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사상최강의 협잡(3) >
-쾅!
도당의 문은 박살 났다.
마천목은 창을 고쳐 잡은 채로 들어섰다.
“···그 창 내려놓지 않으면 자네 사지를 찢어버릴 것이네.”
밑에서 끌어 오르는 살기와 노여움.
억겁의 힘이 느껴졌다.
도당의 상석에 앉은 최영이었다.
“천목아. 창 내려라. 저분은 진짜 그럴 수 있어.”
그러나 마천목은 창을 쥔 채로 왕선의 뒤에 섰다.
최영이 당장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자 왕선이 시야를 가렸다.
...진짜 마천목 죽일까 봐.
“대동군.”
“아. 어명을 가져왔습니다.”
왕선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역적 조민수와 지용기를 잡아...”
말하던 왕선은 과장되게 놀란 시늉을 하면서 제 머리를 툭툭 쳤다.
“두 역적놈 십자로에 잡혀 있었지?”
“대동군.”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마천목이 박살 낸 문은 이 사람이 고쳐놓지요.”
“분명하게 말하지.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자네는 여기서 못 나가.”
...이래서 최영, 최영 하는 거다.
평소 형편없는 정치력으로 미약한 존재감에 그쳤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순식간에 좌중을 장악하고 있다.
곁눈길로 본 마천목의 얼굴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을 정도였다.
“왜 그들이 역적인가.”
“그러면 이 사람이 역적입니까?”
“음. 내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거 같군.”
최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좀 위험하다.
“찬탈하려고 사병까지. 모든 정황 증거가 가득하지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나를 잘 모르는 거 같군.”
“어명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한 사유를 말하라고 했네.”
“정확한 사유. 어명. 더 필요합니까?”
왕선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좋은 날이군요. 오늘 대감을 제대로 확인했습니다.”
“뭐?”
“이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십자로로 가서 보고 들으시지요. 역적의 추악한 실체를.”
최영은 매섭게 노려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작은 거짓이라도 있으면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뭐. 국문이라도 하시던가요.”
그리고 왕선은 확인했다.
...역적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나왔음에도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 재상들을.
이것이 이 나라 고려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이 참담함을 걷어내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모든 재상과 십자로에 나선 최영의 귀에 백성들의 숙덕임이 들렸다.
“신우? 아니 대체 그게 뭐래?”
“임금님이 신돈의 아들이래.”
“신돈의 아들이 왜 임금님이야?”
“몰라. 옛날 임금님 아들을 신돈이 키웠다가 받았다는 말도 있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신돈 아들을 옛날 임금님이 키웠다는 말도 있고.”
“술 먹었나?”
“내가 먹은 게 아니라 고려가 술을 먹었지.”
“오. 명언일세.”
소란 끝에 통제가 풀린 결과였다.
최영이 매섭게 그들을 노려봤으나
“그런데 임금님이 신우라는 건 어떻게 알려진 거래?”
“이 사람아. 썩어도 준치라고 500년 된 고려라고.”
“어려운 말 쓰지 말고.”
“그러니까 충신들이 아주 많지 않겠나.”
“자네 똑똑한 거 아니까 간단하게 말하게.”
“거참. 그러니까 그런 거지. 임금님이 신돈 아들내미인 걸 알아낸 충신들이 세상에 알린 거지.”
“그게 누군데?”
“조민수? 지용기? 이런 분이래.”
“허. 멋진데?”
“그러니까 그런걸세. 신돈이 자기 첩을 옛날 임금님한테 내밀었어.”
“한마디로 그 첩의 배 속에 아들이 있었는데 그게 신우?”
“그렇지. 신돈 아들 신우.”
“기가 막히는군.”
“이걸 바로 잡으려고 한 게 조민수 장군이지.”
“멋지군.”
“지용기 대감도 힘을 거들었다더군.”
“기가 막히는군.”
“어쩐지 나라 꼴이 개판이라고 했어.”
“내 말이 그 말일세. 역시 왕이 가짜였어.”
“아무렴. 왕이 바로 서야지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도 잘 살 수 있지.”
“아무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십자로를 둘러싸고 있는 수천 명의 백성이 떠들어댔다.
...이들을 모두 벌할 수는 없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된 거다.
최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어명 받아 왔소이다.”
왕선이 낭랑하게 외쳤다.
조민수와 지용기는 비웃었다.
“어명?”
“역적 조민수와 지용기를 처단하라는 어명.”
“하. 역적? 웃기지도 않아.”
“우리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런 조작에 우리가 당황할 거라고 봤다면 오판이지.”
“감히 우리를 죽인다고? 웃기는군. 그건 불가능해.”
그리고 최영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매섭게 최영을 노려봤다.
“최영 대감!”
“······.”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명이라고 하지 않나.”
“하. 어명이라고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도당의 중론을 정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를 구하십시오!”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참으로 적나라하게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옳소! 어명이 무슨 소용입니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렸다.
“신돈의 아들이 무슨 어명을 내립니까!”
“조민수 장군과 지용기 대감의 말이 맞습니다!”
“조민수 장군을 죽이지 마십시오!”
“지용기 대감을 죽이지 마십시오!”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끈적끈적한 기운이 사방에 내렸다.
“두 분이야말로 이 나라 고려의 충의지사입니다.”
“가짜 임금을 몰아내야 합니다!”
“맞습니다! 신우라니요! 우리는 두 분의 뜻을 지지합니다!”
분위기는 기괴하게 흘러갔다.
...어명으로서 역적으로 규정된 두 사람을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역적을 말이다.
이미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는 처참하게 짓밟혔다.
“죽이지 마십시오!”
점차 커지는 외침. 점차 확대되는 외침.
그것은 어느새 수천 명의 입을 거친 웅성거림이 됐고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 됐다.
“대감. 어쩌지요?”
최영은 허탈하게 웃으면서 왕선을 쳐다봤다.
...더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 충격적인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
“···뜻대로 하시게.”
“내 뜻이 아니라 어명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건 아니다. 이런 분위기는 사태를 악화시킨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 상황을 이용한다. 의연하게.
곧장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어댔다.
조민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최영과 왕선을 쏘아봤다.
“기가 막히는군. 어쨌든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최영 대감.”
지용기도 거들었다.
“도당의 중론을 이렇게 어기다니. 군웅할거가 진행되는 형국에서 도당에 모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한 겁니까?”
“예. 지용기 대감의 말대로지요. 내가 장담하겠습니다. 이 순간부터 고려의 정치는 끝입니다.”
“아주 크게 실망했습니다. 충주로 내려갈 것입니다. 그리 아세요.”
최영의 안색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말대로 도당의 합의 사항이 한순간에 박살 난 상황이다. 더는 도당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아주 컸다.
그러자 왕선이 슬쩍 나섰다.
두 사람은 비웃었다.
“죽이려고?”
“우리가 진짜 역적질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수천 명이 이렇게 고함을 질러대는데 죽일 수 있다고 보나?”
“오늘의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리다.”
“전주부터 짓밟아주리다.”
왕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없다는 거 알잖아.”
아주 작게 말을 덧붙였다.
“이 상황. 누가 유도했겠어?”
두 사람의 눈이 흔들렸다.
왕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보라고. 누구 한 명 없지 않아?”
“···무슨 말이지?”
“언월도 들고 다니던 사람 없잖아. 안 그래?”
그러고 보니 나세가 안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말하지 않은 어명이 하나 더 있지. 중앙군을 편성하여 역도의 거점을 점령하라는 내용.”
“뭐, 뭐라?”
“지금쯤이면 나의 위타천이 일천 기병을 이끌고 진군했을 건데.”
“어, 어디로. 어디로 갔느냐.”
“음. 충주일까, 창녕일까.”
두 사람은 정신이 없었다.
나세가 병력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했다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된다.
...만일 거점이 무너지는 상황이라도 발생한다면?
...자신들은 파리 목숨이다.
다급함이 치솟았다.
“충주.”
“!!”
“음. 당신이 없는 충주가 나세를 막을 수 있을까? 아. 화약 병기도 두둑하게 챙겨가라고 했어.”
조민수는 안도했고, 지용기는 충격에 휩싸였다.
왕선은 비웃었다.
“뭘 안도하지? 창녕은 멀쩡할까 봐? 거기도 최무선 장군과 문익점 선생의 병력이 진군하고 있을 건데? 화약 병기를 엄청나게 챙겨서.”
“!!!”
두 사람을 한껏 희롱한 왕선은 최영과 재상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어명이 아무런 힘을 낼 수 없는 나라이긴 합니다. 그럴 때는 어찌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오른손 검지를 움직여서 하늘을 가리켰다.
“어명이 힘을 낼 수 있게 하면 됩니다.”
덧붙였다.
“지금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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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미리 경고하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주상을 알현하는 걸 방해하지 말게.”
“하지만···.”
“비키게. 아. 다른 사람의 출입은 꼭 막고. 알겠나?”
왕선은 병사들을 밀치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핏발선 눈을 한 왕우가 보였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공작이라는 새가 있사옵니다. 월조 또는 남객이란 별명으로 불리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과거 송나라의 육진이 쓴 비아(埤雅)에 잘 나와 있사옵니다.”
“대동군.”
“비아(埤雅)에 이르기를 이 공작은 꽁지 색이 자주 변하옵니다. 붉고 노란 것이 마치 노을빛 같은데 빛깔이 일정치 않사옵니다. 꽁지에는 금취가 있는데 다섯 살이 지난 뒤에나 생기옵니다. 처음 나서 3년간은 무늬가 작지만, 초봄에 생겨나 3, 4월이 되면 다시 퇴색하는데 꽃과 시들고 피기를 함께 하옵니다. 그런데 공작새는 무척이나 질투가 심하옵니다. 사람이 비단 채색의 옷을 입어서 자기보다 아름다워 보인다면 반드시 쫓아가서 부리를 쪼아댈 정도로.”
“···듣기 싫으니 썩 물러나시오.”
“희한하지 않사옵니까? 또한, 이 공작새가 춤추는 모습은 너무나도 화려하여 보는 이의 정신을 잃게 하옵니다.”
“과인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해서, 사냥꾼들은 반드시 이 공작새를 잡으려고 하옵니다. 이 아름다운 새를 잡기만 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대동군을 끌어내라!”
“그런데 사냥꾼들이 공작새를 어떻게 잡는 줄 아시옵니까?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옵니다. 꼬리가 비에 젖어 무거워서 높이 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이 공작새라는 날짐승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사람이 가까이 가더라도 꽁지를 아끼느라고 푸득이지도 않사옵니다. 과연 금수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당장! 당장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밖에 누구 없냐고 했느니라!”
“그렇습니다. 신이 볼 때 이 공작새는 자아도취에 빠졌사옵니다. 속된말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철부지라고 해야 할까요? 어떻사옵니까? 전하께서도 그렇게 들리지 않사옵니까?”
“닥치라고 했습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나 왕선은 나가지 않았고, 밖에서는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왕우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왕선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르시겠사옵니까?”
참으로 차가운 표정이었다.
왕선이 턱을 살짝 들었다.
“바로 전하를 이르는 말이옵니다.”
“!!!”
그리고 서찰을 하나 내렸다.
“이거 읽고 가만히 숨만 쉬고 계시옵소서.”
왕선이 물러간 강안전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왕우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안색을 숨기지 못했다. 겨우 손을 움직여서 서찰을 펼쳤다.
[신은 이인임 따위와는 다르옵니다.]
무엇이 다른가?
[실은 신은 미륵이옵니다.]
왕우는 괴성을 지르면서 서찰을 찢어서 던졌다.
< 104화 사상최강의 협잡(3)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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