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사수전화공지책(수전에는 화약무기 만한 게 없다) >
이옥의 연환계(連環計)로 수십 척이 침몰했으나 400척이 넘는 왜선의 위용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반면, 70여 척에 불과한 왕선의 군선은 너무나도 초라하게만 보였다.
압도적인 규모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가뜩이나 급하게 징발한 고려 군선인지라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가 더 작게만 보였다.
지금 임피 바다에서는 짙은 전운이 감돌았는데 그 속에는 이질적인 두 가지 감정이 존재했다. 하나는 절대적인 자신감이었고 나머지는 두려움이었다. 전자의 크기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서 후자의 감정을 점차 잠식했다.
어느 순간 전장을 지배하던 전운은 자신감으로 범벅되어갔다.
그리고 자신감을 뿜어내는 400여 척의 군선은 엄청난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을 감행했다. 이에 70여 척에서 생성됐던 두려움은 응축되어가기만 했다.
전력, 기세, 사기 등 모든 부분이 압도적으로 한쪽으로 쏠린 전장. 전투의 결과는 너무나도 자명한 것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 땅의 일부를 참담한 아수라장으로 만들 것이다. 이를 막고야 할 70여 척의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그랬다. 지금 임피 바다에서 고려 수군...아니 고려 땅의 명운을 건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주공. 적군이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긴장감이 잔뜩 묻어나는 딱딱한 목소리.
나세였다.
“병사들은?”
“사기가 곤두박질쳤습니다.”
“이탈하는 병사는?”
“아직 없습니다.”
왕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세 장군.”
“예. 주공.”
“새겨들으세요.”
엄청난 함성을 지르면서 적군이 달려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왕선의 목소리는 느긋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세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일전의 질타로 느낀 바가 많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자리에서 이탈만 하지 않으면 아군은 승리할 것이외다.”
나세는 언월도를 굳게 잡으면서 외쳤다.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탈하려는 자가 있으면.”
“지엄한 군율로 즉참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무선이 다가왔다. 왕선은 그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약속이라도 한 듯 매서운 눈으로 왜선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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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석은 전주 출신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마음을 몇 차례나 다독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목사께서 해내실 거다. 미륵께서 해내실 거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큰 차이다.
...죽을 수도 있다.
무서웠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서슬 퍼렇게 존재감을 보이는 언월도가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아주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바다로 뛰어들고만 싶었다.
언월도가 잠시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만을 바랐다.
그것만을 기다릴 동안 머릿속으로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원래 손에 창칼이라고는 잡아본 적 없는 순박한 농민이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농기구를 들어 보지도 못했다. 농사지을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석이 태어나서 한 것이라고는 평시에는 유력가의 횡포에 시름 하고, 전시에는 왜구의 창칼을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평생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야 할 줄 알았다. 삶이 지치고 힘이 들수록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의 하생만을 바랐다. 그러나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고자 했다. 쉽지 않았으나 독하게 마음먹고 행하려던 날 전주에 미륵이 하생했다.
미륵은 유력가의 횡포를 모조리 뿌리 뽑았다. 순식간이었다. 모든 백성이 환호했다. 돌석은 울부짖으며 미륵을 연호했다. 그리고 너무 빨리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 자신의 선택을 너무나도 대견스럽게 여겼다.
얼마 뒤 왜구가 창궐했다. 돌석은 두려웠으나 안도했다. 미륵께서 함께하시지 않는가. 해서, 처음으로 낫을 들고 전장에 나섰다. 미륵과 함께한다면 왜구 따위는 순식간에 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구는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의 창칼과 마주한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걸 했다.
“미륵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미친 듯이 외쳤다.
그 순간 왜구가 달려들었고 돌석은 자신도 모르게 낫을 집어 던졌다.
“!!!”
왜구가 죽었다. 온몸을 떨면서 외쳤다.
“미, 미륵이시여. 소인이 마군이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과연 미륵이었다. 모든 걸 예상했는지 가장 적절한 순간 원군이 나타나서 왜구를 내쫓았다. 환호성을 질렀다.
“미륵이시여! 왜구가 물러났습니다!”
“과연 미륵이십니다!”
그런데
-촤악!
미륵께서 싸대기를 날리셨다.
너무 놀라서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눈만 껌뻑였다.
미륵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미륵께서 노하신 것이다. 너무 못난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게 분명했다.
“···미륵은 없어.”
두려웠다. 이대로 미륵이 떠나면 전주는 다시 생지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미륵을 만들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
돌석의 눈이 떨렸다.
...우리가 미륵을 만들 수 있다고?
“나는 미륵이 되고자 한다. 결심했다. 너희는?”
미륵께서 미륵이 되신다고?
이미 미륵이신데?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거대한 용광로 같은 힘이 느껴졌다.
“이 땅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나?”
돌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미륵께서 압도적인 왜구를 격멸하겠노라 천명하셨다.
너무나도 두렵지만, 힘을 내기로 했다.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았다.
...지금도 두렵지만, 미륵을 만나기 전에는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어차피 미륵께서 구해준 목숨이다. 그러니 따른다.
또한, 살고 싶었다. 이제는 죽음이 싫었다. 해서, 미륵을 따르기도 한다.
이 전장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미륵을 따르는 것이니까.
돌석은 옆을 쳐다봤다. 모두 덜덜 떨고 있다.
모두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저들도 비슷한 이유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는가? 과정이 같다면 결론도 자신과 같을 것이다. 다만, 돌석이 결론을 빨리 도출했을 뿐이다. 해서, 마른침을 넘기면서 악을 쓰듯 외쳤다.
“살아서 돌아갑시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곁 눈길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돌석은 다시 외쳤다.
“살아서 돌아가려면 미륵께서 콩을 메주라고 해도 믿고, 메주를 똥이라고 해도 믿어야 합니다!”
그 투박한 말은 순식간에 번졌다. 분위기가 기괴하게 반전됐다.
바로 그때
“전군!”
왕선의 외침.
“방포하라!”
돌석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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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은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매섭게 노려보던 왕선은 선두에서 희롱하듯 서 있는 왜구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은 먼 거리였으나 그의 속마음이 읽혔다.
-가소로운 놈들.
왕선의 눈썹이 꿈틀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너희를 다 죽이고 낙토를 먹어주마.
그 왜구는 혀를 날름 내밀면서 히죽거리고 있다.
그때 최무선이 왕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금이다.
왕선은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전군!”
오른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방포하라!”
그 즉시 병사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왕선은 그 순간이 너무나도 느리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체 70여척의 군선에서 일제히 나르는 화살이라고 불리는 주화가 방포됐다.
왕선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조롱하듯 설쳐대던 왜구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뭐...지?
왕선의 손이 꽉 쥐어졌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주화는 왜선의 깊숙이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불벼락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설쳐대던 왜구는 몸을 크게 휘청였다.
그의 눈에는 경악과 동요가 가득했다.
-이, 이게 뭐야?!
왜구의 사지가 불에 타며 찢어지는 순간 왕선은 꽉 쥐었던 손을 튕겨내듯 하늘로 올렸다. 다시 시간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온 것이다.
“모조리 방포하라!”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주화는 거침없이 날아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미친 듯이 달려오던 왜선은 짙은 연기와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붕괴했다.
반면, 고려 수군의 공세는 갈수록 맹렬해졌다. 작은 틈도 주지 않고 연쇄적으로 방포했다. 엄청난 흔들림이 있었으나 평평한 밑바닥을 가진 고려 군선이었고, 배의 기울어짐을 방지하는 복원력을 위해 배 밑에 돌을 깔았기에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점차 화포의 위력이 전장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시작할 때 왕선은 다시 외쳤다.
“전군!”
드디어
“진군하라!”
반격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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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끈 감고 움직였던 돌석의 눈은 충격으로 휩싸였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던 왜선들이 점차 박살 나고 있지 않은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건 명백한 현실이었다. 너무나도 기분 좋은 현실.
“우하하하하하!”
돌석은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움직였다.
“왜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그의 목소리와 함께 위력적인 굉음이 바다를 가득 메웠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이렇게 신명 나는 전장은 없었다.
모두 미친 듯이 즐거워하며 움직였다.
움직이면 움직이는 만큼 왜구를 죽일 수 있다는 게 증명됐지 않은가? 그렇다면 절대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돌격이 시작됐다. 그런데 앞으로 가로막는 왜선은 없었다. 모두 불에 타서 침몰하고 있지 않은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병사들은 입을 벌린 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쳐다봤다.
실로 경이적인 장면이었다. 인세에 아수라가 강림했다면 바로 이러한 힘을 낼 것이다.
병사들은 시선을 마주쳤다.
...아수라? 아니다. 아수라가 아니다.
그들은 약속이라고 한 듯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륵이시여!”
미륵의 권능이 구현된 것이다.
사방에서 함성이 일었다.
“미륵이시여!”
화약 병기의 위력적인 힘이 미륵의 권능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임피 바다에는 거대한 전율이 자리 잡았다.
한편,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던 돌석의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자, 장군.”
“자네 이름이?”
“도, 돌석이라고 합니다. 소인이 너무 설쳐댔습니다. 송구합니다.”
나세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참으로 잘해줬어.”
“예, 예?”
“네가 나보다 나았다.”
아는 사람은 안다. 지금의 상황의 숨은 공신이 나세라는 것을. 그가 아니었다면 병사들의 동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것이다.
그런데 나세는 정확하게 봤다. 돌석의 외침. 그것은 단지 동요를 막은 것을 넘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러니까 진정한 힘을 끌어낸 것이다.
“자네가 일등 공신일세.”
나세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주공에 대한 믿음. 그것 역시 네가 나았어. 오늘 크게 배웠네.”
전투 이후 장수들과 왕선에게 죄를 청할 때 청하더라도 돌석을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언월도를 다시 고쳐잡은 나세는 궤멸적 피해를 본 왜선을 향해서 시선을 옮겼다. 백전을 치른 그의 눈에도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수전화공지책. 수전에는 화약무기 만한 게 없도다.”
바야흐로 고려의 대 왜구 격멸전에 일대 전환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 90화 사수전화공지책(수전에는 화약무기 만한 게 없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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