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닭 쫓던 개 >
이성계의 가별초는 빠르게 충청도로 진입했다. 그러나 중앙군에 결합하지는 않았다. 중앙군을 이끄는 최영에게는 서찰로만 소식을 전했다.
오직 앞만 보고 미친 듯이 진군했다. 무언가에 쫓긴다고 보일 정도의 속도였다.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자 엄청난 강행군을 감행한 것이다. 어느새 서주(서천)에 이르렀다.
“장군! 왜구를 포착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
이성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란이.”
“예. 형님. 가별초가 왔음을 적에게 알리겠습니다.”
이지란이 곧장 손을 내저었고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가별초는 일사불란하게 대라를 불었다.
그 즉시 이성계를 필두로 선봉이 맹렬하게 돌격을 시작했다.
자욱한 먼지가 지천에서 올라왔고, 온몸에 전율이 올라오게 하는 대라 소리와 심장을 움직이는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대라 소리를 들은 왜구들이 아연실색하여 도주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됐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 도주라는 행위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상승 불패의 명장이 친히 이끄는 천하제일의 가별초가 나선 이상 살아서 이 땅을 벗어날 수는 없다.
상대가 누구라도, 아무리 대군이라도 이는 반드시 관철되는 확고한 진실이다.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성계가 기세를 더 올리고자 활을 고쳐잡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가별초는 묵직한 함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기세는 하늘을 뚫었다.
점차 목표지점과 가까워졌다.
이성계는 화살을 꺼내 들었다. 신궁의 위력으로 전장의 시작을 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적진으로 보이는 곳의 분위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고 이성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보인 탓이다.
“여기서 보니 참으로 반갑소. 이 장군.”
피 칠갑을 하고 언월도를 들고 있는 무장.
나세였다.
“···나세 장군?”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벌써 몇 번째다.
화살을 잡은 오른손은 핏줄이 터질 듯 치솟았다. 이성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라 소리가 들리길래 깜짝 놀랐는데 역시 이 장군이었구려.”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나세의 머리가 날렸다.
조금 전까지 전장을 지배한 위타천의 위용이 오롯이 표출됐다.
...그 모습이 이성계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한데, 이 장군은 이번 토벌전에 참전하지 못한다고 들었소만. 어찌 된 일이오.”
이성계는 자연스럽게 화살을 내리면서 옅게 웃었다.
“동북면의 일이 잘 해결되었소. 그러니 응당 왜구 토벌에 참전해야지요.”
“오. 참으로 다행이오.”
“예. 한데, 보아하니 토벌이 마무리 단계인 거 같구려.”
나세의 입가에 미소가 주렁주렁 걸렸다.
이성계의 심장은 엄청난 속도로 피를 이동시켰다.
온몸에서 피가 파도를 쳤다. 피의 파도는 뇌리를 흔들면서 강하고 간절한 바람을 도출했다.
...왜구 토벌은 아직 진행되고 있어야 한다.
신뢰가 가득한 이성계의 눈을 보면서 나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 이성계가 본 그 끄덕임은 몸속에서 진행 중이던 파도의 강도를 극대화했다.
“그렇소. 저들은 모두 패잔병이외다.”
“과연 나세 장군이외다.”
거대한 파도를 이루던 몸속의 피는 마치 해일처럼 폭주했다.
심장은 해일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거세게 철렁였다.
철렁임은 심장을 새카맣게 태울 정도였다.
이성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과연 나세 장군이외다.”
웃음소리는 짧게 끊었다.
더 크게 웃어댔다가는 해일을 이루는 피가 역류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았소. 모두 대동군 대감의 안배였다오.”
...왕선. 또 왕선. 또 왕선이다.
이성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피의 해일을 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왜구의 잔당이 흩어져서 애를 먹고 있었소. 혹시 거들어 주실 수 있겠소?”
...몸통은 이미 왕선이 먹었다.
남은 잔챙이를 청소하는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나라 고려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상승 불패의 명장이 말이다.
“백성의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조속히 토벌해야 하오.”
“과연 이성계 장군이외다. 이런 의기라니. 이 장군이 와서 참으로 다행이외다.”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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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환하게 웃으면서 반겼다.
“이 장군께서 오셨소이까.”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소.”
“하하하. 고생이라니요. 이 나라 고려의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오.”
이성계는 감탄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동군 대감이시오. 그나저나 치열한 접전이었다고 들었소. 중앙군과 잘 연계했다면 더 손쉽게 적을 제압했을 건데.”
“그랬다가 왜구가 내륙 깊숙이 들어가면 백성의 고통이 커질 건 분명한 일. 이 사람의 병력이 더 손해를 보더라도 적의 예기를 꺾을 수만 있다면 그리 해야지요.”
“······.”
“치열한 접전은 분명했으나 그로 인해서 이 땅의 백성이 하루라도 빨리 평온을 되찾았으니 만족하오.”
이성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를 희롱하는 건가?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어쨌거나 이 장군이 온 덕에 왜구의 잔당을 토벌하는 일이 참으로 수월할 것 같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니 다행이오.”
“가별초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병사는 천하에 없으니 더욱 듬직하오.”
“과찬이오.”
이성계는 흡족하게 웃었다.
-...가별초가 도주하는 적이나 때려잡는 신세가 되다니.
왕선은 신이 났다.
오늘따라 이성계의 속내가 제대로 뒤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놀랐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를 수가 있을까.
일국을 창업하려면 이 정도 처세는 가지고 있어야 하나 보다.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야.
참으로 적절했다. 그래. 이 땅에는 이와 같은 말이 이었다. 왕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닭 쫓던 개.
이런 절묘한 표현이라니. 지금 상황을 동서남북으로 돌아봐도 완벽하게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나세 장군.”
“예.”
“이 장군과 잘 논의해서 왜구를 격멸해주시구려.”
“물론입니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감히.
그러니까 지금 왕선은 나세와 이성계를 동률에 둔 거다.
고려 무장으로서 입지를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나세는 왕선의 좌장이고 이성계는 동북면의 군웅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성계는 왕선이 상대하는 게 옳다. 보기에 따라서 조롱에 가까운 대접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보다는 나세 장군과 군략을 논의하는 게 더 좋지 않겠소? 두 분은 이 나라 고려를 대표하는 숙장이니.”
자연스럽게 행동에 대한 명분을 쌓았다.
이성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이 사람 역시 나세 장군과 오랜만에 합을 맞추려고 하니 무척 기대되오.”
“이 사람 역시 거는 기대가 크오. 두 분의 협공이라니. 벌써 덜덜 떠는 왜구의 모습이 생생하오.”
“과찬이외다.”
이성계가 너털웃음을 짓자 왕선은 싱그럽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이 수모는 반드시 갚겠다. 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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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은 수백의 병사를 이끌고 공주목을 점령했다.
한때, 지용기와 양분하여 치열한 쟁투를 벌이다가 최영의 개경 진군으로 양군 모두 철수했던 곳이었기에 상당히 민감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규모 왜구가 준동한 혼란을 틈타서 재빨리 장악한 것이다.
지용기로서는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으나 지금 이 시점에서 군웅 쟁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심지어 왕선은 2만의 왜구와 500여 척의 왜선을 격멸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 않은가? 이때 공주목을 두고 대립한다면 심각한 민심 이반은 물론이거니와 세간의 거센 지탄을 받게 될 것이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왕선은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의 절반을 장악한 고려 남부의 유력 군웅으로 단번에 자리매김했다.
또한, 이번 전투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최무선은 거점인 영천으로 돌아갔다. 물론, 돌아가기 전 왕선과 진한 술자리를 가졌다.
“장군. 약조는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이외다. 화포 제조 기술을 전주에 모두 전달하겠소.”
“이로써 우리는 완벽한 혈맹으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영광이외다. 대동군 대감.”
전란이 끝나면 최무선의 가치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모든 군웅이 그에게 손을 내밀 거다. 그건 절대로 차단해야 하는 일.
하여, 왕선은 최무선과 혈맹을 더 굳건하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임피에서 흩어진 왜구는 나세와 이성계의 합공으로 뿌리를 뽑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북쪽에서 남하한 최영이 지척에 도달하면서 왜구의 잔당 토벌은 끝을 향해갔다.
모든 건 순탄했다.
“고약한 인사 같으니라고.”
“하하하. 장군. 왜 그러십니까.”
“이 나라 고려에서 이 최영이 전장에 나섰는데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대동군이 유일할 것이외다. 주상께서도 이 사람에게는 편의종사권을 내리시거늘.”
최영은 아쉬움을 가득 담아서 왕선을 흘겨봤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본 왕선은 짓궂게 웃었다.
“이런. 전장에 나서지 못하시어 서운하신가 봅니다.”
“됐소.”
입맛을 다시는 최영.
“오늘 저녁에 작은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오셔서 여독을 좀 푸시지요.”
“아직 왜구 토벌이 끝나지도 않았거늘.”
“작전 회의와 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허. 이제 아예 대놓고 이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생각인가 보오?”
“어찌 감히 장군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곳에서는 제가 주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끙.”
“그러면 저녁에 뵙지요.”
최영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왕선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기에 더 반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대동군.”
“왜 그러십니까.”
“음.”
“장군?”
“아. 아니외다. 저녁에 보지.”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예.”
그리고 그날 밤.
왕선과 최영, 이성계, 이원계가 한자리에 모였다.
최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닭?”
“예.”
“허.”
“하필이면?”
“그냥 닭이 좋을 거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이 사람아. 이 난리 통에 재상들이 모여서 고기를 먹으면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소.”
반말과 하오체를 동시에 구사하는 최영.
정말로 언짢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능글거리면서 말했다.
“거. 장군께서는 드시지 마십시오.”
“허.”
“평소 즐기시는 물이나 드십시오. 제가 한잔 올릴까요?”
“허.”
최영은 말문이 막혔다.
이거 아무래도 어디서부터 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이성계를 쳐다봤다.
“이 장군께서는 닭을 무척이나 드시고 싶을 겁니다. 안 그렇소? 이성계 장군?”
“하하하. 물론이외다. 최영 장군. 오늘은 양보하시지요.”
“과연 이 장군이시오. 오늘 이 닭을 먹으면서 닭 떼처럼 도망 다니는 닭대가리 보다 떨어지는 왜구를 격멸할 방도를 마련하지요.”
이성계의 눈썹이 미세하게 살짝 꿈틀였다.
“물론이외다.”
“이 사람이 말하고 보니까 마치 닭 쫓는 몰이꾼이 된 기분이외다.”
“그것도 그렇구려.”
“음. 닭 쫓던 개? 뭐 그런 말도 있지 않소이까. 우리 오늘 이 닭을 잘 먹으면서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을 피할 수 있게 지혜를 짜내보지요.”
이성계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음. 닭 쫓던 개라. 참으로 적절하오. 하하하.”
이성계는 답하지 않고 시선을 살짝 돌렸다.
왕선이 닭다리를 하나 뜯어서 이성계에게 내밀었다.
“이 장군. 지붕만 쳐다보지 말고 이거 드세요.”
이성계는 보이지 않게 손을 꽉 쥐었다.
-······.
왕선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 93화 닭 쫓던 개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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