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98화 (98/187)

< 98화 또 다른 결심 >

정도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혼자서 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아예 술을 드시고 오십니다?”

“아.”

“정말 백주에 객사하고 싶으십니까?”

“아. 고려에서 제일 안전한 사람과 함께 있었다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포은 선생과 한잔했소이다.”

“···음. 안전하긴 하군요. 포은 앞에서 칼 들고 설쳐댈 정신 나간 인사는 없으니까.”

그건 아니야. 정신이 멀쩡한데 설쳐대는 인사가 있어.

그렇지만 지금 이 시국에 그 한 명이 정몽주 앞에서 설쳐대지는 않을 거니까.

“바로 그거요.”

“그건 그런데 왜 계속 웃고 계십니까?”

“느꼈소?”

“···이건 또 뭐하자는 겁니까?”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원 역사에서 함께 하지 못했던 애절한 두 사람이 함께하는 미래가 그려진 거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뭡니까?”

“포은 선생과 이 나라의 미래를 논의했다오.”

“포은은 맨날 그럽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재상 총재제.”

정도전의 고개가 확 돌려졌다.

“설...마?”

“동의하더군.”

“!!!”

“이만하면 술 마시고 다녀도 되는 거 아니오?”

“저, 정말 포은이 재상 총재제에 동의했습니까?”

“거. 내가 언제 이런 거로 허튼소리 했소?”

“저, 정말입니까?”

“정말이래도.”

왕선은 처음 봤다.

이렇게 기뻐하는 정도전의 모습을.

너무 좋아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묘했다.

“거. 진작 말이라도 해보지 그랬소?”

“···그러게 말입니다.”

아. 말실수.

원래 정도전의 재상 총재제는 역성과 함께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말할 수 없었겠지.

“어쨌거나 더 힘냅시다.”

“물론입니다.

정몽주에게 침 바르는 대업에 성공한 왕선은 기분 좋게 푹 자고 다음 날 콧노래를 부르면서 도당에 들어갔다.

“······.”

그런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다수는 사나웠고, 소수는 난처함을 보인다.

여기서 소수는 최무선과 문익점이었고, 다수는 대부분의 재상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관심법이다.

도당의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한 왕선의 입꼬리는 크게 올라갔다.

그러자 대다수 재상은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최 장군.”

“아. 오셨소?”

“일전에 보내주신 화약 병기 제조법은 잘 받았습니다.”

“그, 그렇소? 하하. 무탈하게 전해졌다니 다행이구려.”

재상들의 눈초리는 찢어질 듯 올라갔다.

그랬다. 도당의 재상들은 최무선에게 화약 병기를 공개하라고 강력한 압박을 넣고 있었을 것이다. 좋게 말해서 압박이고 정확하게는 협박이다.

“아. 그리고 문 선생.”

“말씀하시오.”

“목화씨.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감의 원군으로 산청이 안정을 도모했소. 그런 말을 넣어두시오.”

“이런. 이 사람이 실언을 했군요. 혈맹끼리 말입니다.”

“하하. 그래. 혈맹. 혈맹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외다.”

“과연 그렇소. 그렇지 않아도 화약 병기 제조법을 산청에도 전달했소이다.”

눈치를 보던 최무선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대놓고 화약 병기를 언급하면 혈맹을 강조하는 왕선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오. 그렇습니까? 이거 산청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겠군요.”

“부끄럽소이다.”

“혹시라도 이 사람의 힘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왜구가 호되게 당했으니 큰 걱정은 없소이다.”

“음. 그게 아니더라도 난세인지라 곳곳에 강도가 설쳐댑니다.”

강도는 다른 군웅을 말한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래저래 일손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이 사람의 수하를 보내서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병력을 주둔시켜서 방비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

이는 군사적인 역량이 부족한 최무선과 문익점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반면, 호시탐탐 화약 병기를 노리는 다른 군웅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아. 그리고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남상이 영천과 산청을 오가면 장사를 원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두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내용이다.

가뜩이나 상업이 부진해서 거점이 낙후한 상황이지 않은가.

그런데 남상이라는 거대한 집단이 조직적으로 상업을 한다면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왕선의 제안이 내포한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바로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최무선과 문익점으로는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 아니, 엎드려서 절이라도 할만한 일이다. 두 사람은 크게 반색했다.

세 사람의 모양새를 지켜보던 재상들은 이를 악물었다.

군현 동맹 체결 당시 최무선을 홀대한 일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화약 병기의 힘이 이 정도 일줄 알았다면 무조건 군현 동맹을 체결했을 것인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느린 것이다.

왕선은 아주 흡족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성계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별초는 천하제일이다.

...아이고. 어련하실까.

그때였다.

“주상 전하께서 납시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친정을 행하는 군왕도 잘 오지 않는 도당이다.

한데, 일선에서 밀려난 왕이 들이댔으니 재상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 어디에도 군왕을 향한 올곧은 애잔함은 없었다.

“하하. 과인이 괜히 들른 건 아니겠지요?”

...다들 왜 왔냐고 쳐다보고 있는데 못 느끼는 걸까?

물론, 최영은 황급히 나서면서 말했다.

“아니옵니다. 전하.”

“다들 바쁠 테니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고 가겠습니다.”

“예. 전하. 이르시옵소서.”

“수시중.”

왕우는 최영의 손을 잡았다.

이는 간곡함을 표출한 것이며, 노신 최영의 마음을 미리 선점하고자 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왕선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그렇지. 어명을 무시하면 도당의 결의를 끌어낼 것이다.

왕선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왕우의 입이 움직인다.

그러나 왕선이 빨랐다.

“전하. 신 대동군 왕선. 참담한 심정으로 고하옵니다.”

“···고하세요.”

“일찍이 왜구가 이 땅을 유린할 때 군현의 군웅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중앙군이 편성되었사옵니다.”

“그래서요?”

“그런데 이 엄중한 시기에 협잡을 펼친 인사가 있사옵니다.”

왕선은 곁눈 길로 이성계를 쳐다봤다.

그랬다. 이성계는 동북면이 위중하다는 핑계로 왜구 토벌에 참전하지 않았다. 왕선은 관심법으로 그것이 협잡이었다는 걸 알았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하여, 왜구 토벌전에 남은을 참전시키지 않고 개경에 남겼다. 그라면 이성계가 협잡을 펼쳤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남은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중앙군을 조직하던 시기 이성계가 최영에게 보고한 동북면의 엄중한 사태는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완벽한 증거도 확보했다.

개경에 도착한 뒤 이 사실을 듣고 수없이 고민했다.

어차피 군웅할거의 시대다.

이성계를 탄핵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설령 탄핵하더라도 이성계는 동북면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이 시대 군웅으로서의 위치를 박탈하는 방법은 오직 철혈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더 고민했다.

이걸 어찌 사용해야 이성계에게 크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탄핵하거나 군웅의 위치를 박탈할 수 없는 이 시점에서 그가 가장 타격을 입는 건 무엇일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왕우의 신뢰를 잃는 것.

두 번째는 최영의 신뢰를 잃는 것.

...그런데

-이성계를 이르는 건가? 그래. 이성계로구나.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증거를 확보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그 일의 배후라는 걸 알아낸 것일까?

억겁의 분노가 치밀어왔다.

일국의 군왕이라는 작자가 제 권력을 위해서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협잡을 펼친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음.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작금의 고려는 중앙군을 편성하려면 군웅의 동의가 필요하지요. 동의 여부를 탓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그러나 과인은 대동군의 그러한 충심을 잊지 않을 겁니다.”

왕우는 일단 일을 봉합하고자 논지를 흐렸다.

왕선의 표정은 참으로 냉랭해졌다.

...오늘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

이 정신 나간 망할 놈과는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나 내칠 수는 없다. 단지 숨만 쉬고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하자면 완벽하게 손발을 잘라야 한다.

오늘 도당에서 이성계의 입지를 완벽하게 내릴 것이다.

그러면 왕우의 정치적 공간은 무너지게 된다.

...그게 맞다. 그게 옳다. 이 미친놈은 자신이 고려를 삼키려는 괴물과 손을 잡았다는 걸 모르고 있지 않은가. 괴물을 살찌게 해주고 있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고.

그때

“참으로 옳사옵니다.”

정갈한 목소리.

정몽주였다.

왕우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정몽주를 쳐다봤다.

절대 정몽주가 허튼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한데, 오늘 도당에서 다른 군웅의 재산을 탐내는 언행이 있었사옵니다.”

왕우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화약 병기는 군웅의 재산. 이를 강제할 수는 없지요.”

오늘 도당을 찾은 이유는 화약 병기를 공론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몽주가 나서서 그걸 막아섰다. 심지어 그 논리는 자신이 조금 전에 꺼낸 그것이었다.

그리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흔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가 나섰기 때문이다.

고려 최고의 석학.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말은 어명.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글은 교지.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존재는 군왕.

어명에 살고 교지에 웃고 군왕만을 위해서 숨 쉬던 정몽주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하옵고 전하.”

“···말하세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작금의 고려는 수렴청정이 이뤄지고 있사옵니다.”

왕우의 눈동자가 크게 철렁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주상께서 이처럼 도당에 나서시는 건 태후마마에 대한 예가 아닌 줄 아옵니다.”

“······.”

“또한,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아주 쐐기를 박았다.

“훗날을 위해서 학문에 정진하소서.”

공부나 하란다.

왕선은 감탄하며 정몽주를 쳐다봤다.

이래서 모범생이 삐딱선 타면 무섭다고 하는가 보다.

결국, 왕우는 도당에서 초라하게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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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을 나온 왕선은 이를 악물고 강안전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상상도 못 했다. 이번 일에 군왕이 개입되어 있을 줄은.

“진짜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최악은 피했어야지.”

이제 더는 왕우의 지랄을 넘길 수 없게 됐다.

지랄병이 골수까지 번지기 전에 얌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역시 이성계를 정리해야 한다.

그게 가장 좋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어디 보자.”

당장 떠오른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다.

동북면 내부를 교란하고 개경에서 이성계를 끝장낸다.

그러면 된다.

군웅할거를 지탱하는 나머지 군웅은?

...그냥 솔직히 우습다.

왕명을 명분으로 삼고, 최영과 손을 잡으면 된다.

어명이 내려졌음에도 버티는 군웅 중 본보기로 삼아 역적으로 덮어씌워서 그냥 밀어 버리면 된다.

강고한 중앙군의 힘이 보이고, 지엄한 왕실의 위력이 증명되는 순간 이 나라는 정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곧장 해야 할 일은 정리할 때였다.

“자주 보는군요.”

참으로 반가운 목소리다.

왕선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하하하. 그렇습니까?”

간사한 웃음.

하륜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이라도 한잔할까 해서 찾아왔지요.”

“그럴 시간은 없고.”

“음. 보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길게 말할 생각도 없고.”

하륜은 시종일관 웃음을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왕선은 그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 매섭게 노려봤다.

“이봐. 협잡을 펼치더라도 적당히 하자고.”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적어도 백성의 목숨을 볼모로 지랄하는 건 안 해야지. 안 그래?”

“대동군 대감.”

“미륵의 분노가 네 머리통을 박살 낼 수가 있다고.”

그러자

“큭. 미륵의 분노?”

하륜은 박장대소했다.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벌써 취기가 오르셨군요. 큭. 크게 웃고 갑니다. 미륵의 분노라니. 큭.”

왕선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퍼억!

거칠게 하륜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눈이 철렁였다.

왕선의 입에서는 이 땅의 열기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새어 나왔다.

“네 처 백부 이인임처럼 뒤지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설쳐.”

“!!!”

“개처럼 기어 다니라고. 영원히 꼬리나 흔들면서.”

< 98화 또 다른 결심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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