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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05화 (105/187)

< 105화 대한민국의 정치인 >

조민수와 지용기는 좌불안석이었다.

모든 재상이 두 사람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건 감정적인 시선에 불과했다.

이 엄중한 정세에서 이성은 두 사람을 매몰차게 버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선이 도당에 들어왔다.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는데 이를 즐기듯 흡족하게 웃었다.

“오늘은 이 나라 고려의 왕실과 어명이 제대로 서는 날입니다.”

왕선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을 아직 도당에 앉아 있을 수 있게 해준 최후의 보루 충주와 창녕에 함락된 것이다.

군웅할거의 시대에서 거점을 상실한 군웅은 아무런 힘도 내지 못한다. 비참하게 도태될 뿐이다.

조민수와 지용기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손발을 덜덜 떨면서 황급히 좌우를 살폈다.

혹시라도 구제해줄 사람이 있을지 찾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국에 굳이 나설 사람은 없다.

“수시중 대감.”

마침내 왕선의 입에서

“역적 조민수와 지용기를 벌하시지요.”

최종 선언이 내려졌다.

따르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조민수와 지용기는 발악했으나 모두 시선을 피했다.

오직 비릿한 웃음을 한 왕선만 두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재상들은 점차 왕선이 두려워졌다.

이 나라 최고 옥토를 장악한 군웅.

전체 판을 흔들 정도로 뛰어난 안목과 치밀한 정략.

...이런 것이 두려움의 원인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했던 그 어떤 정객도 보이지 않았던 수단.

여태껏 펼쳐졌던 정략과는 궤를 달리하는 수단.

즉, 민심을 좌지우지하는 왕선 만의 능력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평생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길목에서 생각도 하지 못한 방법이 괴물처럼 등장한 것이다.

원래 밀교는 정보조직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교주는 정도전이었으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남은이 지도했다.

한글이라는 최고의 언어를 사용하는 정보조직.

모략질의 대가가 진두지휘하는 정보조직.

이 나라 최고의 지재를 가진 사람 중 한 명이 수장으로 있는 정보조직.

이 자체만으로도 밀교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전과 선동.

그러니까 대중사기술에 능한 사람이 밀교를 정보조직 이상의 활약을 하게 만든 것이다. 바로 왕선이라는 사람.

그랬다. 왕선은 이 시대 그 어떤 사람보다 민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또, 그 누구보다 민심의 폭발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다시 증명됐다.

조민수와 지용기를 편들던 민심이 순식간에 돌아선 것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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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과했소.”

“이 사람을 보자고 하길래 잔소리할 거 같았소.”

“백성들이 조민수와 지용기를 살려달라게 할 필요는 없었을 건데.”

“응?”

왕선은 조금 당황했다.

분명히 금상을 걸고넘어진 일로 한소리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포은 선생?”

“금상의 권위는 다시 세우면 되오. 이번에 대감이 어명의 위력에 불씨를 지폈으니 가능성은 열렸소. 이 사람은 그걸 더 중요하게 여긴다오.”

“역시 포은 선생은 보는 안목이 남다르오.”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외다. 어쨌거나 이번에 정말 놀랐소. 민심을 이렇게 사용하는 정략...협잡은 처음 봤소이다. 군웅할거를 지탱하는 도당의 중론을 순식간에 와해시키다니. 그것도 민란이 아니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백성의 입으로 말이외다.”

“거. 너무 대놓고 협잡이라고 하는 거 아니오? 그리고 원래 민심이 제일 무서운 거요. 관념적으로 민심은 천심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틀린 거고. 민심은 천심이 아니라 창칼이외다.”

“민심은 창칼이라. 이 사람이 과거에 그 말을 들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구려. 그리고 협잡이 아니면 뭐라고 하오?”

“선전과 선동? 뭐. 이 정도가 적당하겠구려.”

“아무렇게나 부르면 어떻소. 사실 이 사람의 정치에는 연좌와 상소가 최고 수단이었는데 이번에 정말 놀랐소이다. 처음 봤소.”

당신들이 하는 연좌와 상소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말장난이고.

수천 명이 넘는 백성이 집결해서 외친다? 이건 어지간한 민란이나 반란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대체 비결이 뭐요?”

민심으로 선출되는 정치인을 해보면 자연스레 늘게 되는 거.

그러니까 작금의 정치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거다.

무엇보다 심지어 이 시대 민심은 아주 먼 훗날 이 땅의 민심과는 또 결이 다르다. 정확하게 수준이 다르다.

...대한민국 정치의 정점에 올라가서 권좌를 눈앞에 뒀던 입장에서 지금 시대의 민심을 좌지우지하는 건 솔직히 좀 쉬웠다.

잠시 상념에 잠긴 왕선을 보면서 정몽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대감.”

“왜 그러시오.”

“이 나라의 무게를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포은 선생.”

“조금 길이 다르지만, 최영 장군도 있고, 부족하지만 이 사람도 있소.”

이건 무엇이었을까?

고려라는 나라를 품에 안고 장렬하게 죽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서 그랬을까?

뭔가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일까?

왕선의 입가에는 그냥 편안한 미소가 생겼다.

“그리고 이 장군도 있고요.”

...편안한 미소가 조금 썩었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최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성계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런 말을 당장 할 수는 없다.

정도전은 철저하게 군웅의 제일 군사로서 모든 일에 임하고 있으나, 정몽주는 고려의 조정의 재상으로서 군웅할거를 정리하려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재상 총재제로 같은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데 괜히 물먹고 간식 먹는 시간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다.

그래도 영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논제를 바로 원점으로 돌렸다.

“민심을 정리해야겠지요?”

“···최영 대감은 통제를 하려고 할 거요.”

“아이고. 그런 옛날 방식을 쓰면 큰일 나오. 새 시대에 걸맞은 아름다운 방법을 써야지요.”

“가끔 보면 정말 말을 재미나게 하시오. 어쨌거나 그런 아름다운 방법이 있소?”

“물론 이외다. 뭐. 민심은 이 사람이 알아서 처리하겠소.”

“상당히 거센 바람인데 쉽게 가능하겠소?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꺼질 때까지 그냥 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런. 포은 선생도 가만 보면 최영 대감과 비슷한 연배 같소? 통제하는 거와 그냥 두는 건 다 옛날 방식이오.”

“···말씀이 과하시오.”

정몽주가 인상 쓰는 거 처음 봤다.

“···사과하리다.”

“앞으로는 말을 좀 가려서 하시오.”

“···그리하리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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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 듬직한 상인을 쳐다봤다.

“어서 오게.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대감께서 부르신다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백거마였다.

그는 전주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김성우의 보급을 희롱하여 청야전술을 가능하게 했으며, 지용기를 교란하여 완벽하게 덫에 빠지게 했다. 또한, 왜구 토벌전에서는 화약 병기 수송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니 어찌 그 위상이 가볍다고 하겠는가.

만일, 백거마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길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했을 것이다.

그 까칠한 정도전이 인정할 정도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이 자네의 공에 제대로 보답이나 하는지는 모르겠군.”

“대감이 아니었다면 남상의 오늘도 없었습니다. 쇠퇴하던 상권을 살려주신 건 대감이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니 참으로 고맙군.”

“해서 이번에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하하하. 아직 용건을 말하지도 않았네만.”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음. 이번에는 조금 어려운 일인데?”

“지금까지 한 일도 모두 목을 내놓고 했습니다.”

“아. 이번은 목을 내놓지는 않네.”

“감사합니다.”

“고맙긴.”

“그러면 일러주십시오.”

“이 나라 고려의 상권을 모조리 장악하게.”

생각지도 못한 내용.

백거마의 눈썹이 꿈틀였고 그 뒤로 그의 모든 행동이 멎었다.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굳어버렸다.

“어느 정도를 해야 장악하는 건지 일러주십시오.”

“남상에서 갓을 팔지 않으면 갓의 가격이 하늘까지 오르면 좋겠군.”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

“역량이 부족합니다.”

“투자하지.”

“···그래도 어렵습니다.”

백거마의 입에서 자조적인 미소가 자리잡을 때

“군량미를 제외한 모든 쌀을 투자하겠네.”

왕선의 말은 그 미소를 없앴다.

백거마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광산에 투자한 대가를 아주 천천히 주게나. 모든 여력을 퍼부어서 고려 상권을 휘어잡게.”

백거마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내친김에 몇 가지 더 청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상인들의 목숨은 어찌 됩니까.”

“내가 지켜주겠네.”

“하겠습니다.”

“자신 있겠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해보겠습니다.”

백거마는 단단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사내로 태어났다면 나라의 최고가 되려는 시도는 해봐야지요.”

“그건 너무 모호하군. 좋아. 나부터 말하겠네. 이 사람은 나라를 삼킬 것이야.”

“말을 수정하겠습니다. 고려를 가지겠습니다.”

왕선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네는 상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대감은 정계.”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 우리 두 사람이 이 나라를 가지게 될 것이야.”

같은 땅이었지만 다른 정점.

백거마는 공손하게 왕선의 손을 맞잡았다.

“아무래도 대감을 만난 건 이 미천한 놈의 천운이었나 봅니다.”

왕선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백성을 좀 움직이시게.”

“조민수와 지용기를 희대의 악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아주 훌륭해.”

덧붙였다.

“아. 선탄대사, 남은과 잘 연계하게. 말해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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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십자로 곳곳에서 행사가 열렸다.

“옴마니 반메홈.”

승려들의 법회.

“이랴찻!”

광대패들의 행사.

“얄리얄리 얄라셩.”

묘한 가락을 뽑아내는 사람들.

그리고 조민수와 지용기를 연상케 하는 극도 열렸다. 물론, 불경한 두 사람의 이름을 직접 꺼낸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었다. 가히 팔관회를 방불케 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또한, 사방에서 넉넉하게 구휼미를 나누는 행사도 있었는데 여기서 민심은 절정에 치달았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구휼미를 나누는 주체가 이 나라 고려의 최고 존엄, 명덕태후였기 때문이다.

순식간이었다.

조민수와 지용기를 편들던 백성은 이제 없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것은 아주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신우]

이것만은 왕선이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

왜? 별로 상관없으니까.

정몽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허. 정말 대단하오.”

“내가 좀 그렇소.”

“이런.”

“놀랐소?”

“삼봉인줄 알았소.”

“거. 갈수록 말이 심해지시는구려.”

왕선은 툴툴대면서 말하자 정몽주는 옅게 웃었다.

“대체 어찌 이리도 민심을 잘 파악하고 움직이는지 궁금하구려.”

“알려줄까요?”

“가르침을 청하오.”

현대국가에서 정치해보면 압니다.

“도솔천의 정치라오.”

“허.”

“이 사람은 대중사기술에 아주 능하다오.”

국민이 주권자인 나라에서 대권을 목전에 뒀던 정치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관심법.

막강한 재력과 상단.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세력에서 나오는 힘.

...그리고 백성이 주권자가 아닌 나라.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상황에서 왕선은 말 그대로 이 시대 정치계의 괴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단지 신념으로 무장된 학자, 조정 내부에서 협잡을 일삼는 모사꾼, 정략에 능한 정객과는 궤를 달리하는 과정과 결과를 도출할 수밖에 없는 아주 필연적인 결과였다.

< 105화 대한민국의 정치인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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