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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08화 (108/187)

< 108화 선전포고 >

정도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저었다.

“미륵성하요?”

“어허.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차라리 궁예교 교주라고 하시지 그럽니까?”

“교주는 당신이고.”

“뭐라고요?”

“밀교 교주 삼봉 정도전. 아니오?”

“어처구니가 없군요.”

“앞으로는 깍듯하게 미륵성하라고 부르시구려.”

“어디서 그런 해괴망측한 명칭을 들으신 겁니까.”

“도솔천.”

“아. 진짜. 소생 반드시 그 도솔천 가볼 겁니다.”

“오. 삼봉 정도전이 유학을 포기하고 불교에 귀의한다고 선언한 것이오?”

정도전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요즘 계속 밀린다는 느낌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사실이다.

그래서 왕선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백달원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하인이 전한 말.

정도전은 콧잔등을 만지면서 물었다.

“백달원? 딱 부보상 같은 이름이군요.”

“오. 어찌 아셨소? 부보상의 우두머리라오.”

정도전은 헛웃음을 치면서 도끼눈을 떴다.

“남상에 서역 상인도 부족해서 부보상이요?”

“부보상의 정보력이 괜찮다고 해서.”

“밀교면 충분합니다.”

“부보상이 이성계와 아주 가깝다더군.”

아주 빠른 속도로 정도전의 도끼눈은 사라졌다.

“이거 아주 바람직하군요.”

“거. 카멜레온이오? 정말 순식간에 바뀌시오?”

“그 도솔천 내가 꼭 가보고 말 겁니다.”

“얼마든지 환영하오.”

“어쨌든 상단의 주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정치를 행하는 것. 맞습니까?”

“물론이오.”

“그러면 위치를 정확하게 일러줘야지요.”

“적절하오.”

왕선은 싱긋이 웃으면서 기다리던 하인을 쳐다봤다.

“바쁘니까 다음에 오라고 하게.”

“다음에는 오기 전에 기별을 하라고도 전하게.”

“내 허락을 받은 다음에 방문하면 더 바람직하다고 덧붙이고.”

“훌륭하십니다.”

“과찬이오. 이제 어디 가오?”

“나세 장군과 이옥 장군을 만나서 처리할 게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성계가 올 날이 머지않았군.”

“예. 확실하게 해둬야지요. 주공은 뭐할 겁니까.”

왕선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분 만나러 가야 하오.”

“큭. 냉수 시원하게 마시고 오십시오.”

“혹시 대신 갈 생각은 없소?”

“장담하지요. 소생이 가면 사지가 하나쯤은 잘려서 나올 겁니다.”

“아니지. 최영 대감이 속에 천불이 나서 기절할 거요.”

“확실한 건 촌각을 다투는 진검 승부가 펼쳐진다는 겁니다.”

“유혈사태를 방지하려면 결국 이 사람이 가야겠구려.”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알고 계시겠지만 아직은 최영 대감과 척을 지면 안 됩니다.”

“일 보시오.”

“주공.”

“나중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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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안 드십니까?”

평소라면 곧장 한입 크게 마시던 최영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움직임이 없다.

의아함이 가득한 왕선의 물음에도 최영은 무던한 표정을 지었다.

“이인임은 참 고약한 인사였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능력을 제 안위를 위해서 사용했으니까.”

“많이 힘드신가 보군요.”

“막상 집정 대신이 되어보니까 이인임이 얼마나 뛰어난 인사였는지 알게 되는구려.”

“원래 정치가 어려운 법이지요.”

“도당의 정치를 복원하는 건 이 사람의 능력 밖이라는 걸 깨달았소.”

평생 전장을 떠돌던 최영이다.

도당을 쥐락펴락했던 이인임 수준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작금의 고려는 유례없는 혼란의 시대가 아닌가.

안타깝게도 최영은 혼란을 조금도 잠재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최영이라는 이름은 무겁다.

그 이름값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군웅들을 도당에 모아놓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최영은 도당의 정치에서 작은 성과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뭔가 이상하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대동군이 집정 대신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다음에는?”

“열심히 해야지요.”

“그러면 그러시오.”

“용퇴하시려고요?”

“그럴 생각이외다.”

“개경에 계실 거죠?”

“낙향해야지.”

“안될 말씀입니다.”

최영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일찍이 낙향 의사를 밝힌 적이 있소. 그런데 이인임도 딱 대동군처럼 말하더군.”

“굳이 이인임과 그렇게 엮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감과 이인임은 다릅니다.”

“억지로 떼어낸다고 그게 가능하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인임과 최영

두 사람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작금의 군웅할거를 초래한 원흉이었다.

그런데 한 명은 유능한 권신이었고, 한 명은 무능한 충신이다.

그리고 한 명은 제법 능력 있는 장수였고, 한 명은 불세출의 무장이었다.

참으로 기묘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감이 개경을 벗어나는 순간 모든 군웅이 낙향할 겁니다. 그때부터는 생지옥이 열리는 거지요.”

“내가 다 때려잡으리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했습니다.”

“정치는 무능하지만 백전의 장수라오. 어차피 그럴 생각이 아니오?”

“그렇긴 하지만 그건 왕실의 존엄이 회복된 다음입니다. 어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제압할 수 있을 때 본보기로 삼는 수준으로 되는 거지요. 이 사람과 장군이 앞장서야 하고요. 그러니 그냥 그 자리에 앉아 계세요. 너무 부담스러우면 이 사람에게 넘기고 개경에 계시고요. 음. 후자가 더 아름답긴 합니다. 딱 깨 놓고 대감의 도당은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니까요.”

“그냥 다 때려잡으면 빠르오. 굳이 정치를 집어넣는 이유가 뭐요?”

“그렇게 다 때려잡으면 고려의 국력이 쇠할 겁니다.”

“외적은 걱정하시오?”

“아니지요. 북진을 걱정하는 거지요. 하긴 해야 하니까요.”

왕선을 지그시 쳐다보던 최영은 물그릇을 들어서 절반을 마셨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아주 다른 눈빛을 보였다.

...무척이나 사나운 눈빛. 바로 최영의 눈빛.

“그 북진에 홀려서 자네를 여기까지 데려왔네.”

“말은 똑바로 하십시오. 제가 제 발로 온 겁니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 그래. 묻겠네. 자네가 말한 북진은 과연 진심일까?”

“북진. 북진. 입으로 하는 북진은 500년 동안 했습니다. 왜 입으로만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힘이 없으니까. 북진하려면 힘을 키워야지요. 저는 힘을 키우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감은 힘을 키울 방법을 다 틀어막으면서 북진을 품고 있지요. 그건 기만이지요. 아시겠습니까? 대감은 북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뭐라?”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지요. 회암사 감찰을 반려했을 때 대감은 북진의 대업에서 이탈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질문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나 최영. 평생 청렴결백하게 이 나라 고려를 위해서 살았다고 자부하네. 한데, 자격이 없다?”

“고려에 대한 대감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리고 우습군요. 청렴결백하면 백만대군이 하늘에서 내려진답니까? 지난 500년은 더럽고 썩어서 북진 못 했답니까?”

“도당을 엎겠다고 했다지?”

“이런. 목은 선생이 여기까지 와서 고자질을 했나 보군요.”

“나라 전체와 싸울 생각인가?”

가끔 상상해봤다.

만일 최영이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렇게 정몽주 등이 주도하는 고려의 자생적인 개혁이 이뤄졌다면?

과전법을 집행하고 사병을 혁파하는 개혁이 조선 창업이라는 역사의 변곡점이 아니라 새로운 내일을 그리며 천년을 기약하는 고려에서 이루어졌다면?

...만일 그랬다면 최영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개혁에 동참했을까? 아니면 반대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궁금증의 답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저도 사람인지라 계속 싸우면 버겁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적당히 싸우다가 치우려고 하니까 그게 안 됩니다. 왜? 이 나라는 멀쩡한 게 없거든요. 백성의 정신을 지배하는 불교는 불에 태워버려야 할 만큼 썩었고, 권문세족은 그 잘난 혈통을 뽑아버려야 할 만큼 미쳤고, 지주는 땅에 묻어버려야 할 정도로 탐욕스럽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왕실을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한 사병의 규모는 또 어떻습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 전체와 싸우는 건 아닙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작자들. 500년 거목에 붙어서 고혈을 뽑아먹는 벌레들과 싸우는 거지요.”

“이 나라의 역사가 자네에게는 청산의 대상으로만 보이는가?”

“물론입니다. 보면 알지 않습니까.”

“만일 내가 반대한다면?”

“희한하군요. 대감은 벌써 반대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우리의 길은 달라졌습니다.”

“기어이 해보겠다는 건가?”

“예. 다 뜯어낼 겁니다. 딱 하나만 남기고요.”

“딱 하나?”

“예.”

“뭔가.”

“이 나라의 국호.”

최영은 몸을 뒤로 젖히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낙향. 취소하지.”

“할 생각 없었던 거 압니다.”

“자네가 내 생각보다 위험한 거 같아서.”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위험한 거 같은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위험한 겁니다.”

최영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궁금증의 답은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래. 최영은 고려의 충신이다.

고려의 명운이 걸린 기로에서 그는 백번이라도 목숨을 던질 것이다. 고려를 지키고자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기득권을 포기하며 세상을 바로 잡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난세의 충신이지만, 평시에는 싸움 잘하는 기득권에 불과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 맞다. 그는 이인임과 손을 잡았던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면 최영은 대체 어떤 고려에 충성한 걸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왕선은 미련 없이 시원하게 물그릇을 들어서 마셨다.

“미리 말씀드리지요. 대감의 광활한 토지와 수천의 사병. 모두 왕실에 귀속시킬 겁니다.”

“그건 정치가 아니라 싸움. 안정이 아니라 난세. 개혁이 아니라 폭정이지.”

“과거 광종께서 개혁을 이루실 때 반대한 무리가 딱 그 말을 했습니다. 대감의 입에서 들으니 뭐. 새롭지는 않군요. 예상했던 거라서요.”

“물 다 마신 거 같은데?”

“아. 몇 방울 남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약간의 기대는 했습니다. 대감이라면 이 길에 동참하실 수는 있다고 말입니다.”

“자네가 가는 길은 고려가 아닐세.”

“당신들의 고려가 아니겠지요.”

“썩 나가게.”

“배웅은 안 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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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눈을 껌뻑였다.

“···그러니까 선전포고를 하셨다고요?”

“그렇소.”

“강안전도 적이고, 이성계도 적이고, 도당도 적이고, 최영 대감도 적이네요?”

“그냥 다 적이오.”

정도전은 아주 크게 감탄했다.

“진정 싸움닭이시군요. 소생은 이름도 못 내밀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이럴 거면 그냥 역성의 대업에 올라타시지 그럽니까?”

“아. 역성의 말이 아직도 달리고 있었소?”

“아주 잘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왕 되면 역성이 아니지. 동성이지. 하하하.”

정도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왕선은 재빨리 먼 산을 쳐다봤다.

“지금 그걸 농이라고 하십니까? 역성을 해도 이렇게는 못합니다.”

“음. 군사. 진정하시오.”

“아. 잠시만요.”

“왜 그러오.”

“잠시. 잠시만요.”

“······.”

“다른 곳에 군사 자리가 남았는지 잠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없소. 설령 있더라도 당신이 가면 잘도 받아 주겠소. 분탕질하러 온 간자라고 생각하지.”

“이놈의 팔자는 정말 복잡하군요.”

“적당히 하시오. 지금 기분 좋은 거 아오.”

정도전은 콧잔등을 만졌다.

“티 납니까?”

“아주 많이.”

“음. 사실 주공께서 판 키우는 거 싫어하시는 거 같아서 참고 있었지요.”

“보시오. 불판 갈아엎으려고 하는데 탄 고기가 몇 점 붙어 있소. 먹을 거요?”

“뭐하러 그걸 먹습니까? 멀쩡한 고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지. 탄 고기 먹으면 몸 상하오. 그런데 탄 고기 버릴 거요?”

“그건 또 아깝지요.”

“그러면?”

“키우는 개한테 주는 건 어떻습니까.”

왕선은 무릎을 '탁' 쳤다.

“딱 그거요.”

“기가 막히지요.”

왕선은 고개를 뒤틀면서 턱을 괴었다.

“지금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적을 말살하겠소.”

정도전은 양 손바닥을 비벼댔다.

아주 기분 좋을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지금까지 그 명령만 기다렸습니다.”

< 108화 선전포고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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