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00화 (100/187)

< 100화 무신정권과 재상총재제 >

“아주 좋습니다.”

정도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데 그의 입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오?”

“어차피 모두 알고 있을 내용이니 뭐하러 소생의 입을 고생시키겠습니까.”

“허.”

“상황을 봐가면서 떠들어대기로 했습니다.”

역시 정도전.

저번에 당한 굴욕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한 모양이다.

정말 이름값 한다. 정도전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속이 좁아터진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소생의 속이 좁아터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군사. 관심법도 하시오?”

“딱 보면 알지요.”

“됐고. 아주 좋은 상황에 대해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오만?”

“다 알지 않습니까?”

“···남은.”

“예. 주공.”

“자네가 제일 군사 하겠나?”

“맡겨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성계 장군이 개경에 없는 동안 그 배후를 확실하게 정리해야 하지요.”

다급함이 가득한 정도전의 외침.

남은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는데, 정도전이 째려보자 먼 산을 쳐다봤다.

“이성계 장군의 배후라.”

“예. 강안전이지요.”

“음.”

“그는 원래 개경에 기반이 없는 인물이지요. 군호를 받고 태후 마마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은 주공과는 격이 다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조금 부족하다.

그런데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강안전이 이성계 장군에게 손을 뗀다면 더는 활개를 치지 못할 겁니다.”

그래. 이거구나.

왕선은 몸을 살짝 틀었다.

“이성계 장군의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예?”

“아. 군사가 생각하는 이성계의 목표 말이외다.”

“최영 대감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집정 대신?”

“예.”

“음.”

“···왜 그러십니까?”

이성계는 당신 영혼의 동반자라고.

...이렇게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니 차후 정도전의 판이 너무 안일해질 수도 있다.

고민하던 왕선은 적절한 절충안을 꺼냈다.

“군사. 이 사람의 안목을 믿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주공의 안목은 천하제일이지요.”

“거. 갑자기 너무 극찬하오?”

“극찬할 만하지요. 소생을 제일 군사로 삼았으니까요. 그야말로 천하제일입니다.”

...말을 말자.

왕선은 애써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계 장군은 무신정권을 꿈꾸오.”

“···예?”

“무신정권 모르시오?”

“그것은 낮은 단계의 재상 총재제이지요.”

“당신 미쳤소?”

“무신들이 군왕을 폐위하거나 국정의 식견이 있었다면 재상 총재제라고 할 수 있지요.”

“집정 대신이 되려고 창칼을 휘두르고 제 아들에게 권좌를 넘기는 세습 정권이 재상 총재제? 오늘 약 드셨소?”

정도전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농을 해본 겁니다.”

“농도 가려서 하시오.”

“송구합니다.”

“잘합시다?”

“······.”

“어쨌거나 아시겠소? 상대의 목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준비하는 판은 안일한 정세 인식으로 연결되는 거라오.”

“만일 이성계 장군이 무신정권을 꿈꾸는 파락호라면 용서할 수 없지요. 아주 끝장을 내는 게 맞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래도 일단 강안전은 정리하는 게 옳습니다.”

“그래야지.”

“주공께서 나서주십시오.”

“아. 이 사람 말고 더 확실한 사람을 보낼까 하오만.”

“확실한 사람이라고 하시면?”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이 나라 고려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정도전이 손사래를 치면서 팔짝 뛰었다.

“주공. 소생은 할 일이 많습니다. 직접 가시지요.”

“···미쳤군.”

모두 동의했다.

한 명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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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몽주를 쳐다봤다.

“어쩐 일입니까?”

일전에 도당에서 개망신을 당한 일이 아직 잊히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 치욕스러운 순간에 자신을 편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영도, 이성계도 침묵했고 정몽주가 공격했지 않은가.

“태후전은 이곳이 아닙니다?”

“전하.”

“허. 강안전을 찾아온 게 맞습니까? 왜요? 과인은 숨만 쉬고 살라면서요?”

“예.”

단 한 글자였으나 감히 상상하지 못한 내용.

또한, 그 말을 꺼낸 사람의 묵직한 무게까지 더해지자 한껏 조롱하던 왕우의 행동이 멎었다.

“전하께 간곡하게 당부드리고자 알현을 청한 것이옵니다.”

“···대사성.”

“이대로 그냥 계시옵소서.”

“대사성.”

“더는 정사에 관여하지 마시옵소서.”

“대사성.”

“주상께서 하신 일은 이 나라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한 협잡이었사옵니다.”

“대사성!”

왕우의 얼굴은 분노로 얼룩졌다.

핏발선 목은 당장이라도 욕설이 나올 기세를 뿜어댔다.

“수렴청정이 천년, 만년 이어질 것으로 생각합니까?”

“아니지요.”

“과인이 친정할 때 대사성을 용서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부디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허.”

정몽주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상께서 하시는 일은 신을 벌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없어지게 할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정몽주는 이성계의 일을 모두 말했다.

왕우의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졌다.

“···호바투의 공격을 유발했다?”

“예.”

“동북면의 일을 덮으려고?”

“예.”

“이런! 천인공노할 작자가 있나! 죄를 덮고자 국경을 어지럽히다니!”

“시작은 전하께서 하셨사옵니다.”

“과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예. 해서, 청하옵니다. 그냥 계시옵소서.”

정몽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냉정했다.

“이 나라 고려 왕실을 희롱한 무신정권의 재림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부디 그냥 계시옵소서.”

충격에 휩싸인 왕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치욕을 어찌할 수가 없는 처지가 죽을 만큼 괴로웠다.

“하면, 모든 영광은 주상께서 가지실 것이옵니다. 신을 믿으시옵소서.”

헛소리다. 영광은 치욕과 함께할 수 없다.

하여, 반드시 갚아줄 것이다. 그날은 올 것이다.

왕우는 핏발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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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예. 마마.”

명덕태후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녀의 손에는 왕선이 내민 동북면의 일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참으로 발칙한 작자로다. 주상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인물을 신뢰했는지.”

“해서, 강안전에는 대사성 정몽주가 갔습니다.”

“정몽주라면 주상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네.”

“예. 소인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덕태후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내 이래서 보위에 오를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려고 했었네.”

“마마. 주상께서 보령이 어리시어 그런 것입니다. 점차 나아질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네.”

“예?”

“이 나라 고려 왕실의 권위가 이 정도까지 복원된 건 대동군의 노력이야.”

“마마. 받들기 민망합니다.”

“아닐세. 그건 분명하게 해야지. 자네가 불철주야 노력하는 걸 이 사람이 모르지 않아. 한데, 주상은 저리도 날뛰고 있으니. 답답하네.”

왕선은 고민했다.

역시 명덕태후의 신뢰는 굳건하다.

그러면 재상 총재제를 말해볼까?

...아니다. 괜한 짓을 할 필요는 없다.

재상 총재제는 듣기에 따라서 또 다른 무신정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백 보 양보해서 명덕태후의 성향상 왕선이 집정 대신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건 이해하더라도 왕족이 아닌 다른 재상이라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원래 계획대로 가는 게 옳다. 명덕태후가 생존한 상태에서 모든 기반을 쌓아 올리면 된다.

...왕우 따위는 그냥 씹고 가면 되니까.

“마마. 꼭 만수무강하셔야 합니다.”

“이런. 이 사람에게 짐이 더 늘었구려.”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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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께서는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외다.”

“고생하셨소. 포은 선생.”

정몽주는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만일 주상께서 또다시 협잡을 펼치신다면 이 정몽주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그의 속내를 읽은 왕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왕선은 왕우를 믿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무리수를 둘 것이다.

바로 그때가 왕우를 눈만 껌뻑이고 숨만 쉬는 식물임금으로 만들 기회라고 생각했다.

선봉은 이 나라 고려의 최고 석학이자 사대부를 좌지우지하는 정몽주가 설 것이고.

“포은 선생.”

“왜 그러시오?”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오길 바라오.”

“음. 궁금한 게 있소.”

“얼마든지 물어보시구려.”

“재상 총재제가 구현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려고 하시오? 아. 군웅할거의 극복은 당연한 거고.”

“포은 선생은요?”

“되묻지 말고요.”

엄한 정몽주의 표정.

왕선은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제 개혁이지요.”

“역시.”

“왜 그러시오?”

“그건 삼봉의 꿈입니다. 두 사람이 아주 잘 맞는군요.”

“···삼봉 선생과 이 사람을 동률에 두지 마시오. 무척이나 불쾌하오.”

“하하하. 그것도 똑같군요.”

“무슨 말이오?”

“엊그제 삼봉을 만났지요. 오랜만에 거하게 한잔했고요. 그때 삼봉도 대감과 엮는 걸 칠색 팔색하더이다.”

“···부끄럽소. 그 사람을 제일 군사로 두고 있다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 나라 고려 군웅에서 가장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거지요.”

“됐소. 포은 선생은 뭘 하고 싶소?”

정몽주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삼봉을 집정 대신으로 만들고 싶소.”

“···난세로군요.”

“하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오?”

“재앙이거나.”

“하하하.”

“그리고 그건 곤란하오. 재상 총재제의 초대 집정 대신은 이 사람이 할 거요.”

“이런. 자리다툼이 치열하겠군요.”

“뭐. 포은 선생이 하겠다고 하면 백번이라도 양보하리다.”

“이 사람에게 맡기면 곧장 삼봉에게 넘길 거요.”

“아수라의 재림이 펼쳐질 거요.”

“하하하. 일러줄 겁니다.”

“사과하리다.”

두 사람은 농을 주고받으면서 한참이나 웃어댔다.

참으로 기분 좋은 밤이었다.

정몽주와 헤어진 뒤 왕선은 천천히 밤길을 걸었다.

이성계 일가가 모두 동북면으로 달려갔는지라 오랜만에 호위도 없었다.

이 평화로움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오랜만에 만끽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느닷없는 염불.

왕선의 고개가 돌아갔다.

-참으로 고약한 관상이로다.

...이건 또 뭘까.

옛날에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다.

...정도전과의 첫 만남.

머리를 세차게 저으면서 정도전의 모습을 내쳤다.

“대사께서는 어째서 이 사람의 걸음을 막는 것이오?”

“시주의 관상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리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관상이 왜요?”

“어지럽습니다.”

...이 나라에는 길 가다가 시비 거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이제는 불제자까지 덤벼댄다. 미륵사의 관선이 이 사실을 들으면 피를 토하면서 격노할 것이다. 왕선은 무려 미륵불의 현신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아닌가.

어쨌거나 이 무례한 승려의 말에 까칠하게 답해주기로 했다.

“뭐 눈에 뭐만 보이는 법이지요.”

“허허.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이것 봐라?

왕선은 흥미가 동했다.

“대사의 법호가 무엇이오?”

“소승의 법호는 무학이라고 합니다.”

...무학?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아. 그 유명한 땡중이시구려.”

자애롭게 웃던 무학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의 세 치 혀는 가열차게 움직였다.

“이성계가 왕이 될 거라는 해몽을 한 그 땡중. 쳐죽일 역적의 씨앗.”

“!!!”

“당신 말이야. 서까래에 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살아. 세 치 혀도 조심하고.”

무학의 눈은 충격으로 얼룩졌다.

왕선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내뱉었다.

“옴마니 반메홈?”

< 100화 무신정권과 재상총재제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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