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전주이씨, 그 살벌함 >
정도전은 고개를 기괴하게 틀어댔다.
“왜 그러오?”
“···이성계 장군의 오남 말입니다.”
“이방원?”
“예.”
아. 이건 운명의 사다리가 연결된 걸까. 그건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딱 보니까 이방원에게 꽂힌 거 같다.
어찌 이렇게도 딱 꽂힐 수가 있을까.
“마음에 안 드오?”
“그건 아닙니다만.”
“그런 거 같은데?”
“정말 아닙니다. 오히려 대성할 그릇으로 보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곁에 두고 가르치고 싶을 정도로.”
“···진심이오?”
“예.”
그러다가 당신 죽었어.
이방원이 어떤 사람인데.
...말해주고 싶다. 너무 말해주고 싶다.
목이 빠삭빠삭 타들어 갔다.
멱살 잡고 정신 차리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이방원이 당신 죽여! 그 좋아하던 술 마시다가 죽는다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미친놈 소리 들을 게 뻔하다.
“특히 눈빛이 마음에 들더군요.”
...당신 죽을 때 마지막으로 본 눈빛이라서 그래.
그 눈빛이 보통 눈빛이 아니거든.
“호부견자는 없다고 하던데. 과연 이성계 장군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후대가 두 사람을 뛰어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음. 그건 아니야. 이방원 아들이 신화를 뛰어넘는 신화, 전설을 뛰어넘는 전설이거든.
그러고 보니까 그 집안은 3대가 어마어마하네. 단명한 4대도 뛰어났고, 5대도 뛰어났을 거라고 추정되고.
...뭐. 그러면 뭐하나. 전주이씨가 고려 왕조에 자행한 악행을 벌하기 위한 절대적인 존재가 다 말아 먹어버렸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정도전은 입술을 잘게 깨물면서 말을 이었다.
“묘하게 기분이 나쁩니다.”
“······.”
“다 마음에 드는데 기분이 굉장히 찝찝합니다.”
“······.”
“이방원을 칭찬할수록 기분이 더러워지기도 합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설마 소생이 시기라는 불필요한 감정을 가진 건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했소?”
“정말입니다. 소생은 포은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께서 어련하시겠소.”
“바로 그겁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소생과 딱 어울리는 말이지요. 잡소리만 전한 석가가 바른말을 하나 남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도전은 영 개운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금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의 정체를 파악해내지 못해서 답답한 거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해주리다.”
“음. 아무쪼록 이 답답함을 해소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방원의 아들은 이 땅의 전설이오.”
정도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등을 돌렸다.
매번 왕선 본인이 정도전에게 무안을 주려고 하던 행동이다.
...이거 당해보니까 기분이 아주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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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아까 그 삼봉 정도전이라던 그 사람 말입니다.”
“대동군의 제일 군사를 말하느냐?”
“예.”
이방원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생각이 깊어질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이성계는 아들의 말을 기다렸다.
아직 어리지만, 식견만큼은 다른 형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리기에 틀린 판단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성계 본인이 잘 중재하고 일러주면 될 일이다. 해서, 이방원의 생각과 말을 항상 귀담아들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아쉽다?”
“소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그는 아버님과 함께했다면 그 능력을 아주 잘 발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하. 이 아비와 말이냐?”
“예. 혹시 소자가 실언한 겁니까?”
이성계는 옅게 웃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삼봉 선생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평했지.”
“평했다고 하셨습니까? 혹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일러주실 수 있습니까?”
“포은 선생.”
그 묵직한 이름을 들은 이방원의 눈에는 아쉬움이 거칠게 휩쓸었다.
“···삼봉 선생을 포섭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건데 말입니다.”
“그처럼 뛰어난 인사를 책사로 둔다면 좋은 일이지. 그러나 일가를 이룬 세력의 제일 군사이니라. 쉽게 처신을 할 리가 없지.”
“예. 해서, 더 아쉽습니다. 만일 아버님이 더 빨리 그를 만났다면 좋았을 겁니다.”
...만일 아버님께서 동북면이 아니라 개경에 있었다면 삼봉 선생을 곁에 두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그럴 장소와 때를 마련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생각을 조금 고쳤다.
...하늘이 야속한 게 아니라 이 나라 고려의 썩은 귀족들이 제 보신만을 위하고자 부친을 경계한 탓이다. 혁혁한 공을 세워도 개경 진입을 결사적으로 막은 그 무리 때문이다.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이성계는 연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방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다.”
“···아버님.”
“그러니 화를 다스리거라.”
“송구합니다.”
“괜찮다.”
“소자가 모든 이의 자리를 대신할 그릇이 될 겁니다.”
참으로 대견한 아들이다.
하지만 이방원의 경직을 풀어주고자 농을 건넸다.
“음. 그전에 손자나 안겨다오.”
이방원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래야지요. 소자의 아들은 전주이씨를 더욱 빛낼 겁니다.”
“당연한 일.”
부자의 소소한 대화가 이어질 때 손님이 찾아왔다.
이성계는 환하게 웃으면서 반겼다.
“하하하. 참으로 오랜만일세.”
이문정의 아들 이백유였다.
“가주. 잘 지내셨습니까.”
“자네 덕에 무탈하네. 아. 방원아. 인사드리거라.”
“이방원입니다.”
“아. 가주의 오남이 영특하다는 말을 익히 들었는데 직접 보니 소문이 한참 부족하군요.”
“하하하. 이 사람아. 아직 부족한 아들일세. 칭찬만 계속하면 길이 어긋날 수도 있으니 자네가 잘 좀 지도편달 해주게.”
“제가 그럴 능력이나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 자네의 학식은 전주이씨에서 최고로 손꼽히지 않나. 아. 아니군. 춘부장께서 계시군.”
아버지 이문정이 거론되자 이백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성계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나? 그러고 보니 춘부장께서는 왜 함께 오시지 않았나? 혹시 어디 편찮으신가?”
“···가주.”
이문정의 참담한 목소리.
이성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켜보던 이방원의 표정은 묘하게 뒤틀렸고 눈은 가늘어졌다.
“위중하신가?”
이백유는 이를 악물었다.
*****
“아버님. 가문의 가주가 전주에 왔습니다.”
“······.”
“응당 찾아뵙는 게 도리이고 이치입니다.”
“······.”
아들의 재촉에도 이문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백유는 답답했다.
“아버님. 무슨 말씀이라도 꺼내 보십시오. 어찌 이렇게 침묵하십니까.”
“···허락을 받지 못했다.”
드디어 열린 이문정의 입.
이백유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찌 그걸 걱정하십니까. 하지만 알겠습니다. 소자가 먼저 가서 가주의 허락을 받아 오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만남을 청하는 거절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주 성대하게 환대할 겁니다.”
이백유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기세.
그러나
“주공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니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성계 장군이 아니라 주공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받아 올 수 있겠느냐?”
“···아버님.”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이 장군을 만날 수 있지.”
“어째서 왕선을 주공이라고 부르시고, 가주를 이 장군이라고 부르십니까.”
“말을 삼가라.”
“아버님. 가주라면 왕선의 겁박에서 우리 가문을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입 다물라고 했다.”
이문정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겼다.
이백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하게 이르겠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아버님.”
“너도 한시라도 빨리 대동군 대감을 주공으로 모시거라.”
“소자 죽어도 그리하지 못합니다.”
“네가 이제 이 아비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그 사악한 왕선을 섬길 수가 없는 겁니다.”
“썩 나가거라.”
*****
이백유의 말이 끝나자 이성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나. 춘부장께서 왕선의 겁박을 받고 있다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굴욕에 당했습니다.”
“허.”
“심지어 아버님을 고자라고 희롱하기도 했습니다.”
“이...”
이백유는 울부짖듯 외쳤다.
“가주! 부디 전주이씨를 바로 잡아 주십시오.”
“당장 관청으로 갈 것이다.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절대로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참으로 겁박이 맞습니까?”
눈썹을 살짝 찌푸린 이방원.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문정 선생께서는 이름난 대 유학자이십니다. 그런 분이 악적의 겁박 따위에 굴복하셨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아서요.”
“방원. 말을 삼가라.”
“송구합니다. 아버님.”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 또, 네 생각 밖의 범위에서 발생하는 일도 있다. 이번은 모두 해당하는 경우이기에 무척이나 경솔한 행동이다.”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곧장 이백유에게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닐세.”
그새 이성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성계의 철칙.
전주이씨의 일원을 핍박하는 이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 상대가 누구라도.
그리고
“활을 가져오라.”
넘치는 살기를 담은 목소리가 절대적인 권능의 저승사자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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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관청은 분주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종류는 농사직설을 배우고 가르치는 무리였다.
역시 백성의 주 관심사는 농사였다.
그들은 연신 입을 움직였다.
정말로 기분 좋은 왁자지껄.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소란이었다.
그곳에 다소 이질적인 무리가 나타났다.
이성계와 이백유, 이방원 등이었다.
“장군께서 관청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정도전이었다.
그는 말하면서도 이방원을 슬쩍 흘겨봤다.
또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적의와 살기를 감지했다.
그리고 이백유도 봤다.
...이거 아무래도 사달이 난 게 분명하다.
“왕선. 당장 데려오시오.”
“···장군. 참으로 무례하십니다?”
“당장 데려오라고 했소만?”
이성계의 눈에는 진득한 살기와 노기가 담겼다.
...이건 진짜다.
그 엄청난 기세는 정도전이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백성들이 보고 있습니다. 진정하시지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왕선을 죽일 수도 있소.”
“···말씀이 과하십니다?”
“아버님. 일단 진정하십시오.”
이방원이 끼어들었다.
그는 좌중을 가득 메운 백성의 분위기를 재차 살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번만은 소자를 믿어주십시오.”
“무슨 말이냐?”
“들었던 것과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이성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정도전의 눈에는 이채가 띄었다.
그리고
“이 장군께서 이곳은 어쩐 일이시오?”
빙그레 웃는 왕선이었다.
그리고 이성계 무리를 느긋하게 살피면서 이 사달의 원인을 알아냈다.
그 결과 더 여유로워졌다.
“이 선생을 만나러 온 거 같소?”
“···이 장군. 오랜만이외다.”
다소 딱딱한 어조.
불편함이 깃든 표정.
이성계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이 장군?”
가주가 아니라 이 장군이라고 불렀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아비의 말을 기어이 어겼구나.”
이문정은 곧장 이백유를 질책했다.
이백유는 질린 낯빛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아버님. 가주께서 모두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이 아비는 주공께 아무런 불만이 없다.”
“···이 선생. 지금 뭐라고 하셨소?”
“이 장군. 이 사람은 대동군 대감을 모시고 있소.”
“···다시 말해보시오.”
“여기까지. 이 사람은 이 장군의 말을 따를 이유가 없소이다.”
이성계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갈 때 이방원이 조심스레 잡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주변을 살피십시오.”
조금 전까지 이성계가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정말로 이문정이 왕선에게 겁박당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인 확신이 하나 더 있었다.
...이문정이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문정은 백성의 신망을 받지도 않았고, 제 발로 왕선을 섬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백성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이성계의 한계.
...지나칠 정도로 명분과 시선을 의식했다.
해서, 이 지경이 된 이상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늘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반면, 왕선은 여유로웠다.
모든 상황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소식을 접한 나세와 마천목, 이옥까지 달려왔다.
막말로 이성계가 미쳐 날뛰게 되어서 지금 붙게 되더라도 해볼 만했다.
...어쩌면 그게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관청에 활을 들고 난입한 이성계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은 명분이 있지 않은가.
그래. 이왕 이렇게 마음먹은 이상 제대로 굿판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왕선은 이죽거리면서 이성계를 주시했다.
“이 장군이 활을 든 채로 관청에 오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참으로 오랜만에 가문의 일원들이 모였습니다. 대동군 대감께서 자리를 만들어주신다기에 달려왔지요.”
이방원이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재빨리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한데, 관청의 공사가 다망하니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습니다. 좋은 날을 다시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는 저희 전주이씨가 대동군 대감을 모시겠습니다.”
참으로 공손한 언행.
싸늘했던 민심은 어느새 호의를 띄었다.
분위기를 살핀 왕선은 가볍게 일렀다.
“이 선생.”
“예. 주공.”
“손님을 배웅하시겠소?”
“관청의 정문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그러시오. 할 일이 많으니까.”
“하하하. 아니외다. 그럴 필요 없소.”
호탕한 이성계의 목소리.
-이문정.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죗값은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양해해줘서 고맙소. 그나저나 이 선생의 활약이 참으로 놀랐다오. 전주이씨의 이름값에 먹칠할 일은 추호도 없을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이성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거나 왕선은 양팔을 내밀면서 호기롭게 말했다.
“좋은 날 다시 보도록 하지요. 잘 가시오.”
확실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 95화 전주이씨, 그 살벌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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