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힘과 힘 >
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이성계가 참전 의사를 밝혔네.”
“아우님의 사정이 괜찮아졌나 봅니다.”
“대체 무슨 사정이었을까?”
이원계는 최영의 목소리에 담긴 강한 의구심을 느꼈다.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아. 별 건 아닐세. 개인적인 궁금증? 뭐. 그런 것일세.”
최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리되면 외곽에 똬리를 틀고 있는 왜구를 확실하게 격멸할 수 있겠군.”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왜구의 규모가 여전히 수천 명입니다. 중앙군과 대동군 대감의 군세를 합친 수보다 많습니다.”
경기도와 강원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세력을 가진 최영이었다.
모든 병력을 중앙군에 집중시킬 수 없었다.
“물론 그렇지. 그러나 대동군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승산이 높아졌네.”
“그건 그렇지요.”
“당장 대동군에게 사람을 보내지. 기민한 작전을 짜서 왜구를 남북으로 포위하는 걸세.”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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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천운입니다.”
...천목아. 분위기 파악 좀 하자. 천운은 뭐가 천운이냐.
왕선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마천목을 쳐다봤다.
“예. 아지발도가 작전에 넘어오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일이 고약하게 되었는데 든든한 우군이 왔습니다.”
우군은 개뿔.
이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기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활로가 생긴 겁니다.”
정도전까지.
왕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먼 산만 쳐다봤다.
“음. 그렇다고 중앙군의 남하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 가뭄에 단비 같은 말.
심장에 새기고 만세에 기록할 주옥같은 말이 아닌가.
왕선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나세를 쳐다봤다.
네 사람은 왕선의 심리 상태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중앙군과 연계하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최무선 장군과 화약 병기나 만지작거리겠소.”
“주공.”
“군략이나 짜시오.”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알면서 왜 묻소. 중앙군의 남하를 마냥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그게 더 승산이 높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그런데 말이외다. 궁금한 게 있소.”
“이르십시오.”
“아군만 덤비면 필패하는 것이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임피 바다에서 나는 충분히 증명했소만?”
“···어찌 주공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더 높은 승산을 점친 겁니다.”
왕선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거참. 답답하군. 지금 뭐가 중요한지 전혀 모르는가 보군.”
“···소생이 무엇을 놓친 겁니까.”
“다른 장수는 나가 있으시오. 군사와 독대를 좀 해야겠으니.”
나세, 이옥, 마천목은 눈치를 살피면서 일어났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왕선은 날카롭게 내뱉었다.
“우리가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의 남하를 기다릴 동안 왜놈들이 착하게 기다려 준다고 하오?”
“소생은 단지 적을 더 확실하게 제압할 방편을 말씀드린 겁니다.”
“군사.”
“예. 주공.”
“잘 들으시오.”
왕선의 눈빛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이 왕선의 제일 군사라면 외부의 도움 없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야 하오.”
“···주공.”
“중앙군을 기다리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걸 군략이라고 꺼내지 말고. 그동안 미쳐 날뛰고 있을 왜놈들에게 당할 백성들은? 우리 터전은? 이런 건 생각해봤소?”
“······.”
“왜놈들이 이 땅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시오? 낙토라고 하더이다. 낙토.”
“······.”
“지금까지 이 나라 고려는 왜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중앙군이 오면 겨우 밀어내는 수준. 왜놈들도 그걸 아니까 미친 듯이 덤벼드는 것이외다. 패악질하다가 중앙군이 올 때 도주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이 땅은 그 잡놈들에게 낙토가 된 것이외다.”
노기는 점차 커졌다.
“이번에 아예 뿌리를 뽑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저들이 공격할지 모르오. 언제까지 외적의 침략에 노심초사해야 하오? 정치합시다. 내정도 챙기고. 백성들 살맛 나게.”
“······.”
정도전이 침묵하자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이 나라의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거요?”
정도전의 낯빛은 새파랗게 질렸다.
“주공. 소생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면, 똑바로 하시오. 민본은 거창한 게 아니라 살릴 수 있는 백성을 살리는 거요. 당신이 지금 지껄인 건 민본이 아니라 보신주의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마시오.”
단지 이성계를 견제하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아무리 이성계를 물 먹이는 게 중요하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대왜국토벌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끌면 왜구는 반드시 내륙으로 이동한다.
최영이든, 정도전이든 이걸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나는 분명히 말했소. 당신이 진정 나의 제일 군사라면 처신 똑바로 하시오.”
왕선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자에게 제대로 된 처방도 하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살릴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립시다. 그래도 안 될 때 사망선고를 해도 늦지 않소.”
홀로 남은 정도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밖으로 나간 왕선은 곧장 나세에게 말했다.
“출정 준비하시게.”
“예. 주공.”
“자네들은?”
“작은 생각을 피력한 겁니다. 어찌 주공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그러면 움직이시오.”
일단 간다. 가서 왜놈들이 내륙으로 이동할 엄두도 못 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투를 임피에서 끝낼 것이다.
결심을 굳힌 왕선의 표정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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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9천.
왕선의 병력은 3천. 물론, 그 이상 병력을 동원할 수는 있긴 하다.
둔전제를 집행하면서 여러 갈래의 정책을 수행한 결과는 상당했다. 그 성과물로 지금까지 왜구를 마음껏 짓밟은 것이다. 그러나 예비병의 수준이었기에 대회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는 임피 전투에 동원하는 건 적합하지 않았다. 괜히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무리했다가는 피해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화약 병기를 사용하면 전투는 더 효율적이겠으나 화약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임피 수전에서 대부분을 사용한 탓이다. 남아 있는 수량은 결정적인 작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비축하는 게 옳았다.
“주공. 왜구는 오성산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오성산이라.”
나세는 옅게 웃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 가파르지도 높지도 않은 오성산 정상에는 오성인의 묘가 있다.
백제 말 부여로 쳐들어가는 당나라 소정방이 오성산에 이르렀는데 다섯 명의 노인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들에게 길을 물었더니 ‘백제를 공격하러 온 적군에게 길을 가르쳐줄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 대로한 소정방은 노인을 모두 죽였다. 훗날 사람들은 다섯 노인을 오성이라고 불렀다.
“외세의 침입을 일갈한 충의지사가 혼이 있는 산이라. 왜놈들을 오성인에게 제물로 바치기는 딱 좋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뜻깊은 산에 왜놈들의 발이 디디고 있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바로 그겁니다.”
칼칼한 목소리.
정도전이었다.
“주공께서 아주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군사?”
“예. 군사 삼봉 정도전 맞습니다.”
“허. 이 사람은 군사가 폐관 수련이라도 하는 줄 알았소.”
“이 엄중한 정세에 그런 걸 할 리가 없지요.”
“오. 제대로 반성했나 보오?”
“누가요? 소생이요? 소생은 남에게 반성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어조.
이거 보아하니 제대로 된 계책을 가져온 게 분명하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은근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수들이 괜찮은 작전을 하나 가져왔는데.”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외다.”
왕선의 말을 들은 정도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부족하다?”
“음. 용 그림에 눈동자가 빠졌다고 할까요?”
“오. 군사가 그려볼 수 있소?”
“잊으셨습니까? 소생 삼봉 정도전입니다.”
“거는 기대가 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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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는 오성산에 주둔한 왜구를 도발하며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선혈이 낭자하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무자비하게 언월도를 휘두르며 왜구를 도륙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세는 물러나지 않고 더 가열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왜구는 여유를 찾으며 압박했다. 나세는 언월도를 휘두르면서 왜구의 움직임을 빠지지 않고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매 순간이 위기였다. 왜장 아지발도의 지휘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느 순간에 나세와 기병대는 사방을 포위당했다.
그때 나세가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퇴각한다!”
본진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뚫을 수가 없었다.
나세는 다급하게 다시 외쳤다.
“반대로 간다!”
기병대는 신속하게 나세를 따랐다.
발악하듯 창칼을 휘두르며 포위를 뚫으려 애를 썼다.
기병대의 피해 이상으로 죽어가는 왜구가 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지발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 나세가 미친 듯 뚫으려고 하는 방향은 금강이 있는 곳이다.
절대 생로라고 할 수 없는 방향이다.
빠르게 상황을 다시 살폈다. 이대로라면 쓸데없는 피해가 커진다.
판단을 내린 아지발도는 나세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기병을 이끌고 맹렬하게 추격했다. 고려군을 금강에 모두 집어 넣어버릴 생각이었다.
500여 기의 기병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속도를 늦추지 말라!”
피 칠갑을 한 나세가 악을 쓰듯 외쳤다.
“장군! 금강입니다!”
부관의 외침.
나세의 눈에도 금강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서슬 퍼런 기세를 보이며 왜구의 기병대가 쫓아오고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언월도를 고쳐잡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배수진을 친다!”
“예!”
결기를 보이면서 결전을 준비했다.
그 순간 아지발도가 돌격속도를 늦췄다.
왜장의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이 보였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나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진하게 흘렀다.
“최대한 고착상태를 유지한다.”
“알겠습니다.”
그 즉시 기병대는 자세를 고쳐 잡은 채로 적군의 돌격을 기다리는 모양새를 취했다.
아지발도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진군을 멈췄다.
“살려고 미친 듯 달려온 곳이 지옥의 아가리라는 걸 확인하고 정신이 나갔군.”
여유가 넘쳤다. 느긋하게 턱을 돌리며 나세를 조롱했다.
왜구들도 크게 웃으면서 고려군을 약 올렸다.
어차피 적의 목숨을 취하는 건 시간문제다.
승리는 자명하다. 그러면 적에게 이 절망적인 시간을 조금 더 주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푸하하하하하하!”
왜구들의 비웃음이 터졌다.
고조되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고려군 몇 명이 금강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지발도는 도저히 이 즐거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활을 꺼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사냥감을 하나씩 잡으면서 사냥의 즐거움을 최대로 만끽할 생각이었다.
그의 손에 화살까지 올려지자 왜구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어디 보자.”
마음껏 사냥감을 물색하던 아지발도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게 보였다.
“······.”
눈을 껌뻑였다.
참으로 익숙한 것이었다.
...군선이었다. 군선 한 척이 나타난 것이다.
“!!!”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주화가 방포됐다.
아지발도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고
“모두 몸을 숙여라!”
적장 나세가 외치자 고려군은 모두 말에서 내려서 몸을 엎드렸다.
아지발도도 황급히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주화의 불벼락이 내렸다.
지난날의 악몽이 떠오른 왜구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런데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방포 소리.
대경한 왜구들의 눈이 금강으로 향할 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가 내렸고, 사지가 찢길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금강을 뒤덮은 수십 척의 군선이었다.
몸을 납작 엎드린 나세는 전황을 살피면서 수시로 군선을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청색 깃발이 올라오는 걸 확인했다. 화약이 소진되었다는 신호.
즉, 드디어 반격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전군! 돌격한다!”
외침과 동시에 나세는 말에 다시 올라타며 돌격했다.
그 뒤를 기병대가 함성을 지르며 맹렬하게 따랐다.
겨우 정신을 바로 잡은 아지발도의 눈에 돌격해오는 나세가 보였다.
철저하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감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억겁의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억겁의 분노는 곧장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수십 척의 군선에서 병력이 상륙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두에는 창을 휘두르며 저돌적으로 돌격해오는 무장이 보였다.
아지발도는 이를 악물며 칼을 고쳐잡았다.
사방에 선혈이 낭자하고 피비린내가 공기를 잠식했다.
주인 잃은 팔다리가 넘쳐났고 시체는 갈수록 늘었다.
포위와 반격을 수차례 주고받는 살육전이 끝없이 이어졌다.
대낮에 시작했던 전투는 해가 떨어졌음에도 진행됐다.
어둠이 자욱하게 자리 잡았으나 창칼의 거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마천목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조금 전에는 적아가 불분명한 화살을 맞아서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치밀었다.
-부아아아아아앙!
묵직한 힘을 담은 아지발도의 칼이 휘둘러졌다.
발목의 출혈로 움직임이 불편한 마천목은 이를 악물고 창을 고쳐잡았다.
-부아아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아아앙!
그때 난전에 진압한 언월도가 아지발도의 칼을 걷어냈다.
“마대 장. 몸을 살피게!”
나세는 곧장 언월도를 휘두르며 아지발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혼전이 이어졌기에 적장을 제대로 잡아낼 수가 없었다.
아지발도를 공격하던 언월도는 다른 적군을 베었다.
나세는 거친 숨을 제대로 가다듬을 시간조차 가지지 못하고 다시 언월도를 고쳐잡았다. 그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자상이 가득했다.
그때 다시 아지발도가 눈에 보였다.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아지발도가 크게 도약하면서 칼을 휘둘렀다.
나세의 언월도가 움직이려고 할 때
-퍼어어어어어억!
이옥의 화살이 아지발도의 갑옷을 강타했다.
철갑을 뚫지는 못했으나 그 엄청난 위력에 아지발도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세가 무너졌다.
그리고
-부아아아아아앙!
나세의 언월도가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아지발도를 내리쳤다.
-촤차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언월도가 부러졌고 아지발도의 철갑도 박살 났다.
“아지발도!”
곧장 달려간 나세는 부러진 언월도를 내리찍었다.
-퍼어어억!
엄청난 힘이 실린 언월도가 아지발도를 짓눌렀다.
그렇게 아지발도는 즉사했다.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몰골로.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함성이 일었다.
왕선군은 기세를 몰아 맹렬하게 공격했고 지휘관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왜구는 미친 듯 도주했다.
그런데 그때야 알았다. 자신들의 앞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오연하게 흐르는 금강이 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치열한 접전의 순간 진영의 위치 자체가 바뀐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눈 부신 태양이 위용 찬 자태를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찬란한 모습에 눈을 찌푸리던 왜구는 옆에서 들리는 비명에 고개를 돌리다가 죽었다.
그렇게 태양의 제모습을 찾는 만큼 왜구는 죽었다.
새날이 밝은 것이다.
종말의 새날이.
군선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정도전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보셨습니까? 이게 바로 선진 병법입니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말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저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참으로 아름다운 새날이었다.
< 92화 힘과 힘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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