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뜻밖의 손님 >
왕선은 곱씹으면서 물었다.
“백달원이라고 했나?”
“예. 그는 부보상의 우두머리입니다.”
“자네 말은 백달원을 포섭하지 않으면 고려 상권을 장악하기 어렵다는 말이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음. 남상만으로는 어렵나?”
“고려 전역을 아우르는 유일한 상인 집단이 부보상입니다. 만일 남상이 전라도를 벗어나 전국 상단으로 거듭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필연적으로 그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소인은 승산을 자신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면밀하게 셈을 해본 결과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좋습니다.”
백달원의 포섭 여부를 떠나서 지금 보이는 백거마의 결심은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백달원이라는 거상의 존재는 고려 상계를 거머쥐려는 백거마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하다. 그런데도 지금 부보상의 우두머리를 품자고 제안하는 모습은 그의 고민이 얼마나 진취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음.”
“무엇보다도 백달원을 끌어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들어봐도 되겠나?”
“백달원은 이성계 장군과 가깝습니다.”
“뭐?”
“부보상의 광범위한 활동 범위를 통해서 수집되는 정보가 이성계 장군에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전라도에서 쟁투를 벌일 때 부보상이 활약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남상의 상행위를 활성화하여 부보상을 뜻대로 움직이게 한 거지 완벽하게 좌지우지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그들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부보상의 힘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 전라도의 전투에서 수차례 검증됐다.
왕선의 정보조직 밀교가 질적으로 뛰어난 정보를 가져왔다면, 부보상은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많은 양의 정보를 수집하는 집단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만일 부보상의 우두머리인 백달원이 조직적으로 행동하면 상당히 불편한 일이 생기게 된다. 심지어 이성계와 확실하게 결탁하여 움직인다면?
...불편한 정도가 아닐 것이다.
“방편을 마련해봐야겠군.”
“소인은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게. 그나저나 다른 문제는 없나?”
“작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감께서 이르신 투자정책을 상단에 제안하고 있습니다.”
“투자해서 먹으려고?”
“그건 그때 가서 봐야지요.”
“뭐. 그건 알아서 하게.”
“예. 결론은 순탄합니다.”
“훌륭하군.”
백거마가 물러난 뒤 뜻밖의 사람이 방문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분이 찾아오셨구려.”
“······.”
“목은 대감께서 이 누추한 곳은 어찌 오셨소?”
...그랬다. 방문객은 고려의 유종 이색이었다.
“대감.”
“아. 차라도 한 잔 내오라고 하겠소.”
“괜찮소.”
“그래도 손님을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소.”
“이 사람은 대감과 한가하게 차나 마시러 온 게 아니오.”
“거. 말은 똑바로 합시다. 누가 목은 선생과 차를 마시면서 풍류를 논하고 싶다고 했소이까? 우리 제일 군사의 사부이시니 최소한의 대접은 해야 이 사람이 면이 사니까 그런 거요. 차를 마시고 안 마시고는 목은 대감이 알아서 하시고, 일단 내오기는 해야겠소이다.”
“······.”
그렇게 끊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하인이 차를 가져오면서 다시 이어졌다.
“그래. 어쩐 일이시오?”
“이 사람은 도당의 정치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거. 도당의 정치력이 형편없다고 목은 대감이 직접 말했소만?”
“되살리면 될 일이오.”
“판이 썩었는데 어찌 되살리오? 갈아 치워야지.”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도당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했다.
이색의 눈에는 동요가 찾아왔다.
최영은 정치력의 부재로 인해서 그 위상이 땅에 떨어 진지 오래다.
최영 정권이 시작된 이후 고려 도당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게 그 증거다.
사상 초유의 군웅할거라는 난세. 이를 핑계 삼아 어쩔 수 없다고 애써 변명할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어쩔 수 없이 왕선의 정치력을 주목하게 했다. 즉, 이 혼탁한 세상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조정의 정치가 복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일이다. 이건 동시에 정치인 최영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키웠으며, 그것은 지금 현재 도당의 최고 실력자로 왕선이 부상하게 했다.
그래서 이색이 불편한 관계임에도 왕선을 찾아온 것이다.
“대감. 왜 있는 탑을 무너뜨리려고 하시오.”
“바람에 흔들리는 탑은 알아서 무너지기 마련이오.”
“잘 보수하면 되오.”
“보수하는 비용과 시간보다 새로 쌓는 것이 비용도 절감되고 시간도 단축되오. 무엇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탑을 부여잡고 있다가 무너지면? 탑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깔려 죽지 않겠소? 이 사람은 그 아슬아슬한 현장을 더 지켜볼 수가 없소이다.”
“기어이 독불장군처럼 하시겠다는 거요?”
“까치가 둥지를 틀면 사람들은 좋아하오. 널리 길조로 인식된 새라서 복이 올 거라고 믿는 거지. 한데, 불길하고 흉물스러운 올빼미가 그 둥지를 종종 뺏어서 자기 살림을 차린다오. 오랫동안 올빼미 울음소리를 들으면 재앙이 생긴다고 믿을 정도로 나쁜 새로 알려진 그 올빼미가 말이외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슬퍼한다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부분 수정.
“그런데 그거 아시오? 이 까치가 알고 보니까 농사를 방해하는 나쁜 짐승이더라 이거요. 뭐처럼? 지금 도당처럼 말이외다. 그러면? 올빼미가 잘한 거지. 누구처럼? 이 사람처럼.”
“올빼미는 제 부모를 잡아먹는 패륜을 저지르는 날짐승이오. 이 나라의 정치는 도당에서 이뤄져야 하오. 이를 엎으려는 대감의 작태가 올빼미의 그것과 같소.”
“나 부모님 돌아가셨소.”
“도당을 잡아먹고 왕실을 잡아먹으려는 거요?.”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뭐요?”
“거. 일전에 왜 조민수와 지용기만 역적이 되었는지 아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제자 잘 둬서 좋겠다는 말이외다.”
“······.”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참을까요?”
“지금 나를 겁박하는 거요?”
왕선은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했다.
“역시 고려의 유종. 말을 잘 알아듣는군요.”
“참으로 오만하오.”
이색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말했다.
“요즘 강안전이 손님 받느라고 좀 바쁜 모양이구려.”
“무, 무슨 말이오?”
“그 손님이 여기도 와있길래 한 말이외다.”
“!!!”
“차 식었구려?”
축객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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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박위와 정지라.”
“결과를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만일, 강안전의 뜻대로 된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아. 포기하지 않는 남자.
그대 이름은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서 슬픈 ‘우’
왕선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딱 깨 놓고 전주의 전력으로 두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음. 그냥 어려운 정도로 하지.”
“불가능합니다.”
“거. 자네도 삼봉 선생 닮아가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심하게 하십니까. 소생 낙향하겠습니다.”
“이런. 이 사람이 큰 실언을 했네. 미안하네.”
“소생을 욕하고 때리셔도 되지만 그것만은 자제해주십시오.”
“진심으로 사죄함세.”
“믿겠습니다.”
남은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숨을 연거푸 내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개경 안에 아군의 무장 병력이 천여 명 정도 됩니다.”
“재가화상과 사병을 포함해서겠지?”
“예. 그 수는 다른 재상의 사병보다 많습니다.”
“나세 장군이 잘 예술적으로 준비하긴 했지.”
“이성계를 목표로 한 거니까요. 어쨌거나 다른 군웅들이 추가로 사병을 불러오려고 해도 쉽지는 않습니다. 이건 아군이 유리한 부분이지요.”
남은은 여러 서류를 복잡하게 들추면서 말을 이었다.
“작금의 사정은 아주 복잡합니다. 조민수와 지용기가 몰락하자 군웅들은 제 거점을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개경에 사병을 마음 편히 못 보내겠지. 내가 뒤통수 칠까 봐.”
“또한, 자기들끼리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상 도당의 정치가 실패했다는 게 증명됐으니까요.”
“도당에서 이탈하면 환영이지. 알아서 판을 엎어 주는 건데.”
“엎긴 엎는데 옆에서 고기도 엎어지니까 문제지요.”
“그렇기도 하지. 그리고 하나 더. 어쨌거나 집정대신인 최영 대감이 대놓고 우리를 적대하지는 않아. 이것도 중요하지.”
“음. 그분 요즘에 고민이 많아 보입니다. 며칠째 장고에 돌입했는데 주공께서 만나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최영 대감이 마음을 요상하게 먹으면 판이 복잡해집니다.”
“복잡해지거나 말거나. 엎어버릴 건데.”
“그래도 쉽게 엎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최영을 만날 생각하니까 벌써 머리가 아파졌다.
그리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일전에 도당에서 본 정치인 최영이 아니라 장수 최영의 모습은 정말 전율스러웠으니까.
“아. 동북면의 정세는?”
“괜히 상승불패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나가나?”
“예.”
“이거 서둘러야겠군.”
짓궂게 웃었다.
“상승 불패의 명장께서 개경에 왔을 때 공기가 아주 달라진 걸 느끼게 해줘야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전주에 사람을 보내게.”
“예.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제대로 모략질 해보자고.”
“정략입니다.”
“고생하게.”
“끙.”
“아. 이원계 장군에게 약 좀 쳐두게.”
“···독살하라고요?”
“작업 좀 해두라는 말일세.”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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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마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왕선은 조금 장난을 쳐주기로 했다.
“왜 그러나?”
“겨, 경사입니다.”
“왜? 벽란도에 서역 상인이라도 왔던가?”
“어, 어찌 아셨습니까?”
“관심법으로 자네 속을 들여봤네.”
“아. 네.”
“···상당히 아니꼬워 보이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고려는 중원에 있는 나라와 무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서역의 물품이 유입됐기 때문에 직접 교역이 성행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심화한 불안정한 대륙의 정세는 서역 상인들이 험난한 바다를 건너서 직접 고려와 무역하는 게 큰 실익을 남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과거 방문했던 서역 상단의 규모 역시 100명 전후에 불과했는데, 그 수는 갈수록 줄었고 독자적인 무역보다는 중원의 상단과 함께 오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와 서역의 무역은 멈췄다.
그만큼 그들이 직접 벽란도로 오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지금처럼 명나라가 해금 정책을 펼친 시기에 고려 상단으로서는 서역 상인의 직접 방문은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다.
백거마가 이처럼 흥분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모처럼 서역 상인이 오는 건데 잘해봐야겠지?”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벽란도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냥 돌아갈 겁니다.”
“돌아가기만 하겠나. 다시는 안 오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이지. 그러니까 잘 해보자는 걸세.”
거침없는 왕선의 태도.
백거마는 어떤 기대감이 생겼다.
“혹시 괜찮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물론이지.”
“과연 대감이십니다.”
“됐고. 벽란도로 가지.”
“허. 직접 가실 겁니까?”
“당연하지. 직접 가야 해.”
지체하지 않고 당장 벽란도로 이동했다.
고려인에게는 다소 낯설고 기이하게 생긴 무리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서역인이다.
“흡.”
평소 진중한 성격의 백거마 답지 않게 굉장히 긴장한 상태.
왕선의 그의 표정에서 거대한 환희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 꼭 성공해야 할 거 같다는 압박감도 생겼다.
“대감.”
“그거 아나? 외국 나가서 태극기 보면 무척 기분이 좋아지고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그런다네.”
“예?”
“애국가 들으면 없던 애국심도 생기고.”
“예?”
“잘 보라고.”
“대, 대감.”
왕선은 대꾸하지 않고 거침없이 걸었다.
서역 상인들은 다가오는 왕선을 대수롭지 않게 쳐다봤다.
보나 마나 고려의 상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의 입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말이 나왔다.
“in shā΄ Allāh? (인샬라?)”
서역 상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106화 뜻밖의 손님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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