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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88화 (88/187)

< 88화 연환계 >

가만히 쳐다보고 있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압도적인 군세였다.

...적의 군선 500척.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위력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압박감이 얼마나 컸는지 이옥과 마천목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부관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 대장.”

“예. 장군.”

“이거 그냥 싸우면 도저히 승산이 없겠는걸?”

“예. 형님께서 내려오시길 기다려야 할 거 같습니다.”

“그동안 왜구의 노략질이 끝없이 이어지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섣불리 덤볐다가는 큰 피해를 볼 겁니다. 적의 전력은 아군의 10배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수를 찾아봐야겠지.”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그리해야 한다. 만약 500척의 군선에서 왜구가 상륙하여 본격적으로 설쳐댄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내려질 것이니까.

마천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돌아가지. 더 지체했다가는 적에게 들통나겠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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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의 결과를 들은 전녹생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곧장 이곳으로 오고 있다?”

“예. 임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조정의 군선 수십 척을 지원받아 남하하실 것이네. 한데, 왜구의 군선이 임피를 장악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최악으로 번질 것일세.”

“예. 주공께서도 임피로 들어오셔야 하지요.”

이옥은 정세의 엄중함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적인 내용을 찾아냈다.

“그래도 전 선생께서 둔전법(屯田法)을 잘 해놓으셨습니다.”

둔전법(屯田法)

둔수(屯戌)에 있는 병졸이 ‘싸우면서 농사짓게’ 하는 제도이다. 이는 군량미를 조운하는 불편을 덜고 군량미가 풍족하게 할 수 있었다.

본래 고려에도 음죽(陰竹)에 둔전을 설치하고, 주군에도 모두 둔전을 두어서 군량곡을 공급했으나 점차 폐단이 커졌다. 조(租)를 받을 때는 수졸(戍卒)들이 스스로 곡식을 준비하여 바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곡식을 꾸어다가 보태기도 했기에 결국 도망치는 백성만 늘렸다.

그런데도 둔전은 잘 운영된다면 열 사람의 경작으로 50인을 먹일 수 있다. 이런 비율로 올라가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왕선의 영지는 계구수전에 근접한 획기적인 토지제도가 시범 집행되는 곳이 많다. 하여, 더욱 효율적인 둔전의 집행 및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이에 정도전은 개경으로 떠나기 전 전녹생에게 이 내용을 신신당부했다. 그 결과 뛰어난 내정가인 전녹생은 아주 잘 집행하여 본궤도에 올려둔 것이다.

전녹생은 옅게 웃었다.

“일전에 살려둔 임주의 지주들이 제법 애를 썼다네.”

임주를 점령한 뒤 상대적으로 평이 괜찮은 지주들은 모두 살려뒀다.

김제와 부안과는 다른 정책이었다.

이는 훗날 다른 지역으로 팽창할 때 지주들이 배수진을 치는 걸 억제하는 효과를 내기 위한 것과 더불어 점차 확장되는 영지의 통제를 효율적으로 하고자 한 의도였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아주 적절했다.

“어쨌거나 굳이 둔전법을 언급한 이유가 있을 것 같네만.”

“주공의 남하가 성공하더라도 그동안 백성의 피해가 커지는 상황입니다. 한데, 주공께서 임피로 진입할 수 없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세를 취하는 게 옳습니다.”

“현재 아군이 보유하고 있는 군선은 40여 척. 가능하겠나?”

“대신 둔전법의 시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수천 명이지요.”

“육전을 치른다?”

“아닙니다. 육전을 치르는 시늉을 하면서 시일을 끌어볼 생각입니다.”

전녹생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잔잔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 사람은 군략은 어둡네. 좋아. 자네가 작전을 수립하게. 이 늙은이는 그저 최선을 다하겠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주공께서 서찰을 하나 보내셨네.”

“주공께서요?”

“그렇네. 반드시 집행하라고 하시더군.”

“어떤 내용입니까?”

“백거마의 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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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마는 상단주들을 모두 소집했다.

“전주 관청에서 도움을 청했네.”

“전쟁인데 우리가 도울 게 있습니까? 전주 관청은 군량도 충분할 텐데. 아. 저번에 한 것처럼 정보를 파악하는 일입니까? 그런데 왜구를 상대로 염탐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건데. 여차하면 다 죽습니다.”

“이 사람도 염탐이라고 생각했네만 그게 아니더군.”

“그러면 무엇입니까?”

백거마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왕 목사께서 이런 일을 대비하여 우리를 전주 관청에 묶어 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방법이었네.”

“응? 어서 말씀해보십시오. 궁금합니다.”

“그 전에 함께 할 사람만 남게.”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애초 전주 관청의 광산 투자 상단만 불렀지 않습니까.”

“오. 자네 눈치가 빠르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쨌든 우리도 대동군 대감과 한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좋아. 그러면 내 말을 빠짐없이 잘 듣게.”

“예.”

“우선···.”

백거마의 말이 이어질수록 곳곳에서 헛기침이 났다.

...그만큼 당혹스러운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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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군선은 임피 바다를 가득 메웠다.

실로 압도적인 군세였다.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지휘관부터 병졸까지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그만큼 그들에게 이 땅은 무주공산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절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여태껏 그래왔기 때문이다. 고려라는 나라는 제대로 된 병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약체였다.

이번에는 더욱 그랬다. 벌써 수차례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한데,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성과는 엄청났다.

최근 이 지역의 상업이 활성화됐다더니 딱 그 말대로였다. 사방에서 상단의 이동이 있었다. 하루에도 여러 갈래로 약탈부대를 파견했고 돌아오는 부대는 작게는 수백 석, 많게는 수천 석의 곡식을 가져왔다.

그야말로 풍년이었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왜구들은 가락을 부르듯 흥겹게 외쳐댔다.

지금 이 순간 임피의 바다는 오롯이 왜구의 것이었다.

...아니. 왜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자! 가자!”

“가자!”

“낙토를 가자!”

“이곳이야말로 낙토로구나!”

2만의 왜구가 질러대는 고함은 실로 전율스러웠다.

...끔찍할 정도로.

그렇게 약탈부대가 상륙했고, 여러 갈래로 흩어져서 움직였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괴성을 지르면서.

그리고 대풍의 꿈을 안고.

임피의 북쪽 서주로 방향을 잡은 왜구들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처음 상륙했을 때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문을 들은 고려인이 모두 도주한 게 분명했다.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곧장 내륙으로 진군하면 될 일이다. 그때 전해진 상단의 이동 소식은 그야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귀찮게 내륙 깊숙하게 들어갈 필요도 없이 근처에서 뺏으면 된다. 아주 바람직한 약탈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크게 경계했다. 하지만 수차례 진행한 결과 고려군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서주 방면에 상단의 행렬이 전해졌지만, 적군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고려인의 거주지까지 있다고 한다.

500여 명으로 구성된 서주 방면 약탈부대는 흥겨운 가락을 불러댔다. 벌써 흥분이 치솟았다. 그리고 저 멀리 고려인의 거주지가 보였다. 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또 한걸음.

어느새 민가의 지척이었다.

한 걸음만 더!

조금만 더!

바로 그때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민가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엄청난 수의 화살이었다.

대경한 왜구들이 그제야 민가의 사방을 살폈다.

“!!!”

고려군이었다.

그러나

“우하하하하하! 고려군이다!”

오히려 기세가 올라갔다.

그랬다. 그들에게 고려군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에 불과...

“!!!”

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격으로 얼룩졌다.

사방에서 모습을 보이는 고려군의 규모가 예상을 훨씬 웃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알 수 없겠지만 이는 둔전법의 성과였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위력적인 화살이 날아왔고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억!

선두에서 설쳐대던 부관이 단번에 죽었다.

“전군! 왜구를 모조리 도륙하라!”

강궁의 주인.

이옥의 외침이었다.

그 즉시 병사들은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 수가 무려 1천 명에 육박했다.

“저, 적들은 오합지졸이다!”

왜구의 대장들은 발악하듯 외쳤다.

그런데 배후에서도 고려군이 나타났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압도적인 위력을 보이며 휘날리는 창.

마천목이었다.

그의 뒤로 수백 명의 병사가 돌격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포위된 왜구는 야차처럼 창칼을 휘둘러대는 이옥과 마천목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장군! 대승입니다!”

마천목은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이옥은 진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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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빠르게 왜구의 본진으로 전달됐다.

십수 개의 약탈부대 중에서 한 곳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상대한 고려군은 2천여 명에 육박하는 전력.

분기탱천한 왜구들은 약탈부대의 규모를 더 증강하여 상륙했다.

사방을 이 잡듯이 뒤지며 이옥과 마천목을 찾았고 끝내 만났다.

제대로 준비하여 움직인 왜구의 거센 공세에 이옥과 마천목은 황급히 퇴각했고 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고려군이 승전을 거뒀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일까?

한동안 잠잠한 거 같던 고려 상단들이 다시 움직인다고 했다.

왜구들의 약탈은 다시 시작됐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임피 바다로 돌아가는 왜구들은 흥겹게 고함을 질러댔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먼저 도착한 왜구들도 화답하듯 외쳤다.

약탈을 떠나갔던 부대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먼저 도착한 왜구들은 여유를 즐기며 저 아름다운 낙토를 쳐다봤다.

언제봐도 기분이 좋다.

“오. 저기도 오는군.”

저 멀리서 약탈에 성공한 군선이 돌아오고 있다.

큰 성과를 거뒀는지 위용이 남달라 보였다.

진용을 이루고 있던 왜구들은 반기듯 외쳤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로구나!”

그렇게 점차 거리가 가까워졌는데

“어어?”

뭔가 이상했다.

“어? 저거 왜 저래?”

이쪽으로 접근하는 군선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이거 아무래도 부관이 제대로 통제를 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멈춰! 속도를 늦춰!”

왜구들은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군선은 더 빠르게 다가올 뿐이었다.

“이, 이거 곤란한데.”

이대로라면 충돌한다.

병졸들은 당황했다.

“무, 물러선다! 서둘러!”

결국, 명령이 내려왔다.

그런데 다급함이 가득했다.

바로 그때

-쾅!

거대한 충돌음.

돌아오던 군선들이 충돌한 것이다.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대경한 병졸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삿대질을 했다.

그런데 내려오는 명령은 한가롭지 않았다.

“피, 피하라!”

그 순간

-쾅!

-쾅!

-쾅!

다가오던 군선이 차례로 모두 충돌했다.

이제야 병졸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피하라! 어서!”

부관들의 다급한 명령이 다시 들렸다.

그 순간 병졸들의 눈이 충돌한 군선 뒤에 오연하게 따르던 1척의 군선으로 향했는데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불화살이 하나 날아왔다.

그것의 종착 지점은 충돌한 군선이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화마가 치솟았다.

“!!!”

“!!!”

“!!!”

불은 순식간에 옆의 군선으로 번졌다.

그리고 충돌해온 군선 30여 척은 불타는 와중에도 대열을 유지했고, 그 탓에 인접한 모든 군선에 불이 번졌다.

임피에 있던 왕선의 군선 40척.

그중 30여 척은 일찍이 왜구의 군선을 나포한 것이었는데 바로 지금 위장 전술로 쓰인 것이다. 군선 곳곳에 맹화유궤가 가득하고 서로 쇠사슬로 연결된 채로.

그때 나머지 10척이 빠르게 바다로 뛰어든 고려 수군을 구해서 물러났다.

“괜찮은가?”

“죽을 뻔했습니다.”

돌격을 담당한 마천목이 엄살을 피우자 이옥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선을 왜구의 군선으로 돌렸다.

적군은 아비규환이었다.

그 선봉에는 단단하게 붙어서 우직하게 밀어대는 30여 척의 불타는 군선이 있었다. 화마는 순식간에 왜구의 군선으로 이동했다.

연환계(連環計)였다.

< 88화 연환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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