께 깍듯하지요.”

...저번에는 그냥 죽이자고 해놓고는.

< 110화 봉쇄령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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