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미륵성하와 동방의 성지 >
앞선 시대를 살아간 현자들이 그랬다.
침묵은 말보다 더 큰 힘을 낸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들어주는 사람이 좋다고.
이렇게 항상 세 치 혀를 조심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단서는 존재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
이렇듯 때로는 세 치 혀가 위력을 발휘할 때도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in shā΄ Allāh? (인샬라?)”
왕선의 입에서 나온 이 기묘한 단어는 서역 상인들의 몸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다소 미지근한 분위기와 심드렁한 표정으로 벽란도를 살피던 서역 상인의 눈에는 호감과 흥미를 넘어서 열광과 신뢰가 굳건하게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건 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대권을 목전에 둔 정치인이 바로 왕선이다.
이슬람 국가를 방문하여 그들의 문화를 접할 기회는 많았다.
오늘 바로 이곳에서 그때의 경험과 지혜를 유감없이 소환할 생각이었다.
왕선은 경건한 자세를 취하며 서찰을 내밀었다.
[알라(الله)]
“!!!”
“!!!”
서찰을 받아든 서역 상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몇 안 되는 징표.
바로 그것을 왕선이 꺼낸 것이다.
머나먼 동방의 나라 고려 땅에서 이를 접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서역 상인들의 정신세계는 쉽게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고려에 온 걸 환영합니다. 무슬림이여.”
왕선은 양손을 내밀면서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라-일라-하, 일라-알라, 무하마앗-둔 라술-라-알라(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
“!!!”
대경실색한 서역 상인들.
그럴수록 왕선의 미소는 진해졌다.
그렇게 서역 상인들과의 첫 만남은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벽란도의 인상 깊은 첫날을 보낸 서역 상인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준비한 걸 본 그들은 껌뻑이면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대감께서 여러분들이 얼굴과 손발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셨소. 음. 이를 우두라고 하셨는데 맞소?”
고려 역관의 말을 들은 중원 역관의 통역을 들은 상인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랬다. 지금은 하루 다섯 번(해 뜨기 전, 정오, 오후, 해가 진 후, 자기 전) 메카를 향해서 절하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인 살라트(Salat)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어제부터 진심으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왕선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하늘을 찔러댔다.
그리고 그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본 백거마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대감.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알고 있으니 조금 더 이 사람 얼굴에 금칠하게.”
“예? 하하하. 이런. 이 미천한 놈은 대감의 입담을 도저히 못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더 분발하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속성 과외받아보겠나?”
“속성 과외요?”
“아. 최대한 빠른시간에 제대로 배우는 거. 유능한 선생이 가르칠 것이네.”
“대감의 높은 언어유희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해보겠습니다.”
백거마는 거상답게 혀가 참으로 잘 굴러갔다.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삼봉 선생을 보내주겠네.”
“···대감.”
“응? 왜 그러나?”
“차라리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그 정도인가?”
“삼봉 선생의 악명은 전라도를 넘어서 개경에 이르렀으며 조만간 고려를 흔들고 천하를 덮을 겁니다.”
“토시 하나 안 빼고 그대로 전해주겠네.”
“지금 당장 그냥 죽이십시오.”
“하하하. 농일세. 그나저나 상인들과 식사 자리를 가져야지?”
“그렇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했습니다.”
“오. 혹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돼지고기 같은 걸 준비한 거 아니겠지?”
“과연 대감이십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연회에 돼지고기만 한 건 없지요. 이를 분위기 파악하지 못한 거라고 하시다니. 대감의 반어법은 언제 들어도 놀랍습니다.”
“···자네 미쳤나?”
“예?”
“내가 무조건 소 잡으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 돼지고기 치워!”
“예?”
“거래를 말아먹고 싶지 않으면 돼지고기 당장 치우라고 했네!”
“아, 알겠습니다.”
왕선이 전례없이 노발대발하자 백거마는 황급히 달려갔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일단 왕선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백거마는 참으로 절묘한 순간에 도착했다.
준비된 연회장에 발을 들이밀자 돼지고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헐떡이면서 황급히 외쳤다.
“다, 당장 치우게!”
“예?”
“거래를 말아먹고 싶지 않으면 돼지고기 당장 치우라고 했네!”
“맛있고 신성한 돼지고기를 안 먹고 거래를 왜 말아 먹습니까?”
“이 사람들이!”
“그러면 이 고기는?”
“자네들이 먹고.”
“연회장에는요?”
“소 한 마리 잡게.”
“갑자기 소를 어디서 잡아 옵니까.”
“이 사람들이! 당장 잡아 오게!”
“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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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참으로 성대한 연회였습니다. 대감께서 이렇게 반겨주시니 너무나도 기쁩니다.”
서역 상인들은 넉넉하게 웃으면서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신뢰가 넘쳐 흘렀다.
왕선은 손을 내저으면서 적절하게 대꾸했다.
“별말씀을.”
“한데, 어떻게 우리의 풍습을 이렇게 잘 알고 있습니까.”
“그건 적절한 자리에서 말해주겠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대감. 들어보니 개경에서 큰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허. 벌써 소문이 서역까지 전해진 건가?”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벽란도에서 이런저런 말을 들은 겁니다.”
“내부적인 문제가 있긴 했는데 잘 정리됐네.”
“그렇습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서역 상단의 대표 신밧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왕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나라의 도성에 난리가 났다면 안정적인 거래가 어려운데.
그리고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 다른 상인들도 쳐다봤다.
-고려가 혼란에 빠졌다는 소문이 사실이긴 하구나.
-이들의 대표가 우리의 풍습을 잘 알고 있어서 참으로 마음에 들긴 하지만.
첫인상 잘 심었다.
밥도 맛있게 먹이고.
그런데 역시 고려의 어지러운 정세가 상인의 발목을 잡았다.
...이럴 때는 상인의 목적의식을 뛰어넘는 정체성을 잡아 흔드는 게 답이다.
일단 낚싯줄에 미끼를 걸어보자.
“실은 얼마 전에 개경에서 마군이가 창궐했었네.”
“예? 마군이라니요?”
“잘 듣게. 지금 이 나라 고려는 분명 혼란기야. 하지만 그건 올바른 조세를 내지 않는 무리가 많기 때문이지. 자네들은 지즈야(jizyah)를 내지 않으면 어찌하나.”
지즈야(jizyah)까지 언급됐다.
서역 상인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지즈야(jizyah)는 이교도라면 반드시 내야 하는 조세입니다. 만일 내지 않으면 엄하게 벌해야지요.”
“바로 그거일세. 굳이 비유하자면 이 나라는 지즈야(jizyah)를 내지 않으려는 무리가 있어. 얼마 전에 개경에서 발생한 사태는 바로 그들을 벌한 것일세.”
“허. 그러면 마군이라는 건?”
“그렇지. 바로 그거일세.”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다. 신밧다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제대로 미끼를 문 것이다.
왕선은 좌우를 살피는 시늉을 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바로 이 땅에서 바로 그 마군이를 모두 없고자 하네.”
“그 말씀은···.”
“성전.”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하드(jihād)”
“!!!”
신밧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센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낚싯줄을 잡아당길 차례다.
“자네들이 도와줄 수 있겠나?”
“진정 대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나는 이 땅에서 마군이를 몰아내는 지하드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이지.”
“그게 무슨···.”
“아. 살라트를 행할 시간이 아닌가?”
신밧다의 눈이 다시 커졌다.
또 다시 한번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왕선은 경건하게 말을 이었다.
“할 건 해야지. 우리의 대화는 그다음에 하지.”
“···알겠습니다.”
“아. 융단을 잘 깔아뒀네. 편히 의식을 치르게.”
“···감사합니다.”
예배를 마친 신밧다의 표정은 복잡했다.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단지 장사할 상대로만 봐서 아니 된다.
보아하니 살라트를 마친 뒤 자기들끼 논의를 한 모양이다.
이거 물고기가 낚시줄에 매달려서 꼬리를 찰랑찰랑 흔들고 있지 않은가.
왕선은 기분이 좋았다.
“대감.”
“말하게.”
“고려와 무역을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환영하는 바이네.”
“그러나 대감과 하고 싶습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건가.”
“이런. 그나저나 대감을 어찌 불러야 하겠습니까?”
“대감이라는 호칭이 별로인가?”
“대감은 많습니다. 하지만, 대감 같은 대감은 없습니다.”
...이건 무슨 말이야.
그러나 신밧다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중하다.
“알라신을 알고 가르침도 아는 대감입니다. 천하에 유일한 대감인데 어찌 흔하디흔한 대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겠습니까.”
“음. 그것도 그렇군.”
이거 꼬리를 찰랑찰랑 흔들어대던 물고기가 알아서 망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흡족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고심하던 왕선은 적절한 단어가 떠올랐다.
“미륵성하.”
신밧드는 이번에도 놀란 표정이...아니라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미...륵성하?”
“이 땅에서 마군이와 싸우는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들이 나를 지칭하는 말일세.”
“어디선가 들어보기도 한 거 같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겠다.
곧장 논지를 흐렸다.
“인샬라.”
“오. 인샬라.”
“그렇지. 그런데 어디서 들어 본 게 중요한가?”
“아닙니다.”
“좋아. 그러면 어떤가. 지하드에 힘을 실어주기로 한 거 맞나?”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망에 들어간 물고기가 참으로 먹음직스럽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이슬람 세력과 무역을 한다?
이는 대외 무역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 상단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기회다.
말 그대로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천운이다.
“일단 대전제부터 정하지. 어떤가. 나는 자네들이 직접 배를 이끌고 바다로 오길 바라는데.”
명나라는 강력한 해금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서역 상인들이 명을 통해서 오게 된다면 다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는 짓이 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명나라만 좋은 짓 하는 거다.
이를 방지하려면 확실하게 직접 접할 수 있는 해상 무역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왕선에 대한 신뢰도가 하늘을 뚫었다.
상인의 가죽 아래 흐르는 종교의 피가 거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벽란도로 오겠습니다.”
왕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세. 이 땅에 마군이가 감히 범하지 못하는 성지가 있다네.”
“그런 곳이 있습니까?”
“전주일세.”
“오. 전주라. 이름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이군. 임피 포구를 거친다면 전주로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네. 모든 준비를 해둘 것이니 양손 무겁게 방문하시게.”
“우리도 성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적절하군.”
“오!”
옆에 있던 백거마였다.
서역 상인과 직무역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과 거래하는 곳을 벽란도가 아니라 남상의 안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임피에서 진행한다고 하지 않은가?
해서,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른 거다.
왕선은 실소를 머금으면서 그를 슬쩍 쳐다봤다.
백거마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네 차례일세.”
이제부터는 세부사항을 정리해야 한다. 이건 왕선이 아니라 상단을 이끄는 백거마가 나서야 한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나섰다.
“늦게 인사드리오. 나는 미륵 성하를 가장 가까이 보좌하는 백거마라고 하오.”
미륵성하의 최측이라고 한다.
신밧다는 정중하게 답했다.
“신밧다라고 하오.”
“마군이를 몰아내기 위한 지하드에 함께 해주셔서 아주 감사하오.”
...아주 혀가 신들린 듯 돌아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약간의 이견은 있었으나 대승적인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기에 아주 순탄하게 진행됐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합의는 끝났다.
지켜보던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신밧다의 손을 잡았다.
“인샬라.”
“인샬라.”
“옴마니 반메홈.”
생소한 내용.
신밧다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자주 놀라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인샬라.”
“인샬라.”
“옴마니 반메홈.”
“오, 옴마니 반메홈?”
“그렇지. 이제 저 하늘의 태양은 오직 우리를 비출 것이네.”
그리고
“동방의 성지에 온 걸 다시 한번 더 환영하네.”
오늘 고려는 또 다른 대륙을 품에 안았다.
아니, 미륵성하 왕선이 안았다.
< 107화 미륵성하와 동방의 성지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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