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준비 >
꾸준하게 이동한 상단 행렬은 왜구의 방심을 가져오게 했다. 십수 개의 약탈 부대를 운영한 왜구였기에 마천목의 위장 부대를 가늠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연히 약탈을 끝내고 귀환하는 부대라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경계가 있긴 했으나 오래전 나포한 왜선으로 움직였으니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리고 방심의 대가는 컸다. 수십 척의 군선이 침몰한 것이다. 이에 왜구는 임피에서 일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전면적인 퇴각이 아니라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일시적인 물러섬이었으나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그새 왕선의 군선이 임피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주공. 군선 30여 척을 잃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하하하. 아닐세. 백번을 생각해봐도 절묘한 연환계였네.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임피 땅에 발을 디디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야.”
현재 왕선군의 전력에서 30여 척이나 되는 군선의 소실은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이옥이 도출해낸 건 30여 척 이상의 전략, 전술적 성과였다. 이러한데 이를 지적한다면 전장 지휘관의 권한을 억누르게 될 것이다. 전장을 책임진 장수의 권한은 폭넓게 보장해줘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왜구가 오래 물러나 있지는 않을 것이네. 전열을 재정비하는 대로 공세를 펼칠 것이니 아군도 지금부터 제대로 준비해야겠지.”
“왜구들이 같은 방법에 또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것이네.”
“이번에는 필시 수전에서부터 총력전을 걸어올 겁니다. 아군을 바다에서 밀어내는 즉시 전면적인 상륙을 감행할 건 불 보듯 뻔합니다.”
이번에 조정에서 지원해준 고려 군선은 60여 척이다.
바꿔말해서 고려 조정의 수군 역량을 집중한 것이 고작 60여 척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남아있는 왕선의 군선 10여 척을 더해도 400여 척을 넘는 왜구의 군선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사실 30여 척을 볼모로 과감한 연환계를 펼쳐낼 수 있었던 중요한 단서는 지원받아 올 군선의 규모가 상당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관측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여, 수전은 적을 교란하는 정도로 활용하고 육전에서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어쩌면 이옥의 이런 판단은 아주 합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를 슬쩍 쳐다본 왕선은 싱긋 웃었다.
“이옥 장군. 수전이 주력이 될 것이네.”
“예?”
“가능하다면 모조리 바다에 수장시키고.”
“예?”
“부득이하게 도주하는 왜구가 있으면 육전도 해야겠지만.”
“예?”
이옥은 당황하여 눈을 껌뻑이며 정도전과 나세를 슬쩍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해명을 바라는 시선이었다.
혹시 추가로 지원 올 군선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약간의 희망이 담겼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기에 고개만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여유를 부렸다.
이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
이겼던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실제 진포 대첩의 주역인 최무선과 나세.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가.
패배를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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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마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군호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늦게나마 감축드립니다.”
“뭐. 그게 대수로운 일이라고.”
말은 이렇게 해도 왕선 역시 군호를 받고자 애를 쓴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길에서 백거마의 공은 상당했다.
그를 향해서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도움이 컸네.”
“과찬이십니다. 소인은 그저 장사했을 뿐입니다.”
“역시 거상다운 답변이군. 그래.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던데.”
“투자입니다.”
왜구를 유인해내고자 수만 석의 곡식을 퍼부었다.
이를 단지 투자라고 말하는 백거마의 배포는 대단했다.
왕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잘 계산해두게. 전란이 끝나면 이윤을 남겨야 할 것이니까.”
“벌써 계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직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본론이었다.
왕선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물었다.
“어찌 됐나?”
“남상의 상단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옥 장군의 작전에 투입된 인력을 제외한 모든 힘을 영천에 투입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면?”
“예. 조만간 물건이 도착할 겁니다.”
물건. 그것은 전투의 명운을 결정지을 치명적인 무기를 이르는 말이었다.
바로 화약과 화약 병기였다.
왕선은 짙은 웃음을 지었다.
“자네 정말 크게 장사하는 걸세.”
“거는 기대가 큽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이 나라 최고의 거상이 될 거니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얼마 뒤 엄청난 양의 화약과 화약 병기가 도착했다.
그리고
“하하하. 장군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왕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격하게 환영했다.
최무선은 흘겨보면서 옅게 웃었다.
“대감께서 이 사람더러 직접 오라고 신신당부했지 않소이까.”
아무리 화약과 화약 병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무선이 없으면 곤란했다. 해서, 왕선은 수차례 최무선에게 직접 올 것을 청했다.
“하하하. 이 사람이 결례를 범했군요.”
“아니외다. 대감의 언질이 없었더라도 이 사람은 직접 왔을 거요.”
왕선이 300명의 원군을 보내준다고 약조하긴 했으나 병사의 질은 담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예군을 대놓고 청할 수도 없었다. 전주에 드리운 왜구의 위협은 산청과 영천 주변에서 국지전을 펼치는 왜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최무선은 적당하게 기대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영천에 원군으로 온 병력은 실로 대단한 정예군이었다. 수차례 국지전이 발생했는데 모조리 격퇴했다. 최무선으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는데 최무선도 더 늦장을 부릴 수는 없었다. 영천의 기본적인 체계만 다시 수립하고 곧장 임피로 달려온 것이다. 영천에서 화약 병기와 화약을 실은 상단의 행렬보다 한참 늦게 출발했을 최무선이 그들과 함께 왔다는 건 엄청난 강행군을 했다는 걸 의미했다.
개경에서 영천. 그리고 영천에서 임피까지.
그냥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리라는 걸 고려했을 때 최무선이 왕선의 지원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최무선도 화약 병기를 제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가장 고전했던 영역은 초석 1근과 버드나무재 3량, 유황 1량 4돈을 7할, 2할, 1할로 잘 섞어서 만들어야 하는 화약의 원료였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영천에서도 실전 배치를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단번에 해결해낸 것이 백거마와 남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엄청난 강행군을 하여 지칠 만도 했을 건데 최무선의 안색은 무척이나 밝았다.
그의 속을 들여다본 왕선은 싱긋 웃었다.
“장군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 이럴 줄 알고 혼자 온 건 아니외다.”
최무선은 자신 있게 소개했다.
“영천에서 화약을 가장 잘 다루는 이들이오. 일당백의 힘을 낼 것이외다.”
“하하하. 참으로 든든합니다. 과연 최 장군이십니다.”
“과찬이외다.”
“일단 관청에서 여독을 푸시지요.”
“아니외다. 이런 엄중한 정세에서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소? 우리는 곧장 병사들을 지도하겠소이다.”
“허. 그리하셔도 괜찮으십니까?”
“이런. 한 번쯤은 만류할 줄 알았는데.”
“하하하. 이 사람은 그런 거 잘 못 합니다.”
“하하하. 그런 거 같았소.”
최무선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숙달된 부관들과 장인들과 바쁘게 이동했다.
왕선은 믿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번 작은 철저하게 최무선의 실무 지도로 이뤄질 것이다.
화약 병기의 사용법부터 배치까지. 모조리.
대승의 첫 번째 단초가 바로 그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모두 순탄한 건 아니었다.
“주공.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거. 아직도 그러오?”
“소생만이 이러는 게 아닙니다. 다른 장수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정도전의 말대로 모든 장수가 화포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왕선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니까 패배할 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싸우기도 전에?”
“그게 아니라 합당한 방책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허.”
“어차피 이제 와서 다른 군웅과 군현 동맹을 체결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둔전제가 잘 집행되었으니 아군의 규모도 수천에 이릅니다. 작전을 잘 수립한다면 육전의 승리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의 자질이 중간 정도일지라도 재상만 훌륭하면 정치가 잘 되지만, 재상이 훌륭하지 못하면 정치가 어지러워진다.”
이는 정도전의 구상한 재상 총재제의 맥락이었다.
과연 그의 눈썹이 꿈틀였다.
그리고 왕선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정치의 재상 총재제는 전장에서 허용되는 건 아니외다.”
“···주공.”
“전장에서 지휘관은 장수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명령하는 것이오. 이미 작전은 결정되었고 벌써 집행에 나섰소. 한데, 제일 군사와 좌장들이 몰려와서 이견을 제기한다? 지금 내부에서 분란을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오만.”
지금까지 왕선이 이런 기조로 말한 적은 없다.
“···송구합니다. 소생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정도전이 고개를 숙였고
“소장들 역시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세와 이옥 그리고 마천목도 황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왕선의 뇌리에는 진짜 ‘왕선’의 방대한 지식이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의도와 결과가 같은 건 아니지.”
내뱉었다.
“그대들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내부에서 화살을 집어 던지고 창칼을 휘두르고 있소이다. 딱 깨 놓고 내 눈에 당신들의 행동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소이다.”
“···송구합니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잘 들으시오. 화포전이 미덥지 않다면 반론을 제기하기 전에 화약 병기의 위력부터 제대로 검토하여 이 작전의 단점을 가져와야 하오. 하지만, 당신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서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거요. 어떻게? 무조건 질 것이라고. 이 사람이 아무리 화약 병기의 위력을 설명해도 제대로 검토조차 하지 않은 게 전주의 제일 군사와 좌장이라는 그대들의 모습이었소. 당신들부터 이런 식으로 하면 부관과 병졸들의 사기는 어떻겠소? 화약 병기를 접해보지도 못한 병졸들은 400척의 적선을 맞이하고 덜덜 떨다가 죽어버릴 거요.”
너무나도 신랄한 지적.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왕선의 목소리는 고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조로웠다.
하지만 담긴 내용은 여전히 뼈를 찌를 정도로 날카로웠다.
“또한, 진정으로 수전의 승패가 걱정된다면 그 직후 발생할 육전을 잘 준비하면 되오. 한데, 수전 자체를 포기하자니. 참으로 기가 차오.”
구구절절 옳은 말.
모두 말문이 막혔다.
“잘 보시오. 이번 전투를 통해서 그대들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에 갇혀 살았는지 알게 될 것이오.”
장수들이 조심스레 나서려고 했으나 냉소적인 왕선의 목소리에 막혔다.
“여기까지.”
축객령이었으나 오히려 왕선이 나갔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요함 속에 있는 왕선의 노기를 정면을 받은 정도전과 나세, 이옥 그리고 마천목의 내려진 고개는 황망함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 뒤 급보가 전해졌다.
전열을 정비하고자 물러난 왜구의 군선이 임피로 돌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왕선은 모든 군선을 총집결시켜 정면으로 싸울 것을 천명했다.
바야흐로 전면전의 닻이 올랐다.
< 89화 준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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