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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91화 (91/187)

< 91화 역사는 흐를까? >

애초 500여 척에 육박했던 왜구의 군선은 대부분 침몰했다.

자연스레 2만의 대군도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승이었다.

그리고

“······.”

“······.”

정도전과 이옥, 마천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당혹스러웠는지 입은 잔뜩 벌려진 상태.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이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늘도 속이는 기상천외한 군략을 사용해서 적을 타격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싸웠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

...이것이 어찌 가능하다는 말인가.

“유사 이래 만들어진 병법을 새로 써야 하는 사건이군.”

“그렇습니다. 이거 어쩌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기도 나오겠군요.”

혼란의 와중이었으나 정도전의 본성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마천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흘겨보며 타박했다.

“그건 너무 나갔네.”

“세상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우리 앞날이나 걱정하지.”

“예?”

“우리가 하늘을 날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아.”

“그냥 이긴 것도 아니고 적을 궤멸시켰으니 주공께서 좋게 넘어가시지는 않겠지. 대승을 거뒀다고 기분 좋게 웃고 넘어갈 거라는 환상 따위는 가지지 말게.”

왕선이 어찌 나올지 짐작이 간 마천목의 낯빛은 흙빛으로 변했다.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이 삼봉 정도전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원래 중이 자기 머리는 못 깎는 거요.”

저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도 이렇게 한기가 올라오지는 않을 거다.

세 사람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비릿하게 웃는 왕선이었다.

“···주공.”

“하하하. 여기 다 모여있었구려.”

저승사자라도 본 듯 정도전 등의 표정은 처참하게 썩었다.

그럴수록 왕선의 미소는 더 진해졌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 검지가 바닥을 가리키며 까딱거렸다.

정도전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하게 몰랐으나 왠지 모르게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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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거뒀으나 왜구 토벌전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 혼란에서 살아남은 왜구가 육지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큰 피해가 우려됐다.

본래 역사는 왜구가 내륙을 헤집고 다니다가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왕선은 왜구가 그때까지 설치게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선군은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했다.

“빠짐없이 보고하시오.”

“임피 외곽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일천 명으로 이뤄진 왜구들입니다. 모두 모이면 족히 1만 명은 될 겁니다.”

“많군.”

“예.”

“···예?”

“왜 그러십니까?”

왕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도전을 쳐다봤다.

“군략 안 내놓소?”

“그래도 됩니까?”

“지금 이 사람과 드잡이질을 하자는 거요?”

“송구합니다. 일전에 너무 질책을 들어서 혼이 나갔었나 봅니다.”

“군사의 혼백은 염라대왕도 싫어할 거요. 염라국을 난장으로 만들 생각일랑 하지 말고 어서 집중하시오.”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소생의 군략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선진 고려의 병법에서는 별 쓸모가 없긴 한데 낙후한 왜놈들에게는 제법 먹힐 가능성이 있을 거 같아서 그러오.”

“······.”

“없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머뭇거리시오?”

정도전은 울컥했으나 감히 따지지 못했다. 아직 임피 앞바다의 화약 냄새가 사라지지도 않았지 않은가.

어쨌거나 그런데도 울컥했다는 자체에서 정도전의 성질머리가 보통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모인다고 하더라도 패잔병에 불과합니다. 자고로 패잔병은 전장이 길어지는 반기지 않는 법이지요.”

“결국, 퇴각로를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소생이 만약 왜장이라면 1만 명의 집결과 함께 개경으로 북상할 거라고 엄포를 놓을 겁니다.”

“고려군이 황급히 진을 구축하면 전라도나 경상도로 빠져나간다?”

“예.”

“군사가 왜장이라면 그럴 거라는 거지요?”

“예.”

“음. 확실히 군사와 왜장 모두 구시대적인 전술을 펼치니까 비슷한 생각을 하는 보구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응? 이 사람이 뭘?”

“···계속 이러실 겁니까?”

왕선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말했다.

“어찌 알았소?”

“······.”

“돗자리 깔아도 되겠소?”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도솔천의 말이외다.”

“······.”

농지거리는 이쯤 하기로 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이오?”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요. 그래야 산발적으로 흩어진 왜구들이 패악질을 멈추고 하루라도 빨리 집결하지 않겠습니까.”

“음.”

“왜 그러십니까.”

“거기서 선진 병법을 하나 추가하지요.”

“······.”

정도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장수들은 민망한 듯 먼 산만 쳐다봤다.

그들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라서.

그러는 동안 개경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최영이 중앙군을 이끌고 남하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에 일궈낸 대승에 고무된 조정에서 서둘러 중앙군을 편성한 것이다.

왜구 토벌전에 지지부진할 때 개입하여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려던 왕우와 이성계의 표정이 궁금했다. 참으로 볼만할 것이다. 속으로 크게 웃어댔다.

“아. 또 숟가락 올릴 생각인가 보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다 합시다.”

“충분합니다.”

“그렇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둔전제를 행한 거니까.”

“물론입니다. 예비적 성격의 병력도 충분합니다.”

그랬다. 전녹생이 다져둔 내정의 진정한 힘을 발휘될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확실한 쐐기를 박아야 남은 찌꺼기라도 먹으려고 달려들 이성계를 완전 물 먹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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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이 보낸 서찰을 읽은 최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참 기가 막히는군.”

“왜 그러십니까?”

최영은 고개를 저으면서 서찰을 이원계에게 내밀었다.

“···중앙군의 남하를 멈추고 왜구의 북상을 차단해줄 것을 청하는군요.”

왜구의 공세에 노출된 백성의 안위도 잘 챙기라는 두서도 붙어 있었다.

“거 참. 이 최영이 어쩌다가 명령을 받게 되었는지. 세월 참 무상하고 야속하군. 서러워.”

“음. 집결하는 왜구의 규모가 1만 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개경으로 북상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긴 하지요.”

“허. 자네까지 이러긴가?”

“장군께서도 대동군의 청을 거절할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끙. 그렇긴 하지만. 괘씸해서 그렇다네.”

최영은 입맛을 다셨다.

“보아하니 아군이 개경 방비에 나서는 모양새로 왜놈들이 판단하게 하려는 거겠지. 감쪽같이 속은 왜놈들은 최대한 빠르게 퇴각로를 확보할 거고. 그때 대동군이 적을 격멸할 거야. 끙.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전장은 구경도 못 하겠군.”

아쉬움이 가득한 최영.

이원계는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장군께서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친 게 영 아쉬운 가 봅니다.”

최영도 넉넉하게 웃으며 답했다.

“죽을 때까지 공을 세우고 싶네.”

물론 최영이 사사롭게 공을 탐하는 건 아니다.

수시중이 된 이후 복잡한 정치에 잡혀 있다 보니 속이 너무 답답한 나머지 전장에 나서서 시원하게 적과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그런 것이다.

“그나저나 동북면의 문제는 심각한가?”

“···동북면을 이르십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 장군이 왜구 출정을 하지 못할 정도면 큰 문제가 있는 건데.”

최영의 말대로 이번 중앙군이 편성될 때 이성계는 동북면의 사정을 핑계로 불참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중앙군은 이름만 중앙군이었을 뿐 최영의 병력밖에 없었다.

“아는 내용이 없나?”

이성계의 이복형제인 이원계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군웅할거 이후 아우님과는 세력을 달리했습니다. 동북면의 자세한 사정까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음. 그런가?”

“예. 한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닐세.”

최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끊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그의 표정에는 찝찝한 감정이 샘솟았다.

...개경에서 출병하기 전 잠시 만났던 이성계의 머뭇거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평생 전장을 달리며 여기까지 온 최영의 감각이 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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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왜구들은 최영의 대군이 남하하여 진을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이상한 무기를 사용하는 고려군은?”

“여러 갈래로 흩어졌어.”

“여러 갈래?”

“그렇지. 우리가 흩어져서 움직이니까 그놈들도 그래야지.”

“음. 임피 외곽에서 아군이 모두 집결한다는 소식을 접했나 보군.”

“괴상한 무기를 사용해서 크게 당했지만, 육전은 또 다르지. 다 모이면 1만은 족히 될 것이니 감히 맞서지 못할 거야.”

“오. 자네 말이 맞아.”

북쪽에서 최영의 대군이 진을 구축하고, 임피에 있던 왕선의 병력이 산발적으로 나뉘었다는 소식을 접한 왜구들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정확하게는 임피 외곽으로 집결하던 발걸음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바로 임피 포구에 있을 고려 군선을 탈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화약 병기의 위력에 된통 당한 직후인지라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수백 명의 인원이 모이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고, 혹시라도 있을 공격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야밤을 틈타서 이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임피 포구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게 뭐야?”

우연히 마주친 상단의 행렬.

인부들은 황급히 도주했고 그 자리에는 수레만 잔뜩 있었다.

왜구들은 눈을 껌뻑이면서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수레에 실린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오오오!”

“그, 금이다!”

바로 그때 멀찍한 언덕 어딘가가 밝아지는 게 느껴졌고

-쏴아아아아아아아앙!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자랑하듯 담은 불화살 한발이 오연하게 날아왔다.

왜구들의 눈동자가 철렁일 때

-퍽!

불화살이 금괴 사이에 꽂혔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지천을 울리는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환희로 가득하던 그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앙!

불화살은 끝없이 날아왔다.

활을 다시 고쳐잡은 이옥은 피식 웃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거 정말로 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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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 포구로 몰려가던 왜구들의 눈에 보인 건 민가였다.

전에는 그토록 찾아도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사방에 밥 짓는 냄새가 가득했다.

왜구들의 입가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어렸고, 눈은 희번들할 정도로 돌아간 상태.

마치 개떼처럼 칼을 들고 득달같이 달렸다.

민가에서 어슬렁거리던 고려인이 보였다.

멍청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순박한 모습.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왜구들은 고려인의 저런 표정이 너무나도 좋았다.

천지 분간도 모르는 듯 얼빠진 모습을 보이다가 자신들을 보고 아연실색하는 그 꼴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지금이 딱 그랬다.

“낙토가 여기로다!”

기괴한 함성을 질러댔다. 이제 남은 건 멍청한 고려인의 참모습.

...그런데 그 고려인이 멀뚱히 자신들을 쳐다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겁을 상실한 놈인가? 간을 집에 두고 온 놈인가? 아니면 장님인가?

돌격하는 순간에도 어처구니가 없을 때 고려인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뭔가 이상하다.

바로 그때 민가로 발을 내밀었고

-차아아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아아앙!

사방에서 창칼이 난무했다.

“!!!”

“!!!”

민가의 사방에서 창칼을 든 사람들이 덤벼댔다.

왜구들이 충격에 휩싸였을 때

-부아아아아아아아앙!

두, 세 명을 한 번에 죽일 정도로 위력적인 창이 휘둘러졌다.

순박하게 웃던 그 멍청한 고려인이었다.

그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고려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바로 마천목이니라!”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한 기백이었다.

왜구들은 발악하듯 칼을 휘두르며 벗어나려고 했으나 고려군이 너무 많다.

대체 어디서 이런 병력이 나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설마 전주의 모든 병력을 집중한 걸까?

자신들은 딱 그 매복에 걸린 거고?

...그거다. 그게 아니면 이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비, 빌어먹을! 하필이면 적군의 주력이 매복한 민가를 지나치다니!”

근처 민가에서도 비슷한 절규가 터졌다.

“하필이면 이곳을 지나쳤다니!”

사방의 민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피로 향하던 모든 왜구가 하늘을 원망하고 자신의 재수 없음을 한탄했다.

이렇게 각지에서 승전고가 울렸고 퇴각로로 진입하던 왜구의 잔당은 대부분 궤멸했다.

그러나

“음. 이거 골치 아프군.”

유인하면 모조리 달려올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수천의 병력이 외곽에 집결한 상태였다. 옴짝달싹하지 않고 전황을 살피는 모양새에서 노련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음. 한 2천 잡았소?”

“실제로 죽인 수는 한참 못 미칠 겁니다. 또 도주한 왜구들이 있으니까요.”

“다시 집결지로 달려갔겠지?”

“그럴 겁니다.”

“이거 생각하지 못한 일인데.”

“예. 예상 밖의 일이긴 합니다. 미루어 추측해보건대 적장의 능력이 보통은 넘는 거 같습니다.”

“적장이 누구요?”

“아직 알려진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수군을 이끌었던 왜장은 아닌가 보군.”

“예. 무엇보다 패주한 왜구를 모아낼 정도면 그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 분명합니다.”

“거.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왜장을 왜 아직도 파악 못 하셨소? 밀교 교주?”

“······.”

정도전이 한스러운 표정을 짓길래 왕선이 환기하듯 손을 내저었다.

“됐고. 포로로 잡은 놈 있소?”

“예.”

“데려오시오.”

그리고 잠시 후 포로를 대면한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지발도.

역사는 흐른다?

웃기지도 않았다.

< 91화 역사는 흐를까?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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