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조선 건국 3대 주주 >
최근 왕선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크큭.”
입가에서 웃음이 쉬지 않고 새어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만세 삼창을 부르면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찢어질 만큼 좋았다.
그랬다. 처음 왕선이 되었을 때 만나지도 않았음에도 목숨의 위협을 줬던 이성계를 희롱하고 있지 않은가.
넘으려 해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태산보다 거대한 그를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쾌거가 발생한 것이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군사. 오셨소?”
“진즉에 와 있었습니다. 수차례 불러도 대꾸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아. 그렇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 기분이 좋아서 그런다오.”
정도전은 왕선을 흘겨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충분히 흡족하실만한 상황이긴 하지요. 대승을 거둬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세력범위까지 넓어졌으니. 음. 그런데 말입니다.”
“또 뭐요.”
“벼는 안 그러더라고요.”
벼는 익을수록 숙인다.
이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왕선은 해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됐고. 단종원은 좀 어떻소.”
“솜씨 있는 의원들에게 30일 기준으로 매번 충분한 대가를 준다는 말이 널리 퍼진지 오래입니다. 우스갯소리고 병자보다 의원이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지요.”
“다친 병사의 치료는 문제없겠소?”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밤새 진행될 정도로 격렬했던 임피 전투였다.
사상자만 수백 명에 이르렀다.
아무리 단종원을 잘 꾸려놨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부상자를 일시에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최선을 다하지는 않겠지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의원을 더 모아야지요.”
“음.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예. 그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거 많이 보던 전개다.
왕선은 헛웃음을 삼켰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소이다.”
“단종원에 참가하지 않은 의원들에게 도움을 청하자는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오.”
“물론이지요. 그냥 오란다고 오겠습니까. 그렇다고 창칼을 들이밀 수는 없고. 그러면 이 시국이 정리될 동안만 와서 거들라고 해야지요. 품삯을 기존 보다 더 많이 불러야지요. 초빙된 형식이니까.”
...놀랍다. 정도전의 입에서 급여를 이용한 특진 활성화 방책이 나오다니.
“물론 모든 의원을 빼 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있던 지역에도 병자는 있을 거니까.”
“최소한의 인력은 남겨두고 데려와야지.”
“예. 전 선생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음. 전 선생 쓰러지는 거 아니오?”
“인재가 더 필요하긴 합니다.”
“그건 개경에서 차차 논의해봅시다.”
정도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의원의 수는 항상 부족할 건데.”
“그건 이 사람에게 생각이 있소.”
“이르시지요.”
“조금 있다가.”
“아. 네.”
“그리고 전사한 병사의 가족들은 잘 배려하시오.”
“토지 정책에서 혜택을 주는 선까지 가능합니다.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그러니 절대 그들에게 따로 재물을 준다는 식의 무책임한 정책을 꺼내지 마십시오. 전주 관청의 곳간이 풍요롭기는 하지만 도깨비방망이는 아닙니다.”
눈치 더럽게 빠르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최무선 장군이 사람을 보내올 거요.”
“화약과 병기 제조는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조에 필요한 물건은 백거마가 구해올 거요.”
“남은 건 기술의 전수겠군요.”
“그래서 하는 말이외다.”
“듣고 싶군요. 조금 전에 소생을 약 올리던 내용까지 모두다.”
“군사.”
“소생 정도전. 대동군 대감의 군사가 맞습니다. 왜 계속 부릅니까.”
“이제 서원을 제대로 활용할 때가 됐소.”
“···서원이라니요?”
“서원은 이 땅의 서책이 모이는 곳.”
“그렇기도 하지요.”
“바로 그곳이라면 책이 잔뜩 쌓여도 문제가 없지 않겠소?”
“그건 당연하지요. 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습니까?”
왕선은 좌우를 살피는 시늉을 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륵사의 관선 대사에게 일러 목판 인쇄를 시작하게 할 거요.”
“···목판 인쇄라니요?”
“미륵의 글자로 책을 찍어 낼 것이외다.”
정도전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찍어낸다고요? 거참 희한한 표현이군요.”
“겉절이에 꽂히지 말고 본론에 집중하시오. 의술, 화포 제조, 농사직설 등 이 땅에 필요한 양서를 만들어낼 것이오. 아. 거룩하신 성현의 지껄임을 기록한 악서는 찍어내지 않을 거요. 그건 해롭기 이를 데가 없는 한자로만 남을 거라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내 글자로 찍어낼 책을 선정하는 거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성현의 말씀이 담긴 서책이 왜 악서입니까.”
“당신 성현의 가르침을 받았지요?”
“물론입니다.”
“악인을 만들었으니 악서지요.”
“···주공.”
왕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손을 내저었다.
“이 책은 서원에 보관할 거요.”
“···미륵의 글자는 철저하게 비밀 엄수가 되어야 하는 문자. 이 글자가 적힌 책을 서원에 넣어둔다면 누가 알아내겠습니까. 음. 그런데 사찰에 보관해도 안전하긴 할 건데.”
“거긴 사람의 발길이 잦아서.”
“음. 하긴. 서원만큼 함부로 발을 내딛기 어려운 곳도 없지요. 그 고결함은 쉽게 나올 수 없으니까요.”
“당연하오. 악인을 양성하는 곳인데.”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왕선은 또다시 빠른 속도로 손을 내저었다.
“밀교원 외 백성 중에서 총명한 이가 있다면 미륵의 언어를 가르칠 것이외다. 그들을 의원과 화약 전문가, 농사 전문가로 양성한다면 이 땅은 전례 없는 풍족함에 질식할 것이다.”
“음. 질식하는데 좋을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거요.”
정도전은 왕선의 말을 곱씹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 일의 책임자를 이문정 선생으로 할 생각입니까?”
왕선은 시원하게 웃었다.
“빙고.”
“···도솔천의 언어는 정말로 천박하군요. 그래서 옳다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까.”
“옳다는 것이외다.”
“음. 이 선생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그를 믿지 못하오?”
“주공의 사람이 되겠노라 맹세했으나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지요. 그는 처절할 정도로 덤벼댔던 인물이니까요.”
“아. 절대로 걱정하지 마시오. 이문정은 이 사람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오.”
“음. 그토록 자신 있다고 하신다면. 하긴, 이 선생의 학식은 대단하니 이참에 전 선생을 보좌하는 역할도 주면 적절하겠군요.”
“그새 이 선생에게 일 시킬 생각을 했소?”
“이 선생이 전주 관청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주공께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이성계 장군이 보면 참으로 좋겠다는 상상을 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왕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이 사람은 범인의 궤를 벗어나는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삼봉 정도전.”
이 시대 진정한 악인이 아닐 수 없다.
“하면, 이대로 집행하시오.”
“알겠습니다. 거는 기대가 큽니다.”
왕선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의 기술 교육학교화는 이 땅의 변화를 능동적이고 올바르게 추동해낼 것이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빙그레 웃으면서 정도전을 쳐다봤다.
“축하하오.”
“뭐가요?”
“바야흐로 서원이 악인 양성소에서 벗어났음을 말이외다.”
“진짜 해보자는 겁니까?”
“나는 군사가 개과천선하여 선한 사람이 되길 바라오. 자고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 않소이까. 잘못된 가르침으로 악인이 되었으나 아직 늦지 않았소.”
“좋습니다. 선전포고로 생각하겠습니다.”
“오. 거는 기대가 크오?”
정도전은 볼을 씰룩이더니 결기를 보이면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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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과 이성계 그리고 나세는 전방위적으로 왜구 잔당 토벌을 진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왜구의 잔당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실상 일대의 왜구 토벌이 마무리됐다.
“음. 최영 장군은 곧장 개경으로 가셨다고?”
“예. 대감을 보지 못하여 돌아간다고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내가?”
“예.”
“자네가 볼 때 이 사람이 서운해 보이나?”
“음.”
“응?”
“송구합니다. 어찌 소인이 최영 장군의 얼굴에 먹칠하겠습니까.”
“하긴. 자네가 그러긴 어렵지.”
부관은 왕선과 최영의 돈독한 사이를 알기에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옅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장군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됐네. 어서 가보게.”
“음. 소인의 입장도 생각해주십시오.”
“끙. 말해보게.”
“본인이 더 오래 사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아. 자네 이름이 임정유라고 했나?”
“예. 맞습니다.”
왕선은 과거 최영이 임정유에 대해서 한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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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유는 진주 태생으로 지선주사 임덕의 아들이었네.”
“해서요?”
“선왕 시절 동생 임정손과 함께 부친을 따라서 하동군을 지켰다네.”
“음.”
“어느 날 왜구가 야밤에 기습했는데 부친이 지병으로 도망치지 못하자 두 형제가 부축했다네.”
“효자군요. 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이제 흥미가 동하나 보군.”
“효자라면서요. 그러면 관심을 가져야지요.”
“그래. 왜구가 끈질기게 쫓아오자 임정유와 임정손은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지.”
“예.”
“동생 임정손은 제 몸으로 부친을 가렸고, 임정유는 화살을 쏘아댔다네.”
“동생이 전사했습니까?”
“부친을 살리고 죽었다네.”
“허.”
“해서, 왜구라면 치를 떠는 사람일세. 언제라도 자네가 왜구를 토벌한다면 임정유를 꼭 챙기게.”
“그런 사연이 있다면 반드시 그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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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전투에 자네를 부르지 못했네. 미안하네.”
“급박한 전황이었습니다.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그르치겠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아닙니다. 하면, 개경에서 뵙겠습니다.”
“···살펴 가게.
임정유가 전주 관청을 떠나자 곧이어 이성계가 묵직한 존재감을 내보이며 전주 관청으로 들어왔다.
오. 닭대가리들 많이 잡았나 본데? 분위기 장난 아니야?
왕선은 환하게 웃었다.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이 장군.”
“아니외다.”
담담하게 답한 이성계는 묘하게 웃으면서 관청을 살폈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었다. 벌써 이문정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릴 이성계의 모습이 선하다.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 이 장군의 본가가 이곳 전주이지요?”
“그렇소이다. 이곳에는 가문의 어른이 계시는데.”
“이문정 선생을 이르시오?”
“역시 알고 있구려.”
역시 이성계는 이문정이 왕선의 수하가 된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는 눈치다.
이거 기대감이 갈수록 커졌다.
어쩌면 전주로 오지 않고 돌아간 이원계는 신의 한 수를 던진 걸지도.
“잘 알지요. 이곳의 서원을 맡아서 후학을 양성하고 계신다오.”
이문정은 이성계에게는 가문의 어른이다.
아무리 수하라고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 함부로 이름을 부른다던가 하대하듯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아주 지극한 예법이었다. 왕선이 왕이면 또 모를까.
...그런데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게 생겼군.
...이성계가 아니다. 그의 뒤에 있는 앳된 청년의 속내였다.
-딱 봐도 백면서생에 불과한 인사거늘.
...뭔가 가슴속이 울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외다.”
이성계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왕선은 황급히 정신을 바로 잡았으나 그의 말은 이미 끝이 났다. 그러나 이성계가 친절하게 재차 말해주지는 않았다.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험험.”
“인사드리거라.”
그러자 앳된 청년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보여준 속내와는 참으로 다른 행동이었다.
“이방원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왕선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방원?”
“예. 이성계 장군의 오남 이방원이라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전장에 나서신다고 하셨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으나 견문이라도 넓히고자 참전했습니다.”
“···이성계 장군의 오남 이방원?”
“···예. 이방원입니다.”
이방원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왕선을 쳐다봤다.
-듣던 대로 기분 나쁜 인사로군.
그때
“이 장군께서 오셨군요.”
카랑카랑한 목소리.
정도전이었다.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자리에 조선 건국의 3대 주주가 모두 모인 것이다.
실로 기묘한 장면이었다.
...왠지 모르게 이 자리에서 빠져줘야 할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지 않겠는가.
음. 차라리 여기에 정몽주가 끼면?
...그건 지옥이구나.
< 94화 조선 건국 3대 주주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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