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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03화 (103/187)

< 103화 사상최강의 협잡(2) >

“이제 마무리를 하셔야지요.”

정도전은 싱글벙글했다.

“그래야겠지요?”

“예. 설렁설렁 조사 자료를 들고 도당에 가셔도 되고.”

“여기서 끝을 봐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서 끝을 봐야지.”

정도전의 눈에는 이채가 띄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양주입니다. 최영 대감의 관할이지요.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말해야 하오? 고작 불판 갈아치우는데 이거저거 재다 보면 고기 타 태워 먹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바꿔야지. 안 그렇소?”

“음. 그렇군요. 그런데 불판을 어디로 치우실 겁니까?”

“그렇지. 그걸 물어봐야지. 그게 중요하니까.”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옴마니 반메홈. 소승이 회암사를 정화하겠습니다.”

미륵사의 선탄이었다.

그가 회암사를 장악한다? 이건 군웅 간의 대립이 아니라 불교 내부의 일이 된다.

모든 명분은 압도적이었다.

물론 압도적인 명분은 정치의 영역에 한정하는 것이다.

“불교계의 거센 도전에 직면할 것이외다.”

심하면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그런데도 선탄은 여유롭게 웃었다.

“중생의 외면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과연.”

“우선 회암사의 사원전부터 백성의 품으로 돌려주겠습니다.”

“아아. 그건 아니지요.”

정도전이었다.

“원칙은 그게 맞지만, 융통성을 좀 발휘해야지요.”

“융통성이라고 하셨소?”

“회암사의 사원전은 그대로 가지고 백성에게 고르게 경작할 수 있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소.”

그러니까 사원전이 최영의 손바닥에 올라가는 걸 견제한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정도전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 나세 장군은 전주로 보내셔야지요?”

“그래야겠지.”

“하면,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셔야지요?”

“개경의 공기가 기대되는군.”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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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의 분위기는 실로 침통했다.

“······.”

“······.”

“······.”

최영이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이번 일의 배후를 잡아야 하네.”

신우(辛禑)

금상인 왕우가 선왕의 혈육이 아니라 신돈의 핏줄이라는 낭설.

권문세가 중심으로 조심스레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왕우가 적통으로 인정받고 보위에 오르면서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개경의 심장부 십자로에서 그 망령된 단어가 공개됐다.

최영은 즉각 병사를 동원하여 모든 행사를 막았고 백성들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신우(辛禑)’는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백성의 입에서 끝없이 회자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는 모두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재상들도 이번 사태의 엄중함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왕실의 위엄과 군왕의 권위를 비웃으며 방자하게 행동했으나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군웅할거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군웅들은 고려라는 담벼락 아래서 옹기종기 모인 상태가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입에 담기도 불편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최영은 매서운 눈으로 좌중을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이 최영의 이름을 걸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역모라는 단어가 힘을 내지 못하는 궁색한 수준의 고려 왕실과 조정이다.

그러나 이건 그것과는 또 궤를 달리하는 문제.

최영이 직접 사병을 이끌고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그러나 군웅들은 최영의 엄포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정신은 다른 데로 팔려간 상태였다.

사실 그랬다. 군웅들은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져서 금상이 폐위된다면?

만일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차기 용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대동군 왕선이었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에 눈치만 살폈다.

부디 다른 사람이 이번 일로 가장 크게 이익을 볼 사람을 꺼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대감. 대동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선이 회암사에서 분탕질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그런데 조민수는 굳이 이를 재차 언급했다.

“조 장군. 그게 무슨 말인가.”

조민수는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안전이 태후전의 앞에 서는 날을.

또한, 결심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강안전을 대변하여 입지를 구축하겠노라고.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나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우군이라는 걸 알릴 수 있는 길이다.

하여, 내뱉듯 말했다.

“이 엄중한 시국에 개경을 비웠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네.”

“이번 사태로 가장 크게 웃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도당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진득진득하게 녹아서 재상들의 피부에 내렸다.

모두 최영과 조민수를 곁눈길로 살폈다.

“해서, 대동군이 찬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소직은 찬탈을 언급한 건 아닙니다만?”

“나와 농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소직은 가능한 모든 범주를 가늠한 겁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가 아닙니까.”

“이 사람 역시 조 장군의 말에 동의하오.”

이색이었다.

“아무리 시절이 수상하더라도 정도가 있소. 이를 발본색원하지 않으면 뭐하러 도당에 다들 몰려 있소? 누구 말대로 각자 거점에 내려가서 제 세력이나 키우고 창칼을 휘두르면 되지 않겠소이까?”

이색의 말은 의도와 본질을 떠나서 아주 지극한 사실을 하나 알렸다.

지금 이곳 도당에서 함께 논의하는 이 모든 사람이 잠재적 경쟁자라는 것을.

언제라도 창칼을 맞댈 수 있는 잠재적 적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만약 이번 일로 왕선을 정리할 수 있다면?

지용기가 격한 어조로 나섰다.

“목은 선생의 말이 옳습니다. 또한, 정황상 대동군이 가장 의심됩니다.”

조민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국문을 열어보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갑론을박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몽주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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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뒷짐을 진 채로 넉넉하게 걸었다. 안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그랬다.

한참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의외로 십자로의 한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도착한 밀교원들이 있었다.

남은은 곧장 물었다.

“어찌 됐나?”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좋아. 결과는 언제 나오지?”

“계획한 시기와 정확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따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보고?”

“예. 도당에서 주공을 엮어내려고 합니다.”

“주동자는?”

“조민수, 지용기, 이색입니다.”

“딱 좋군. 아주 아름다워.”

“소인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은과 밀교원들은 기분 좋게 웃었다.

“자자. 그러면 이제 일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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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이 개경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직이 잡아 오겠습니다. 대감께서는 국문을 준비해주십시오.”

조민수는 의욕을 보이면서 나섰다.

왕선은 개경에 사병을 진입하지 못하게 한 명령에 충실한 상태다.

다른 재상들은 처음에 따르는 시늉을 하다가 암묵적으로 사병을 배치했다.

물론 왕선도 생각이 있으니까 사병을 노비로 위장하여 두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함께 따르는 인원은 10명 안팎이다.

바로 지금이 적기다.

“음.”

“대감. 머뭇거리다가 왕선이 도주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전주와 총력전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떳떳하다면 다 밝혀질 겁니다.”

조민수는 아예 추궁하듯 따졌다.

최영은 한숨을 쉬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선은 어느덧 십자로에 이르렀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갔으나 전처럼 활기찬 모습은 아니었다.

“개경 공기가 참 삭막하군요.”

“군사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거 아무래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나 봅니다.”

“음. 최영 대감의 솜씨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나저나 남은이 연락을 취해왔소?”

“예. 두 명과 한 분입니다.”

“그건 또 뭐요?”

“조민수, 지용기 그리고 소생의 사부님.”

“음. 한 분 맞군.”

“아쉽게도요.”

“군사 입장을 내가 배려하리다. 두 명만 처리하지. 가뜩이나 거슬리던 지용기까지 낚았으니 딱 좋군.”

“괜찮은데요?”

“응?”

왕선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정도전을 쳐다봤다.

질 나쁜 농인 줄 알았는데 아주 진지하다.

“진심이오?”

“소생이 사부님의 운명을 두고 장난할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그게 나을 거 같소만.”

“어쩌겠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당신 사부인데?”

“괜찮다고 했습니다만.”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는다. 본인 사부를 죽이자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왕선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포은 선생 입장도 생각합시다.”

“아. 그 인사는 안 괜찮겠군요.”

“그러니 두 명만 하리다.”

“한 분은 다음에 다시 도모하지요.”

“당신은 정말 대단하오.”

“과찬입니다. 어쨌거나 사부님께서 제자 복은 타고나셨군요.”

...무서운 사람이다.

왕선은 괜히 목을 쓰다듬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자욱한 먼지를 대동한 채로.

“역적 왕선은 오라를 받아라!”

조민수가 수십 명의 사병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나섰다.

왕선은 한숨을 쉬었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손오공이 열심히 설친다더니.”

“딱 그 꼴입니다.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그나저나 수십 명? 이거 실망인데?”

“그게 딱 조민수 수준이지요. 어쨌거나 나세 장군이 열심히 한 보람이 없군요.”

“내 말이 그 말이외다. 하긴 이 모든 건 이성계를 염두에 둔 작전이었으니까.”

“음. 호랑이 잡으려다가 쥐새끼 잡으려니 힘이 쭉 빠지는군요.”

조민수는 왕선과 정도전이 쑥덕거리자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왕선! 오라를 받아라!”

“거.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시오.”

“뭐라?”

“그나저나 내가 역적?”

“당장 국문에 임해야 할 것이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무슨 짓이냐.”

“교지.”

“뭐?”

“교지 보여 달라고.”

“······.”

“없소? 그런데 내가 무슨 역적이오?”

“다, 닥쳐라!”

“역적도 아니거니와 교지도 없으면 내가 따라갈 이유는 없지.”

“도당의 중론이니라!”

“협잡이나 해대는 도당의 중론 따위는 내가 잘근잘근 씹어주리다.”

조민수는 시뻘게진 안색으로 외쳤다.

“당장 포박하라!”

병사들이 다가오자 왕선이 빙그레 웃었다.

조민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리고 왕선이 손을 들었고 조민수의 시선이 그 손끝을 향해서 움직였다.

...손끝의 너머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보였다.

-차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앙!

난전을 형성하던 상인들이 창칼을 꺼냈고

-차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앙!

구경하던 부보상들이 무기를 꺼냈다.

그 수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조민수의 눈이 충격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조민수의 뒤로 또 다른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허.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잘 한 거 같구려.”

지용기였다.

조민수는 반색했다.

이리되면 해볼 만하다.

...그런데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일전에 쌀을 나눠주던 승려들이 도끼를 든 채로 나타났다.

수백 명의 재가화상이었다.

그러니까 왕선의 뒤로 500명에 육박하는 무장병력이 배치된 것이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개경에 사병을 들이면 안 되는데?”

혀를 차면서 조롱했다.

“거참. 도당의 중론이라고 떠들더니 기본부터 지킵시다. 아. 나는 지나가던 상인과 승려들이 거들었소. 아직 눈이 썩은 건 아니니까 잘 보이지요?”

“저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이 죽어 나가도 보지 못한 썩은 눈깔을 가진 무뢰배들입니다.”

“음. 군사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소생의 말은 항상 옳지요.”

“군사.”

“예. 주공.”

“태후전으로 가겠소이다. 이 엄중한 상황을 보고해야지.”

그리고

“이옥.”

“예. 주공.”

“움직이면 다 쏴 죽여. 모든 건 내가 책임질 거니까.”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포위된 조민수와 지용기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 103화 사상최강의 협잡(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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