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97화 (97/187)

< 97화 정몽주, 너 내꺼하자 >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된 대 왜구 토벌전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아니, 마무리됐다. 합종연횡으로 이뤄진 군현 동맹이 아주 큰 힘을 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2만 명의 왜구와 500여 척의 왜선을 격퇴한 왕선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왕선이라는 이름 두 자가 아주 선명하게 각인 된 것이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대동군이 아주 큰 공을 세웠어요. 왕실의 체면을 살린 겁니다. 과인은 아주 흡족해요.”

왕우는 흡족하게 웃으면선 연신 왕선을 치하했다.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내 발목을 잡아대는구나.

속내는 아주 달랐다.

-대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방해하는 것이냐.

-아직도 몰라? 왕선은 용상을 탐내고 있는 거다.

-요, 용상을? 내 자리를?

-태후에게 아부하고 백성을 홀리고 왕의 길을 막고. 누가? 왕족이. 딱 봐도 나오지.

-!!!

-막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아.

...아주 그냥 지랄하고 있다.

왕선은 이제 웃기지도 않았다.

가끔 조금 많이 가끔 정도전이 역성을 한 이유가 이해가 될 정도다.

“신은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하하하. 그래요. 그렇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과인이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이르시옵소서.”

“이번에 화약 병기가 아주 큰 활약을 했다고 하던데.”

“예.”

“그 무기를 더 확대 생산하면 고려의 국방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의 군왕은 자아가 분열되어서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단히 뛰어난 정치적 안목이나 수로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다.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량 생산에 돌입할 계획이옵니다.”

“그래요. 대량 생산. 그걸 나라 전체로 확대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옵니다.”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한 왕우는 크게 반색했다.

“그래요. 역시 대동군입니다.”

“아니옵니다. 이 나라 고려의 국방을 위해서 화약 병기를 더 많이 생산하는 건 바람직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재상이 관심을 두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성과가 나올 것이옵니다.”

“예. 바로 그렇... 대동군.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아뢰었사옵니다.”

“음. 과인이 아둔하여 이해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지금 대동군의 말은 마치 각자 자력으로 화약 병기 제조법을 알아내서 생산할 것이라고 말하는 거처럼 들리는군요.”

“신의 뜻을 이리도 잘 파악하셨는데 어찌 그런 참담한 표현을 사용하시옵니까.”

왕우의 반응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왕선은 아주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벌써 퇴궐하려고 합니까? 과인은 대동군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태후전에 들러야 하옵니다.”

“······.”

“이후 다시 알현을 청하겠사옵니다.”

“···아닙니다. 퇴궐하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선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강안전을 나섰다.

“휴.”

손에 잡히는 힘은 하나도 없으면서 욕심이 왜 저렇게 많은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군왕으로 섬기면서 이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거대한 끔찍함이 거침없이 밀려왔다.

...정도전하고 진지하게 다시 대화해볼까?

나쁜 생각이 들었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렇다. 최소한 명덕태후 수준만 되더라도 나쁘지 않다.

아니지. 왕선의 관점에서 따진다면 명덕태후야말로 재상 총재제에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권위를 가졌으나 굳이 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나라 고려의 대소사가 본인의 재가를 받아서 진행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다. 정치적 입장이 조금 다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즉, 그녀는 이 나라 고려에서 가장 존귀하고 위엄있는 존재. 이런 정치적 수사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그러면 뭐하나.”

자고로 암군이 정치를 등한시하면 축복에 속한다.

가장 큰 재앙은 암군이 의욕을 가지고 뭔가를 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왕우가 그 최악의 길을 힘차게 가려고 하고 있다.

“정말 소름 돋게 무섭군.”

차라리 놀고먹기만 하면 좋을 건데.

고약한 생각이 꼬리를 이어갈 때

“뭐가 그렇게 무섭길래 그러오?”

밝은 목소리.

정몽주였다.

“아. 포은 선생.”

“한숨이 너무 커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이다.”

“포은 선생이 이 사람을 모르는 척하고 가려고 하길래 일부러 그랬소.”

“이런. 이거 마음이 통하지 않았군요. 실은 오늘 대동군을 만나려고 했는데.”

“오. 그래요?”

“어떻소? 이 사람과 술 한잔하시겠소?”

“포은 선생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지.”

정몽주는 빙그레 웃으면서 앞장섰다.

“거. 박연 폭포 말고 다른 데로 갑시다.”

“일단 따라오시구려.”

그렇게 정몽주가 앞장선 곳은 역시나 박연 폭포였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주변 경치를 건성으로 돌아봤다.

“언제봐도 절경은 아닌 거 같소.”

“허. 일전에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셨소만.”

“가끔 와서 봐야 절경이오. 생각해보시오. 여기서 집 짓고 살면 이 경치가 마냥 좋기만 하겠소? 그냥 일상의 연속 그 자체일 것을.”

“하하. 딱히 틀린 말씀은 아니구려.”

“그게 아니라 맞는 말이외다.”

정몽주는 싱긋 웃으면서 술잔을 내밀었다.

왕선도 어깨를 으쓱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주상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소?”

“아. 이 나라의 국방을 걱정하시더이다.”

“국방?”

“화약 병기를 나누자고 하시더군요.”

“음. 해서, 뭐라고 하셨소?”

“열심히 하면 다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했지요.”

정몽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왕우의 표정이 훤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나라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왜구가 모두 격멸되었소. 주상께서는 그 점에 주목하시어 국방을 더 튼튼하게 하려고 하셨을 거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언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일까.

물론 지금 보이는 모습도 진짜다. 겉과 속이 짜증 날 정도로 일치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정몽주를 만날 때 쓸데없이 속내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건 같은 말을 연속으로 듣는 것이다. 자고로 아무리 좋은 말도 두 번은 듣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왕선은 덤덤하게 술을 마시면서 물었다.

“거. 삼봉 선생과 자주 보시오?”

“그 인사가 요즘 바쁜지 잘 만나주지 않더이다.”

“자주 만나지 마시오.”

딱 잘라 말하는 왕선.

정몽주의 얼굴에는 근심이 어렸다.

“···삼봉에게 무슨 일이 있소?”

“까마귀 노는데 백로가 가는 거 아니라고 했소.”

“하하하. 삼봉이 까마귀라는 것이오?”

“딱히 떠오르는 표현이 없어서 까마귀를 가져온 거요. 냉정하게 말하면 이 말을 까마귀가 들었다면 무척이나 기분 나빠 했을 것이외다. 확실하오. 이건 까마귀에 대한 모독이오.”

“가끔 느끼는데 대동군은 말씀을 무척이나 재밌게 하오.”

“과찬이외다.”

“이 사람은 이 정도로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오. 한데, 우리 백성은 언제 그럴 수 있을지 걱정이외다.”

이거 이제 본론이 나오나 보다.

왕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화약 병기를 내놓지 않는 것이오.”

“어째서 그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소?”

“화약 병기가 국방을 튼튼하게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외다. 그러나 군웅할거를 더 고착화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오.”

“군웅들이 화약 병기로 제 잇속을 차릴 거라고 보시오?”

이거 말이 길어질 거 같다.

그래도 길게 해보기로 했다.

왕선은 시원하게 술을 마신 뒤 말했다.

“딱 깨 놓고 말합시다. 이미 이 나라 왕실의 권위는 무너졌소. 군왕의 권능은 나라를 지킬 수 없으며, 도당의 정치력은 백성을 거론할 수도 없는 수준이오. 아니오?”

“제대로 보셨소.”

“더 적나라하게 말하지요. 최영, 이성계, 정지, 박위와 이 사람까지 포함한 군웅 전부가 다 역적이오. 아니오?”

“신하라는 작자들이 영지를 만들고 사병을 동원하여 군현을 점령하고 각지에서 전투를 일으킨다오. 역적도 그냥 역적이 아니지. 아주 그냥 제대로 역적질하는 거요.”

...이거 너무 적나라하게 질타하는데?

“포은 선생. 노략질하는 왜구는 백성을 괴롭히는데 군웅들의 전투는 아니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앗아가는 건 둘 다 똑같지. 내 삶을 무너뜨리는 것도 둘 다 같고. 본질은 같다오. 왜놈들은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군웅은 아니라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오.”

“잘 아는군요. 오늘 이 사람의 속이 아주 시원해졌소이다. 나라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졌으니까 군왕의 권능이 살아날 수 없고 도당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지요. 아주 정확한 지적이외다.”

온화함이 가득하던 정몽주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냉정함만 있었다.

“왕실이 화약 병기를 보유한다면 미약하게라도 권위가 살아날 거요. 이 사람은 대동군이 이 일에 나서길 바라오.”

“포은 선생. 만일 왕실이 멀쩡하다면 가장 먼저 누가 죽겠소? 이 사람 대동군 왕선. 틀렸소?”

“맞소. 대감이 일 순위요. 막강한 사병을 가지고 미륵으로 칭송받는 왕족. 다른 군웅보다 압도적으로 군주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포은 선생. 지금 군웅할거를 일시 중단시킨 게 누구요? 지금 이렇게라도 군웅들이 개경이 모여서 왕실의 눈치를 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누가 한 일이오?”

왕선은 오른손 엄지로 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요. 나 왕선이란 말이외다.”

“압니다.”

“이 나라 왕실을 유지하는 사람은 나란 말이외다. 이 사람이 가진 힘이 왕실의 힘이오. 그런데 화약 병기를 제조법을 다 공개하라고요? 그렇게 하면 군웅할거는 더 가속화될 거요. 삼국시대로 회귀할 거란 말이외다. 그래서 이를 꼭 쥐고 공개하지 않는 것이오. 힘의 격차가 커져야만 이 망국적인 군웅할거가 정리되지 않겠소?”

격하게 내뱉는 왕선의 말이 끝나자 잠시간의 침묵이 생겼다.

조용히 술잔만 오가다가 마침내 정몽주의 입이 열렸다.

“하나만 묻지요.”

왕선은 정몽주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당신도 사해 용왕의 핏줄이기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소.

“포은 선생. 이 나라 고려는 천년을 갈 것이외다. 그게 이 사람이 역적 아닌 역적질을 하는 이유요.”

“천년 고려라. 태조 대왕의 후손이 용상에 앉아 있기만 해도 고려는 맞지요.”

“나 용상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시오.”

“화약 병기라는 힘은 걱정을 가지게 하더군요.”

“선생은 군왕에게 충성하는 것이오?”

정몽주의 눈이 꿈틀였다.

“당연하오.”

“나는 고려에 충성하오.”

“대감. 듣기에 따라서 불경하다고 느낄 수 있소만.”

“이렇게 묻지요. 고려와 군왕.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쩔 거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오.”

“군왕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지 않소이까.”

“충심으로 보좌하면 될 일이오.”

“그래서 가정하는 거요. 군왕이 죽어야만 사직을 연명할 수 있다면?”

“그런 가정은 없소.”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은 원의 간섭을 받았소만? 이처럼 불가항력의 상황은 발생할 수도 있는 거라오. 먼저 답하리다. 이 사람은 미련 없이 군왕을 버릴 거요. 선생은?”

“다시 말하지요. 사해 용왕의 핏줄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상당히 불편하오만.”

정몽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왕선은 차분하게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천년 고려의 절반은 군왕이 통치했으나, 앞으로의 500년은 군왕이 통치하는 고려가 아닐 것이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왕선은 간결하게 답했다.

“재상총재제.”

“!!!”

정몽주의 눈이 흔들렸다.

“반병신이 군왕으로 있어도 백성이 태평가가 부를 수 있는 나라.”

확신을 담았다.

“황음무도한 인간이 군왕으로 있어도 국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더 강한 확신을 담았다.

“영원한 태평성대가 이뤄지는 나라.”

더욱더 강한 확신을 담았다.

“협잡과 찬탈이 아니라 토론과 정치가 이뤄지는 나라. 내 나라 고려.”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몽주를 주시했다.

“해서, 이 사람은 고려에 충성하오.”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갑시다. 포은 선생. 천년 고려의 초석을 쌓으러.”

왕선은 정몽주의 답변을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여유 있게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몽주의 입이 열렸다.

“묻지요.”

“예.”

“대감이 생각하는 고려의 군왕은 무엇을 하오?”

“군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소.”

정몽주는 말없이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다섯 잔이 넘어갈 때였다.

“화약 병기.”

술잔을 내렸다.

“대감이 잘 관리하는 게 좋겠군요.”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이 나라 최고의 석학께서 해주신 조언을 어찌 어기겠소.”

오늘 포은 정몽주의 절반을 얻었다.

< 97화 정몽주, 너 내꺼하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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