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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96화 (96/187)

< 96화 전주이씨, 그 살벌함의 진수(pm1시25분 88% 내용첨부) >

거대한 태풍이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으나 태풍이 지나간 자리다. 그 여파가 가벼울 수는 없었다.

“과격해도 이렇게 과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도전은 분기를 숨기지 않았다.

“무뢰배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거. 이제 와서 왜 이렇게 흥분하시오?”

“예?”

“아까는 아주 공손하게 있더니?”

“허. 소생이 언제 그랬습니까?”

“아까.”

“허. 주공.”

“군사의 말대로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무뢰배의 그것이었소. 평소 군사의 언행을 보며 강하게 질타할 줄 알았는데.”

“주공.”

“내가 두 눈으로 아주 확실하게 봤소이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아주 정중하게 있지 않았소이까. 군사가 그런 자세를 취할 줄 아는지 이번에 알았소이다.”

사실은 아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제대로 막아서려고 할 때 왕선이 등장해서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이를 떠올린 정도전은 울컥하여 강하게 따져댔으나 왕선은 아주 가볍게 일축해줬다.

“어쨌든.”

좌중을 돌아봤다.

“오늘의 이 불미스러운 일을 절대 잊지 맙시다.”

창칼을 휘두르며 싸운 건 아니었으나 왕선의 심장부에 대놓고 들이닥친 이성계다.

절대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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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전주의 밤바람이 참으로 시원하고 좋았다.

조만간 개경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편안한 전주의 밤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자 오늘도 밤길을 나섰다.

“전주의 밤을 이토록 즐기지만 이대로 가면 전주의 밤은 없어지겠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전주의 밤은 왕선의 자긍심이었다.

일몰 이후 인기척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전주였다. 어둠은 사람의 발걸음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 밤을 밀어내고 백성의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고요하고 편안한 전주의 밤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인해 아쉬움은 있었으나 바람직한 변화였기에 이 또한 흡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서 걷다 보니 다시 고요한 밤이 시작됐다.

갈수록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해졌다.

“뭐. 그렇다고 밤을 완벽하게 정복할 수는 없으니까.”

당대의 발전은 당대의 수준에 맞게 이뤄질 뿐이다.

밤을 정복하는 건 먼 훗날의 일이 될 것이다.

그때

“밤을 정복한다? 참으로 발칙한 발상을 하고 계시는군요.”

앳된 목소리.

그러나 묵직한 무게가 담겼다.

왕선은 어둠에 가려진 상대를 살폈다.

“또 뵙습니다. 대감. 소생 이방원입니다.”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다.

...그런데 이 만남. 우연일까?

왕선은 고개를 살짝 틀면서 물었다.

“음.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이런. 소생이 반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물어봤네만?”

“아. 송구합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가?”

“예.”

이방원은 뒷짐 진 채로 천천히 다가왔다.

왕선은 기분이 묘했다.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장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통 밤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아주 반가운데 오늘은 희한하군.”

“그렇습니까? 이거 아쉽습니다. 소생은 대감을 만난 게 아주 반가운데 말입니다.”

“아. 이 사람은 아닐세. 반가웠으면 자네 손을 잡고 술 먹자고 했을 것이네.”

“함께 숨을 마시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지 다음에 마시자는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이방원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대신.”

“대신?”

“소생이 생각나면 가끔 술을 올려드리지요.”

그때

-그르르릉

땅바닥을 긁어대는 철퇴 소리가 들렸다.

...이거 확실하게 어디선가 들어본 장면이 맞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 놀라운 상황에 직면한 왕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봐. 지금 나와 해보자는 건가?”

“소생이 왜 대감과 뭔가를 하지요?”

“음. 지금 나와 완력으로 겨뤄보자는 거 같은데?”

“아직 소생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말씀드리지요.”

이방원이 한걸음 다가왔다.

그르렁거리는 철퇴 소리도 가까워졌다.

“소생은 누군가와 뭔가를 겨루지 않습니다. 그냥 합니다.”

다시 다가왔다.

“소생의 아버님께서는 철칙을 하나 가지고 계시지요.”

“내가 알아야 하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뭐. 들어나 보지.”

“그 철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가문의 일원을 핍박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데 명분 역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렇지요. 철칙 위에 행함의 명분이 필요하신 분이지요. 그런데 소생은 다릅니다.”

땅바닥을 긁어대는 철퇴 소리가 커졌다.

“소생은 명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지. 자네는 명분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아닙니다. 아주 좋아합니다.”

이방원이 또 한걸음 다가왔다.

“결과가 명분이고.”

거리는 더 좁혀졌다.

“힘이 명분이며.”

이방원의 목소리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었다.

“내가 명분입니다.”

확신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확신.

“해서, 소생은 그냥 죽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냥 죽이면.”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느새 땅바닥을 긁어대던 기분 나쁜 철퇴 소리가 멈췄다.

“예. 맞습니다. 소생에게 명분이라는 건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지요.”

이방원의 목소리는 한기를 담은 듯 스산하게 울렸다.

“조영규 대장.”

“예.”

“밤바람이 춥습니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왕선은 정말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 개 같은 경우가 있을까?

...정몽주가 정말 이렇게 한 번에 갔구나.

...심지어 정몽주는 백주에 도모했다지?

이래서 사람들이 이방원, 이방원 하는구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과단성이 아닐 수 없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겪어보니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영규가 다가왔다.

“참나.”

헛웃음을 내면서 말했다.

“조영규라고? 무장이라면서 이렇게 허술하다니.”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 말과 동시에 왕선은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그리고 엄지와 중지를 이용해서 딱 소리를 냈다.

-딱

기분 나쁜 철퇴의 거슬림이 잠시 멈췄을 때 울린 그 소리는 무척이나 컸다.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앙!

세찬 파공음을 내며 화살이 조영규의 철퇴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퍼어억!

조영규는 황급히 철퇴에서 손을 뗐다.

-탁

다시 손가락 딱 소리가 울렸고

-쏴아아아아아아아앙!

재차 파공음이 울렸다.

-퍼어억!

이번에는 이방원의 바람 앞에 꽂혔다.

순간적으로 거센 정적이 치밀어 오를 때 왕선이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지. 안 그런가?”

“소생은 그런 거 안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좋아. 오늘 제대로 해보지.”

“소생은 그것도 안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 안 하는 것도 많군.”

왕선의 까칠한 목소리가 끝날 때 이옥이 싸늘한 기세를 보이면서 다가왔다.

이방원은 입술로 혀를 핥더니 싱긋 웃었다.

“강궁으로 유명한 이옥 장군이시군요.”

“······.”

“오늘 귀하의 활 솜씨는 잘 구경했습니다. 충분히 자랑할만한 실력이긴 합니다. 그런데 소생의 부친이 누구인지 잊었습니까?”

이방원이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

이옥의 눈썹이 씰룩였다.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나를 도발하나?”

“사실을 말한 겁니다. 장군의 활 솜씨에 대한 정확한 평가. 설마 소생의 부친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겁니까?”

“···내가 자네에게 활 솜씨나 자랑하려던 걸로 보이나?”

“물론 아니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승 불패의 명장이시자 신궁이신 이성계 장군의 오남에게 활 솜씨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뭐.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이옥 장군의 이번 행위가 너무 경우가 없었다는 게 핵심이니까요.”

“허. 자네 뭐라고 했나?”

“소생과 조영규 대장에게 화살을 날렸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는데 말입니다.”

“그 흉측한 철퇴로 대동군 대감을 위협했었네만.”

“조영규 대장은 철퇴를 주로 사용하지요.”

“······.”

“소생의 호위무사이기도 하고요.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아. 그러니까 억울하다?”

왕선이 끼어들었다.

이방원은 가볍게 응수했다.

“억울? 음. 소생은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정말 안 하는 게 많군. 세상 참 불편하게 살아?”

“소생은 세상을 살지 않고 움직입니다.”

“진짜 달변이군. 정도전도 기겁할 정도로.”

이방원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불문에 부치도록 하지요. 크지 않은 소란이었으니까요.”

“내가 거절하면?”

“거절이라니요? 소생이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누군가와 겨루는 걸 안 한다고요.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자네 정말 미꾸라지 같군.”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방원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말했다.

“아.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때 관청에서 싸웠으면 누가 이겼을까요?”

그러더니 히죽 웃는다.

“언젠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소생이 꼭 만들어 드리지요.”

그러면서 등을 돌렸다.

“아. 그런데 대동군 대감. 또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자네는 먹고 싶은 것도 많을 거야.”

“물론입니다. 여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혹시 말입니다. 소생이 대동군 대감의 호위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고 보시는 건 아니겠지요?”

“허.”

“그러면 개경에서 또 뵙겠습니다.”

이방원은 진한 미소를 보이며 확실하게 자리를 떠났다.

왕선은 정말 진심으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와 씨발. 겁나 살벌하네.

“주공. 괜찮으십니까?”

“아아. 몸은 괜찮은데 정신이 안 괜찮네.”

“참으로 무례한 사람입니다.”

왕선은 짓궂게 웃으면서 슬쩍 말을 던졌다.

“죽일까?”

그 말 속에 담긴 성질을 읽은 이옥은 가볍게 대꾸했다.

“진심이십니까?”

“야밤에 기습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럴 거면 관청에서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가별초와 전면전입니다.”

“그렇지? 음. 그런데 그때 싸웠으면 어찌 됐을 것 같나?”

이옥은 골똘히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나세 장군, 마천목 대장 그리고 소장. 셋 중에 한 명은...”

“죽었을 거 같나?”

“아니요. 살았을 겁니다.”

“음. 두 명이 죽었다?”

“이지란 장군도 보통은 넘으니까요.”

“갈 길이 멀군.”

“···그리고 이방원? 심계가 대단하군요. 대성할 재목입니다.”

대성하지. 아주 제대로 대성하지.

이 땅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로 대성하지.

제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새긴다고.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어쨌거나 나라 꼴이 엉망이다 보니까 별일을 다 겪는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군호를 받은 왕족에게 이리할 수는 없지요.”

“그랬다가는 죽지. 정말로.”

“군왕의 의지에 따라서 멸문지화에 처할 수도 있고요.”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그 군왕의 의지가 별로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금의 고려는 역모라는 사안 자체도 별로 힘을 내지 못하는 정국이었다.

과거 연합군이 북상할 때 이인임이 꺼낸 역모, 반란군이라는 명분이 연합군을 와해시킬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정국이었다.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이 나라 왕실이 지금 이 정도의 권위라도 가지고 있는 건 주공과 최영 대감의 힘이거늘. 어찌하여 주상께서는 동북면에 의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속을 어찌 알겠나. 어쨌거나 원래 고려 최고의 전력을 가진 이성계일세. 작금의 군웅할거는 그에게 축복에 가까운 정국이 되었고. 거기에 주상의 신임까지 더해졌으나 누가 막겠나. 대놓고 저래도 어찌할 방법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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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개경에 잔류한 남은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료를 살피고 서찰을 써 내려갔다.

모든 내용을 직접 파악하면서 빠진 내용이 없는지 몇 번에 걸쳐서 확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밀교원들이 보낸 자료를 조합하던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썩은 미소를 지었다.

걷잡을 수 없는 노기가 새어 나왔다.

“이 시국에 이런 협잡질이나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서찰을 와락 구겼다.

< 96화 전주이씨, 그 살벌함의 진수(pm1시25분 88% 내용첨부)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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