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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01화 (101/187)

< 101화 판갈이 >

무학은 뒤통수를 둔기로 두들겨 맞은 거처럼 휘청였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자세를 바로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왕선은 서늘하게 노려보면서 조롱했다.

“앵무새라는 놈은 사람의 말을 따라 하지. 하지만, 푸른 깃에 붉은 부리로 잘 지껄여도 앵무새는 새장에 갇힌 채 죽을 운명이야. 그러면 어찌해야겠어? 얌전히 있어야지. 그 주둥아리를 다물고. 그러지 않으면? 예쁜 깃털은 뽑혀서 장식품으로 쓰일 거라는 거야. 제가 사람인 줄 알고 까불어대는 알량한 재주와 몸을 빛나게 하는 깃털은 제 목줄을 잡아당기는 불행의 시작일 뿐이지.”

무학은 아직도 자세를 휘청이는 몸을 바로 잡지 못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설치지 말아야지. 그냥 얌전히 있으면 금실로 된 화려한 새장에서 맛있는 먹이를 먹으면서 남 부러울 것 없는 세월을 보낼 수 있어.”

“다, 당신은 누구요?”

“닥쳐.”

“!!!”

“누가 그 요사스러운 혀를 함부로 움직이라고 했지?”

“!!!”

“내 말 끝날 때까지 닥치고 들어.”

무학은 염주 알을 꽉 쥔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왕선은 그를 우롱하듯 쳐다봤다.

“뭐. 이해는 할 수 있어. 막강한 사병, 백성들의 추앙. 충분한 힘을 가졌어. 조건은 괜찮다고. 그러니까 서까래 잡고 헛소리나 하지. 그런데 그래 봤자 변방의 군웅에 불과하다. 불리비조(不離飛鳥). 앵무새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새일 뿐이지. 짐승에 지나지 않아. 사람이면서 예가 없다면 말을 번드르르하게 해도 금수에 불과하다는 말이지. 변방에서 설쳐댈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엎을 수 있을 정도로 이 나라 고려가 우습게 여겨지나? 설령 이 나라 모든 군사력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단지 힘만으로 무너뜨릴 정도로 이 나라가 가벼워 보였나?”

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대체 누구길래 은밀한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며, 이토록 신랄한 말을 쏟아내는 것인가.

...혹시?

“···대동군 대감이십니까?”

“땡중이 보는 눈은 있나 보군.”

“어찌하여 소승과 이 장군을 모함하십니까.”

“개 소리 좀 하지 말고. 서까래로 두들겨 맞기 싫으면 닥쳐.”

“!!!”

왕선은 날카롭게 노려봤다.

“당신이 중생을 구제하는 건 바라지도 않아. 아니지.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겠지. 절간에 처박혀서 경전이나 읽어.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었다면 불경만 읽으라고. 속세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만일···.”

만일?

“내 경고를 무시하고 또 설쳐대면 이 나라의 땡중을 모조리 서까래로 두들겨 패버릴 거야. 이 말 명심하라고. 진심이니까.”

만일 평소 누군가가 겁박했다면 무학은 의연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평소, 일상 등 평범한 단어와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서까래가 너무 컸다.

“대, 대동군 대감.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습니다.”

“이거 왜 이래? 소문 못 들었어?”

무학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법복을 털어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미륵이잖아.”

“!!!”

“당신 속을 다 들여다본다고.”

무학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 진정 제정신이 아니로다.

그럴수록 왕선은 흡족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선정을 베푸는 상전을 미륵불이라고 칭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그런데 이 자는 진정 자신이 미륵불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미륵불의 이름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광인이었어.

왕선은 법복을 몇 차례 더 쓰다듬었다.

“서로 조심하자고. 알겠나?”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그런데 이렇게 끝내려니 영 아쉽다. 다시 등을 돌려서 싱긋이 웃었다.

“옴마니 반메홈?”

무학의 얼굴은 또다시 무너졌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적당하게 거리가 벌어져서 서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아.”

그러고 보니 무학이 왜 개경을 싸돌아다니는지 파악 못 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멱살 잡고 물어볼까?”

됐다. 모양새 빠지게 뭐하러 그러겠는가. 뭔가를 하러 왔겠지. 뭐.

그리고 그건 아주 불친절한 일이 분명하고.

...어차피 마지막에 제대로 도발했다. 그러니 분명하게 움직임이 있을 거다.

왕선이 볼 때 무학은 승려가 아니라 정치 모사꾼이었으니까.

뭐. 아니면 말고.

그건 그대로 아름다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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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람이요?”

“거. 계속 말 두 번 하게 할 거요?”

“요즘 가는 귀가 먹어서 그럽니다.”

“그러면 남은한테 자리 넘기고 좀 쉬시오.”

“갑자기 귀가 멀쩡해졌군요. 사람을 구해보라고 하셨지요?”

“알면서 왜 자꾸 묻소?”

“끙.”

왕선은 과장되게 못마땅한 시늉을 했다.

“거. 불교를 적당히 싫어하고, 성격 급하고, 성향이 공격적이고, 고집 세고. 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군사를 빗대서 말하는 거 같군.”

“소생은 불교를 아주 싫어하고, 성격은 느긋하며, 성향은 온건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합니다.”

“그 헛소리는 죽어야 멈출지 모르겠구려. 아. 조건이 하나 더 있소.”

“이 어지러운 시국에 구인이 얼마나 어려운데 조건을 계속 다는 겁니까.”

“시절이 수상하니 구직도 어려울 거요. 그리고 이 사람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오?”

“양과 질은 다르지요. 소생은 질을 언급한 겁니다.”

“포은 선생도 이 사람을 뿌리치지 못하오만?”

“거. 뭐 만하면 포은을 소환하십니다?”

“원래 치트키는 이럴 때 사용하는 거요.”

“···치? 뭐라고요?”

“됐고. 추가 구인 조건은 우리와 인연이 크지 않아야 한다는 거요. 있소? 없소?”

“도솔천은 소생이 꼭 한번 가보고 말 겁니다. 비슷한 사람은 있습니다.”

“완벽해야 하는데?”

“불교를 아주 싫어하고, 성격은 불같고, 성향은 괴팍하며, 고집도 그런 황소고집이 없지요. 다만, 소생과 작은 인연이 있긴 합니다.”

“조건이 조금 다르긴 한데.”

“음. 윤소종이 괜찮을 거 같은데, 마음에 안 드시는 거 같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잠깐. 윤소종?”

“예. 윤소종.”

“거. 앞으로는 이름부터 말 하시오.”

“이렇게 불공정한 구인 구직이 있다니.”

“됐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시오.”

왕선의 말이 이어질수록 정도전은 너무 좋아했다.

딱 취향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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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종은 대단했다.

...정말 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

또한, 느끼고 알게 됐다. 이 나라에 정도전보다 극단적인 사람이 있다는 걸.

...이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소종. 이 자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요.”

도당의 재상들은 돌아가면서 윤소종을 규탄했다.

이것은 윤소종으로 대동단결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회암사의 사원전에 심각한 부정이 있으니 이를 감찰해야 한다? 아주 제대로 미친 게 분명하오.”

“회암사라니. 이 나라의 고승이었던 나옹선사께서 터를 잡았던 곳입니다. 그곳을 감찰해야 한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당장 잡아 들여서 혼쭐을 내야 합니다.”

그랬다. 윤소종이 회암사의 감찰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재상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게 이토록 흥분할 일이었을까?

본질은 아주 간단했다.

회암사는 아주 큰 사찰이다. 세상을 떠났으나 나옹선사라고 하는 이 시대의 고승을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

이런 곳을 조정에서 조직적으로 감찰한다?

부정의 유무를 떠나서 불교계 전체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이는 불교계와 아주 끈끈한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 권문세족으로서는 무척이나 불편한 일이었다.

심지어 고려의 유종이라고 불리는 이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정이 있으면 응당 감찰해야 하오. 그러나 이런 식은 곤란하오. 이제 겨우 도당이 자리 잡고 있소. 윤소종의 상소는 결국 불협화음을 일으킬 뿐이오.”

“대체 어떤 식이면 곤란하지 않은지 고려의 유종께서 고견을 일러주시면 되겠군요.”

“허. 대동군. 지금 우리 도당이 사찰을 감찰할 수 있는 정치력이 있다고 생각하오?”

“없지요.”

의외로 왕선이 쉽게 인정하자 이색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가르치듯 말했다.

“무릇 정치는 논쟁이오. 최선과 최악을 두고 논쟁하여 가장 합당한 방책을 만드는 것이라오. 사원전? 문제가 있을 수 있소. 그러나 지금 괜히 사찰을 들쑤셨다가 제대로 된 결론은 절대 도출할 수 없소. 아쉽지만 훗날 도당의 정치력이 오롯이 복원되면 다시 논의하면 되오. 아시겠소?”

“그러니까 왜 도당의 정치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오?”

“···뭐요?”

“음. 이해시켜주리다.”

이번에는 왕선이 가르치듯 말했다.

“도당에서 전주를 들쑤시자고 하오. 그런데 이 사람이 반대하면 어쩔 거요?”

“그, 그런.”

그랬다. 작금의 현실은 군웅할거다.

도당 따위가 나설 수 있는 정치지형이 아니었다.

“윤소종이 상소를 올렸어요. 회암사를 감찰하자고. 그곳은 양주에 있지요. 양주는 누구의 관할이오?”

회암사가 있는 양주는 이원계의 세력 범위에 속했으나 지금은 최영의 관할이었다.

이는 이원계가 최영의 수하를 자처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왕선은 이 미묘한 경계를 정확하게 거론하면서 이색을 압박한 것이다.

“도당의 정치력? 그런 건 개나 주시구려.”

이색이 얼굴이 시뻘게졌다.

“대동군. 말씀이 과하시오.”

보다 못한 정몽주가 나섰다.

아차차. 이색은 정몽주의 사부였지? 여기는 동방예의지국이고?

왕선은 멋쩍은 표정으로 적당하게 말이 과했음을 인정했다.

“뭐. 어쨌든 그렇습니다. 최영 대감. 감찰. 수용하시겠습니까?”

모든 시선이 최영에게 쏠릴 때였다.

“흥. 태후전을 들락거리더니 제 세상인 줄 아는가 보군.”

기분 상한 목소리.

조민수였다.

“아무리 난세라도 엄연히 법도가 있거늘.”

왕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조민수를 쳐다봤다.

-강안전에서 왕선을 무척이나 경계한다. 훗날 친정이 시작될 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이고.

곡소리를 낼 뻔했다.

정말 우리 주상전하께서 얼마나 급하셨으면 저런 잔챙이들하고 손을 잡았을까.

그냥 너무 가소로웠다.

“이 난세. 당신이 아주 크게 이바지했소만?”

“뭐, 뭐요?!”

“법도대로 군웅할거에서 이탈할 거 아니면 그냥 계시오?”

조민수는 말문이 막혔다.

오늘 왕선은 무척이나 날을 세웠다.

평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을 도모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감찰이 어려운 건 아닐세. 그러나 사찰의 감찰이 회암사 하나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일세. 나는 그걸 우려하는 걸세.”

장고 끝에 나온 최영의 답변.

왕선의 눈에는 실망이 스쳤다.

...그리고 오늘 다시 확인했다.

최영도 결국 이 나라의 기득권에 불과하다는 걸.

날강도 같은 이인임과 차이점이라면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왕선은 조소를 날렸다.

“그러면 다 하면 됩니다.”

“허. 불교는 이 나라의 국시이거늘.”

왕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불교? 국시? 어처구니가 없군.”

입가를 일그러트리면서 웃어댔다.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라도 똑바로 해야지. 내가 분명히 말하겠소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이 나라 고려의 국시는 북진이외다.”

손바닥을 탁자에 올렸다.

“태조 대왕께서 이르신 국시는 북진이외다. 해서, 이 나라의 국호는 고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데, 지금 하는 모양새를 보니 이 나라의 국호가 법국인거 같소? 주상께서는 법왕이고? 참으로 웃기지도 않소? 불교? 그건 북진을 가능하게 하려는 무수한 수단 중 하나일 뿐.”

목을 돌리듯 풀었다.

“북진을 가로막는 버러지를 때려잡자고 하는데 왜 발목을 잡는지 모르겠군요.”

왕선은 최영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북진?”

조소를 날렸다.

“개가 먹어버렸습니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애초 무학에게 강한 경고를 날릴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다.

정치 모사꾼이니까 충분히 알아먹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판을 짠 거였는데.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워졌다.

그리고

“···도당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셨습니다?”

정도전은 한숨을 쉬고 고소도 삼켰다.

“이거 정치를 하자는 겁니까? 아니면 전쟁을 하자는 겁니까.”

정도전은 산만하게 온몸을 움직여댔다.

왕선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돼지고기 좋아하오?”

“예술이지요.”

“돼지고기 불판도 오래 쓰면 갈아 치운다오.”

“안 갈아치우면 돼지고기의 훌륭한 맛이 줄어들지요. 그건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돼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불판이 낡아서 돼지고기가 계속 타버린다오. 갈아야겠소. 우리 백성이 열심히 돼지고기 잡아서 가져왔는데 태워버려서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게 말이 되오? 이거야말로 폭정이지.”

왕선은 이를 꽉 악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최선과 차악이 논쟁하여 합당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 그런데 이 나라의 정치는 최악만 있소이다. 최악과 최악이 만나서 혼돈만 키워내고 있소.”

“그래서요?”

“정책을 올리기만 하면 타버리는데 어쩌겠소? 판을 갈아야지.”

“···그 말씀은?”

“정치판도 갈아야겠소. 판을 간 다음에 정치라는 걸 해야겠소이다.”

정도전은 진중한 눈으로 왕선을 쳐다봤다.

“지금 그 말씀. 도당과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라는 거 압니까?”

“썩은 판을 치워버리는 건데 거창하게 전쟁이나 선전포고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오.”

“확실히 하지요. 여차하면 우리가 먼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죽으면 어차피 이 나라는 끝.”

“우리가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불판이 더럽다고 잔칫상을 다 엎어버리면 쓰나.”

“친하지도 않은데 잔치에 와서 먹어대는 인간까지 쫓아낼 방법이긴 한데 내키지 않으시다고 하니. 음. 불판을 가는 일도 반발이 무척이나 거셀 겁니다.”

“판을 갈아버리는데 불길이 뜨겁다고 포기할 수 있소?”

“······.”

“나라를 갈아엎자고 한 사람이 판 갈이 정도에 걱정하오?”

징도전의 표정이 기괴하게 틀어졌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나라 사찰을 총공격할 것이외다.”

덧붙였다.

“회암사부터 박살 내시오. 유사 이래 없었던 협잡으로 아주 철저하게.”

정도전은 손바닥을 비벼댔다.

“소생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 사상최강의 협잡을 보여드리지요.”

< 101화 판갈이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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