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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99화 (99/187)

< 99화 대놓고 궁예질 >

이성계는 한참 서책을 들여다봤다.

고개를 수차례 갸웃거리기도 했고, 넘기지 않고 한 구절만 뚫어지라 쳐다볼 때도 있었다.

또, 때로는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으나 이성계는 멈추지 않고 서책을 탐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앞에서 기다리는 하륜과 조준의 체감에 미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시간이 버티기 힘든 것이 아니라 이성계의 노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침묵하며 이성계의 입이 열리기만을 바랐다.

“음.”

...이성계의 입에서 소리가 났다.

하륜과 조준은 움찔했으나 조금 더 기다렸다.

두 사람이 기다리는 건 소리말고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훌륭하군.”

드디어 말이 나왔다.

하륜과 조준은 이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렇습니까?”

“학문에 통달한 두 사람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전장에서 칼만 휘둘러온 이 무지한 놈이 볼 때는 너무나도 놀라운 신세계일세.”

이성계는 부드럽게 웃었다.

삭막하던 공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훈풍이 불었다.

“그런데 말일세.”

...훈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렇게 훌륭한 말을 적은 서책에 통달한 두 사람이 함께 도모한 일이 참으로 엉망이더군.”

“···주공.”

“왕선이 어떻게 동북면의 일을 알고 있지?”

“······.”

“내가 분명하게 일렀어. 쥐새끼도 모르게 일을 처리하라고 말일세.”

이성계는 수하의 잘못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질타하는 건 그만큼 이번 일의 후폭풍이 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사. 말해보게.”

“···송구합니다. 주공.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지. 아니지. 대책은 말해야지.”

“······.”

대책을 쉽게 수립할 수가 없었다.

명백한 조작이었다. 없는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조준의 고개는 더 내려갔다.

“음. 대책도 없다? 하륜. 자네는 할 말이 없나?”

“···얼마 전 대동군과 만났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선전포고했습니다.”

이성계의 손에 들려졌던 서책은 볼품없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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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어렵게 갈 필요도 없습니다.”

“동의하오.”

“당장 최영 대감께 사실대로 말하면 됩니다.”

“좋소.”

“아무리 최영 대감이 이성계를 아낀다고 하더라도 이런 협잡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겁니다.”

“그럴 거요.”

“···또한, 최영 대감의 성정이라면 이성계의 머리에 불벼락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하오.”

정도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군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소이까.”

“대답을 너무 건성으로 하지 않습니까.”

“몰라서 묻소?”

“아는데 왜 묻습니까.”

왕선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조금 전에 군사가 말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런데 그 사실을 굳이 책 읽듯 지루하게 다시 언급하니 어쩌겠소. 그냥 무시하자니 어쨌거나 열심히 나불대는 군사가 무안하지 않게 건성으로 답변이라도 해준 거요.”

“······.”

“이 사람은 나름대로 군사가 뻘쭘할까 봐 신경 써준 건데 막상 타박을 들으니 무척이나 서운하구려.”

“······.”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오.”

정도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왕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남은.”

“예. 주공.”

“이성계 측에서 상황을 엎을 가능성은?”

“불가능합니다.”

“확실한가?”

남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최영 대감이 모든 진실을 아는 겁니다.”

“좋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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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생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내 곁에 온 다음 행한 일은 다 틀렸던 거 같은데.”

“······.”

“나는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네만.”

“이번에도 실패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데도 책략을 내보겠다?”

“결정은 주공께서 하십시오.”

당돌하다면 당돌하고, 자신감이 넘친다고 본다면 또 그랬다.

그랬다. 하륜은 조준과는 달랐다. 조준이 확실하게 상명하복을 보이는 책사라면, 하륜은 제 위치에 따라서 움직였다.

또, 고지식할 정도로 정도를 추구하는 조준과는 달리 하륜은 아주 많이 유연했다. 해서, 이런 위기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건 하륜이 월등했다.

이성계는 하륜을 지그시 쳐다봤다.

“최영 대감의 손에 동북면의 자료가 들어가는 순간 일은 틀어질 것이네. 이를 막을 방도가 있다면 말해보게.”

“최영 대감의 손에 동북면의 자료가 들어가게 그냥 두십시오.”

“큰 실패를 했는데 또 도박하겠다는 건가?”

“딱 깨 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영 대감의 손에 자료가 들어가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을 인정하고 방도를 찾는 게 옳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대놓고 선전포고할 정도로 상대의 보폭이 커졌습니다. 이번이 우리를 타격할 결정적인 시기라고 생각할 것이니 이를 역이용한다면 대동군을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제대로 해낼 수 있겠나?”

“소생이 아니라 주공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이성계는 고개를 살짝 틀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세하게 말해보게.”

하륜은 크게 숨을 쉬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동북면의 위기를 진실로 만들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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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군 대감.”

도당으로 가던 왕선은 고개를 돌렸다.

“이성계 장군.”

“요즘 보기가 힘드오?”

“아. 요즘 바빴다오.”

“허. 바쁜 일이 있었소?”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지요.”

“이 사람이 알아도 되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하하하. 조만간 알게 되실 거요.”

이성계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거 기대되오.”

“실망하지 않을 거요.”

“참으로 좋소.”

“하면, 이 사람은 최영 대감을 만나야 해서요.”

“이런. 이 사람이 한발 늦었구려.”

“하하하. 먼저 만나보시겠소?”

“아니외다. 늦게 왔으니 늦게 만나야지요. 아. 그리고 대감.”

“예.”

“일전에 이 사람의 책사에게 아주 뜻깊은 말씀을 하셨소?”

“아. 선전포고 한 거요?”

이성계가 황당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협잡도 적당히 하셔야지요. 안 그렇소?”

그말을 끝으로 왕선은 도당으로 들어갔다.

이성계는 당장이라도 쫓아서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참았다. 어차피 왕선이 저렇게 설쳐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얼마후, 도당으로 들어간 이성계의 눈에 심각한 표정을 한 최영이 보였다.

“이 장군.”

“예. 대감.”

이성계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최영의 입에서 왕선이 건넨 동북면의 일이 나오기만을.

바로 그때가 왕선을 도당에서 밀어낼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었다.

“동북면의 일을 들었네.”

“대감께서 어찌 아셨습니까?”

“조금 전 대동군이 말해주더군.”

“음. 그렇습니까? 대동군이 동북면의 일에도 관심이 많군요.”

“그만큼 심각한 일이긴 했네. 이 장군. 정말인가?”

“이런. 앞뒤를 다 자르고 말씀하시면 소직이 어찌 답할 수 있겠습니까.”

동북면의 위기가 조작된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보기만을 기다렸다.

“동북면의 위기 말일세.”

됐다.

이성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

“일전에 자네가 동북면이 어지럽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잘 해결됐다고.”

“그랬지요.”

“이 사람아. 왜 내게 거짓말을 했나.”

추궁이 시작됐다.

이성계는 흡족했다.

“진작에 내게 사실대로 말했어야지.”

...그런데 추궁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

이건 추궁이 아니라 걱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뭔가 이상했다.

“호바투가 동북면을 어지럽히다니.”

...그걸 어찌?!

이성계의 이성이 정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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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을 나온 이성계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이 장군.”

웃음이 가득한 목소리.

이성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걱정이 아주 크시겠구려.”

“······.”

“이런. 이 사람이 실언했군요. 상승 불패의 명장께서 직접 출정하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이까. 무운을 빌겠소.”

“···대동군 대감.”

“응? 이 사람을 불렀소?”

왕선은 봤다.

이성계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가는걸.

이 담대한 사람도 지금 이 순간만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것이다.

악수를 덮고 반격을 잘 준비했는데 완전 나가리가 됐으니까.

그 결과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호바투와 전쟁을 치러야 하게 된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왕선도 미칠 노릇이었다.

너무 기뻐서.

*****

“잠시. 잠시만.”

“예?”

“음. 이 사람이 생각해도 가능성이 없는 거 같기는 한데.”

바로 직전에 시작할 것을 명한 왕선이 갑자기 머뭇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왕선은 장고에 돌입했다.

이번 수로 사실상 전면전이 시작된다.

각오한 일이다.

...그런데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다.

작은 실수가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의 장자방이었던 정도전을 뺏었으나 이성계는 그 자체로 이성계다.

...신중해야 한다. 선수를 취하여 공세를 가하는 걸 신중히 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수를 확실하게 알고 움직이고자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남은이 호언장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럴 때 쓰라고 관심법이 있는 것이다.

“일단 보류하지.”

적어도 한 달. 상대의 수작질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움직인다.

그리고 이성계의 수작질을 알게 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대놓고 북풍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호바투의 침략을 유도해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개 쌍놈들이 아닐 수 없다.

*****

왕선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이 장군?”

“···아니외다.”

“음. 알겠소. 아. 그리고 이 나라 고려의 왕실과 조정 그리고 만백성이 장군의 승전고만을 기다리고 있다오. 대승을 기원하리다.”

“······.”

그때 왕선이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질책하듯 호통쳤다.

“거.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어벙하게 서 있어?”

이성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입에서 진득한 살기가 새어 나왔다.

“지금 뭐라고 했소?”

“응? 아. 이 장군 말고요.”

왕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아.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천목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다.

“거참. 왔으면 왔다고 해야지. 아. 이 장군. 하면,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왕선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천목아. 나 떨고 있냐?”

“···앞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이놈의 심장이 철렁였습니다.”

“티 많이 나더냐?”

“대놓고 이성계 장군한테 한 말이었지요.”

“지금 우리 쳐다보고 있어?”

“예.”

“나 지켜줄 수 있겠지?”

“앞으로 나세 장군과 다니십시오. 그러면 될 겁니다.”

“그렇군. 그러면 지금은 빨리 가자.”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서 퇴궐했다.

그런데 본 궐 앞에 뒷짐 진 채로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하륜이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이죽거리면서 웃고 있다.

-황급히 걸어 나오는 꼴을 보니 아주 당황한 모양이군.

왕선은 분명한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갔다.

“···또 뭡니까?”

“앞으로 자네 고생길이 훤해 보여서.”

쫓기듯 궐을 나온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느긋한 목소리.

하륜은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진 것을 느꼈다.

-서,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았네. 아니지. 설마가 당신들 잡았어.”

“!!!”

“호바투. 열심히 막게.”

하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대, 대체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

왕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떻게 알기는. 내가 미륵이라고 했잖아.”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무슨 말은. 방금 속으로 생각했잖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

-미, 미친놈이로다.

“미친 건 네놈들이지. 설마하니 일을 덮으려고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오게 하다니 말이야. 뭐. 어쨌거나 고려의 국방을 위해서라면 처리해야 할 놈이긴 했지. 호바투. 그놈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입 다물어. 벌레 들어가니까. 벌레 불쌍하잖아.”

왕선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하륜이 움찔했다.

그리고 왕선의 손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쫄았어?”

“!!!”

이번에는 싱긋 웃었다.

“쫄기는.”

아주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미륵은 자비로워서 사람 잘 안 패.”

덧붙였다.

“그런데 적당할 때 죽이기는 해. 너 같은 잡놈은.”

다리에 힘이 풀린 하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 99화 대놓고 궁예질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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