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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02화 (102/187)

< 102화 사상최강의 협잡 >

명덕태후는 다소 불편한 눈빛으로 왕선을 쳐다봤다.

“이 사람이 자네의 의견을 반대하지는 않네. 하지만 이번은 너무 과했네.”

“만일 마마께서 멈추라고 하신다면 멈출 것입니다.”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왕선의 태도.

명덕태후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대동군. 이 사람의 말 한마디에 멈출 것이라면 어째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나.”

“마마의 말 한마디가 이 나라 고려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허.”

“소인. 이 나라 고려 왕실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싸울 겁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지존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찌 창칼을 휘두르겠습니까.”

“···어찌하여 왕실에 그토록 충성하는가.”

“소인의 성이 ‘왕’가 인 이상 당연한 일입니다.”

“천륜이다?”

“천명입니다.”

명덕태후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장고에 돌입했다.

그녀 역시 사찰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벌써 많은 사찰이 그녀에게 뒷공작을 했을 거다. 그러나 왕선은 명덕태후가 내민 손을 뿌리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찰과의 인연이 중요하더라도 그녀는 이 나라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이기 때문이다.

왕실의 지엄함. 그것을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는 가치는 이인임 정권을 거치면서 확고부동해졌을 것이다.

“이 사람이 태후전에 앉아만 있는 거처럼 보여도 보고 듣는 게 많네. 강안전이 참으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더군.”

왕우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찰 세력을 물심양면 지원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하자 많은 재상이 달려갔다. 그토록 무시하던 강안전이었으나 태후전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다.

아마 지금쯤 왕우는 신바람이 났을 것이다. 천하를 엎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고 있을 거다.

“만일 자네가 실패하면 수렴청정은 걷어지게 될 것이네.”

“알고 있습니다.”

“이길 수 있나?”

역시.

왕선은 자세를 고쳐잡고 힘을 실어서 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반드시 이기게.”

“소인은 수렴청정하는 마마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한데, 실패한다는 건 이 나라 고려 왕실의 위엄을 실추시키는 것.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자네를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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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개경에 있는 밀교원 전원을 소집했다.

“모두 모였나?”

“예.”

수차례 주변을 살핀 남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모든 대화는 필담으로 진행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남은은 준비해온 지필묵을 꺼냈다.

빠르게 붓을 움직였다.

[목표 : 조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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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숨은 거칠게 헐떡였다. 온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내렸다.

연신 움직이는 다리도 후들거렸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헉헉.”

어느새 양주 천보산에 이르렀다. 개경에서 여기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

그리고 산기슭에 이르니 동국제일사찰 회암사가 보였다.

회암사를 쳐다보는 무학의 눈은 무척이나 혼탁했다.

오른손에 들려진 염주를 꽉 쥐고 정문으로 향했다.

무학의 몸이 회암사의 정문을 통과할 때 그의 귀를 때리는 불쾌한 목소리가 있었다.

“정말 열심히 달려 왔나 보군.”

무학이 고개를 들어서 쳐다봤는데 햇살이 참으로 눈부셨다.

미처 상대를 확인도 하지 못했는데

“격하게 환영하오?”

조롱하는 듯 심히 거슬리는 목소리.

무학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

“삼봉 정도전이라고 하오.”

거친 숨을 내쉬면서 발걸음을 멈춘 무학의 눈에 빙그레 웃는 정도전이 보였다.

“···회암사는 동국제일사찰. 이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서 온 거 아니오?”

정도전의 뒤에는 빼곡하게 들어선 백성들이 있었고, 그 뒤로는 회암사 승려들이 황망한 표정을 하면서 움츠리고 있었다.

“당장 물러나시오.”

“놀랍더이다. 동국!제일!사찰! 회암사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니.”

“무례하오!”

“음. 나옹선사도 이 일에 연관되었을지 궁금하오만?”

“말을 삼가시오!”

무학의 노여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도전은 싱그럽게 웃고만 있었다.

“회암사의 사원전. 7할이 백성의 토지였더군.”

정도전은 무학의 입이 해명할 기회 따위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잠부카다카가가 사리불에게 물었지. 쓸데없이 무엇을 물었을까? 혹시 아오? 음. 내가 말해주리다. ‘사리불이여, 열반, 열반이라 하는데, 열반이란 대체 무엇을 말합니까?’ 이렇게 물었다오. 이에 사리불이 이르기를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열반이라 합니다.’ 이렇게 말했소.”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불경이 쏟아져 나왔다.

정도전의 낭랑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라타가 석가에게 물었소. 왜 세속을 떠나야 하는지.”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절에 왔으니 불경 외우고 있소만? 아. 어쨌든 석가가 답했다오. ‘지나친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다.’ 그러자 궁금증이 많은 라타가 다시 물었소. 쓸데없이. ‘무엇을 위해 탐욕을 버립니까?’ 똑똑한 석가는 다시 답했소. ‘열반을 위해서다.’ 음. 여기서 라타는 또 궁금했다오. ‘하면, 무엇을 위해서 열반을 얻는 겁니까?’ 과연 이 대목에서 석가의 인내심도 폭발했다오. 그래서 버럭버럭하면서 일갈하기를 ‘라타야, 너의 질문은 너무 지나치다. 묻는 데 끝을 모르는구나.’ 이렇게 말이외다. 훌륭했소. 참으로 훌륭했소.”

“석존께서는 더 말씀하셨소.”

“누가 몰라서 생략했겠소? 귀찮으니까 뺀 거지.”

정도전은 손을 내저으면서 또 말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비,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려는 희,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사를 닦으면, 탐욕과 분노와 남을 해치려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점점 약해져서 평온에 이른다. 이를 하량없이 중생에게 베푸는 자비희사, 즉 4무량심이라고 한다. 음. 참으로 좋은 말이오?”

정도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머리를 긁어댔다.

“음. 또 뭐가 있더라? 뭐. 됐고. 어쨌거나 지금 내가 읊은 말과 회암사가 어울리는 건 하나도 없구려. 오히려 완전히 썩어서 그 냄새가 천하를 진동시킨다오. 어찌나 냄새가 지독하던지 백성들이 이렇게 몰려 왔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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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과 도당의 재상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개경의 심장부 십자로에 엄청난 수의 백성이 몰려 있었다.

...이유는 아주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자자. 줄을 서시오.”

“모두 나눠줄 수 있으니 차례대로 기다리시오.”

승려들이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고 있었다.

그 양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리고

“익주 미륵사와 김제 은산사에서 모든 쌀을 베풀기로 했소.”

“이는 그동안 중생에게 저지른 죄악을 씻고자 한 것이외다.”

쌀을 나눠주는 사람을 제외한 수백 명의 승려가 외치면서 절을 시작했다.

“부디 과거의 업보를 중생들이 용서해주시길 바라오.”

그들의 모습은 실로 장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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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불교는 ‘장황한 범패와 불사가 요괴를 진압한다’라고 말하오. 그래서 궁중에서 끊임없이 향을 내려주었고 접대하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소. 하지만 천재지변은 없어지지 않소. 희한하오?”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또 ‘내가 복을 빌어 사람들을 오래 살게 한다’고 말하오. 백성들은 많을 돈을 아끼지 않고 오래 살게 빌어달라고 하였으나 백 살을 산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소만?”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도 저었다.

“음. 또 뭐라더라? 그렇지. ‘불법이 인도하는 데 힘입어 지옥을 부수고 극락에 태어나게 한다’ 고 했군. 오늘 잘 때 입을 씻어야 할 것 같구려. 어쨌거나 죽어서 다시 태어난 사람 있소? 누구도 극락과 지옥을 본 사람은 없소. 혹시 봤소?”

정도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껌뻑였다.

“이런 말도 했지. ‘지리가 나쁜 곳에 절과 탑을 세워서 악기(惡氣)를 소멸한다’라고 말이외다. 말하는 게 입이 아플 지경이구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마지막으로 하겠소. 할 말은 많은 데 더 말하면 입이 아플 거 같아서. ‘너의 생업을 금하고 청정 적멸을 찾으라’ 좋은 말은 다 가져다 쓰는군. 그런데 말이외다. 당신들은 우리 백성들에게 붙어 밥을 얻어먹지 않소? 심지어 땅도 뺏어가고 말이외다. 안 부끄럽소?”

무학의 머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회암사의 재가화상은 나세에게 완벽하게 제압당한 상태다. 또, 백성들의 원성이 가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암사의 모든 내부 자료가 정도전의 손에 넘어갔다.

큰 부정은 없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을 리는 없다.

...막아야 했다. 일단 시간을 끌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양주에 영향력을 가진 이원계나 최영이 분명히 수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안일한 것이었다.

...상대는 정도전이었다.

“혹시 개경에서 사람이 올 것을 기다리오?”

정도전의 입가에는 비린 미소가 감돌았다.

무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상하지 않소? 회암사가 이 난리가 났는데 왜 아무도 안 올까? 당신이 달려올 동안 왜 아무도 오지 않았을까? 왜 개경에서 온 사람은 당신 한 명뿐일까?”

마침내 무학의 눈동자에는 동요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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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십자로를 승려들의 삼천 배가 장악했을 때였다.

개경의 모든 눈과 귀가 십자로의 행사에 집중됐을 때였다.

“아이고!”

쌀을 들고 가던 백성들이 부딪히면서 넘어졌다.

사방에 쌀이 흩어졌다. 상당한 양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울상이 된 백성들이 다급하게 쌀을 주우려고 하자 승려들이 자애롭게 웃었다.

“괜찮소. 새로 주겠소.”

“아이고. 스님.”

그러는 동안 흩어진 쌀은 바람에 휘날렸다.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날아갔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쌀 중에서 유독 움직이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 기괴하게 여긴 백성들이 웅성거렸다.

“저건 뭐래?”

“그러게. 무슨 글자 같은데?”

웅성임은 갈수록 커졌다.

분위기는 묘해졌다. 떨어진 쌀들이 날아가지 않고 글자의 형체를 만들어냈지 않은가.

최영과 재상들도 의아한 듯 접근했다.

그런데

[신우(辛禑)]

“!!!”

“!!!”

“!!!”

거대한 충격이 내렸다.

대경한 최영이 황급히 해산령을 내리고자 했으나

“신우? 신우가 뭐래?”

“자네 글자도 읽을 줄 아나?”

“읽기는.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을 옮긴 거지.”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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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백성들을 돌아봤다.

“그동안 회암사가 너희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는가?”

“말도 하지 못합니다.”

“석가의 보살핌을 받았는가?”

“꿈에도 보지 못했습니다.”

“해서, 이 고려의 썩은 불교를 정화할 진정한 미륵불을 모셨느니라.”

정도전은 양손을 하늘로 뻗었다.

“외쳐라!”

온 힘을 다해서.

“옴마니 반메홈!”

백성들은 얼떨떨하게 따랐다.

“오, 옴마니 반메홈.”

“더 크게!”

“옴마니 반메홈!”

“어허! 더 크게!”

“옴마니! 반메홈!”

“그 정도로 미륵이 하생하겠는가!”

“옴!마!니!반!메!홈!”

“옳지! 한 번 더!”

“옴!마!니!반!메!홈!”

“미륵이시여!”

“미, 미륵이시여!”

“우리를 구제하소서!”

“우, 우리를 구제하소서!”

“마군이를 내쫓으소서!”

“마, 마군이를 내쫓으소서!”

그 순간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회암사의 정문에서 거대한 주문이 울렸다.

무학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가장 앞에는 익히 아는 얼굴이 있었다.

...미륵사의 선탄이었다.

“대사! 어찌 미륵을 칭...”

그 순간 무학의 뇌리에 스치는 말이 있었다.

[나 미륵이잖아]

온몸이 굳어졌다. 눈동자만 움직였다.

“!!!”

승려들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중생들이여!”

광오한 외침.

“내가 왔노라!”

왕선이 모습을 보였다.

“내가!”

승려들이 화답했다.

“미륵이십니다!”

“옴마니!”

“반메홈!”

“모든 것은!”

“미륵의 뜻으로!”

결국, 무학은 졸도했다.

< 102화 사상최강의 협잡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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