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밀월과 밀월 사이 >
개경은 한산했다.
정확하게는 도당이 한산했다.
이인임 축출 이후 도당의 자리를 가득 메웠던 재상들이 모두 제 영지로 내려간 탓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 나라의 재상들이 우국충정에 불타서 양팔 걷고 달려나간 것으로 볼 정도였다. 그만큼 재상들이 부리나케 뒤도 안 돌아보고 개경을 벗어난 것이다.
물론 왕선은 아직 개경에 잔류 중이었다. 최영이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강안전에 들렸소?”
“벌써 소식이 대감께도 알려졌습니까?”
최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은 수렴청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걸 잊었소?”
“어찌 잊겠습니까. 한데, 신하가 군주를 알현하는 게 흠이 됩니까?”
“흠이 되지 않지. 그러나 태후전에서 이를 다른 경로로 알게 되는 게 문제라오. 심지어 대동군은 수렴청정이 실현되는 데 큰 공을 세워 태후 마마께서 총애하고 계시오.”
“마마께서 서운하실 수는 있겠군요.”
“당연하오. 내게 에둘러서 말씀하셨다오.”
“음. 그래서 마마께 큰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선물?”
“예. 선물.”
“이 시국에 사사로운 재물을 올리지는 않을 것인데.”
“물론입니다. 그리고 마마께서 재물이 아쉬운 분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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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가?”
평소와 달리 까칠하다.
참 희한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역량이 부족한 왕우의 내일을 걱정하던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강안전을 다녀갔다고 이렇게 경계한다. 정말 권력이라는 건 한 조각이라도 나누는 게 아닌가 보다.
왕선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마마께 수렴청정의 최대 치적을 드리고자 합니다.”
굳었던 명덕태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흥미가 동한 거다.
“최대 치적?”
“예. 오랜 세월 이 땅을 어지럽힌 왜구를 내치는 겁니다.”
명덕태후의 흥미는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왜구 격멸은 참으로 오랫동안 주요 화두였으나 늘 구호로만 나왔다. 그러니 지금 한 말도 정치적 수사로만 느낀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왜구 격멸은 현 정세에서 가장 중요했다.
왕선은 고소를 삼켰다.
“마마. 군웅할거를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라의 모든 병력을 한데 모아서 싸워도 감당하기 어려운 왜구일세. 그런데 사분오열된 상태가 도움이 된다? 지금 이 사람을 희롱하는 건가?”
“어찌 마마께 결례를 범하겠습니까? 소인이 올리는 말은 진심입니다.”
“···진심이라.”
“예. 진심을 말할 기회를 내려주십시오.”
명덕태후는 침묵으로 허락했다.
“그동안 왜구의 공세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재상들이 사병을 소모하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서로 앞다투어 싸우고자 나서고 있습니다. 이는 각지에 창궐한 왜구를 촘촘하게 압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계속하게.”
“즉, 군현은 군현이 방어하는 사실상의 진관체제가 구현되는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명덕태후의 흥미가 다시 커지자 왕선은 냉큼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마마께서도 우려하시는 대로 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럴 것이네.”
“예. 바로 그렇습니다. 진관체제는 대군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대동군이 충청도를 침탈한 왜구 2만을 막아내겠다고 했다던데?”
“소인이 해낼 겁니다. 그러나 전장의 일을 어찌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해서, 대동군의 생각은 무엇인가?”
“군현을 침탈한 왜구는 진관체제로 막아내시고, 대규모의 적은 제승방략으로 격퇴하소서.”
왕선은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 이를 일개 군현의 힘으로 해내겠습니까? 군웅할거가 아니라 이 나라 고려의 조정의 치밀한 계획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것입니다. 장차 마마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게 될 겁니다.”
어차피 최영과 이성계의 주력은 거점에서 세월만 보내게 된다. 이를 태후 명령으로 움직이게 할 수만 있다면 왜구 토벌에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된다.
무엇보다 수렴청정하는 명덕태후가 이를 해낸다면 군왕와 밀월 관계를 체결한 거로 보이는 이성계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이성계의 기세를 꺾어버릴 수 있는 절묘한 수가 아닐 수 없다.
명덕태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하나만 묻겠네.”
“예. 마마.”
“강안전을 간 이유는?”
“일찍이 마마께서 소인에게 주상의 내일을 부탁하셨습니다. 하여, 의례적으로 알현했을 뿐입니다.”
“이토록 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주니 참으로 기분이 좋네.”
남은 건 태후의 명령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부채질을 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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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
조준은 하륜을 매섭게 몰아쳤다.
“지금까지 자네 말대로 해서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
“우재.”
“이 장군을 중앙군의 원수로 삼아서 왜구를 토벌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보게. 태후 마마께서 이 장군의 가별초를 출정하게 하셨어. 이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말일세. 이를 어찌할 건가.”
“기다려보게.”
*****
하륜은 말을 버벅댔다.
“전...하. 지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허. 또 말해야 합니까?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태후 마마의 명이옵니다.”
“그래서요?”
“···전하.”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습니까?”
“전하.”
왕우는 타박하듯 말을 이어갔다.
“보세요. 지금 이 장군의 가별초가 출병하면 상황이 어찌 되겠습니까? 이대로 왜구를 토벌하면 어찌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전하. 왜구 토벌은 이 나라의 숙원이옵니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과인의 말은 이 나라의 숙원을 왜 다른 사람이 해결하냐는 겁니다.”
왕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솟구쳤다.
“거절하기 어려우면 최대한 늦추세요.”
“···전하.”
“사실 과인이 생각해봤습니다.”
“예?”
갑자기 은근하게 말한다.
“이 장군이 버티는 겁니다.”
“대체 그게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왜 이렇게 말을 몰라 듣습니까.”
“···전하.”
하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과거 이인임 집권 시절 자신의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던 군왕이 지금 이렇게 나오고 있지 않은가.
“지금 상황이 딱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이 장군이 출정하지 않으면 왜구를 다 도륙하지 못해요. 안 그렇습니까?”
“···이 장군이 없으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 버티라는 겁니다. 이대로 고려군이 패배하면 태후 마마의 수렴청정은 심대한 타격을 받겠지요?”
“!!!”
“바로 그때 과인이 이 장군을 설득해서 출정하게 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저, 전하. 그리하면 백성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사옵니다.”
왕우는 사납게 노려봤다.
“군왕이 올곧게 서는 일입니다. 백성의 작은 피해는 어쩔 수 없어요.”
“하, 하지만···.”
“이보세요. 왜 이러는 겁니까? 대체 언제부터 당신이 백성의 삶을 챙겼다고.”
“······.”
“우리 솔직해집시다. 당신이 과인을 찾아와서 이 장군과 연결해준 이유. 거기에 백성은 없지 않습니까? 과인의 말이 틀렸습니까?”
평생 타의에 의해서 침묵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달변가인 하륜의 말문이 막혔다.
“백성? 이래도 고통이고 저래도 고통입니다. 그러니 우리만 봅시다.”
왕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
강안전을 나온 하륜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인가?”
이인임의 말이 스쳤다.
[자네는 아직도 주상을 잘 모르는 걸세. 장담하지. 이 나라 고려에 주상 전하를 침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이인임밖에 없어. 자네는 아직 멀었어.]
그리고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명심하게. 주상은 반드시 침묵해야 해. 안 그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
일이 참으로 고약하게 됐다.
하륜은 끝없이 타박하는 조준을 쳐다봤다.
“우재.”
“입이 있으면 말해보게.”
“자네가 도와주게.”
“똑바로 말하게.”
강안전을 나오고 지금까지 백번은 넘게 생각했다.
어찌 하는 게 좋을까.
...쓸데없는 짓이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이미 왕우가 아주 핵심을 찔렀으니까.
“출정을 최대한 연기해야 하네.”
...언제부터 백성의 삶을 그렇게 챙겼다고.
하륜은 쓰게 웃었고, 조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 미쳤나?”
“지극히 정상일세.”
“하. 한데, 태후 마마의 명령을 어기자고?”
“어기는 게 아니라 사정을 만들어 보자는 걸세.”
“최영 장군이 지켜만 볼 거로 생각하나?”
“그러니 도와달라는 걸세.”
조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하륜이 너무 진중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진심이라는 거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륜은 나지막하게 계획한 바를 모두 말했다.
조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대로 출정해봤자 이 장군께서 얻는 건 없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하지만, 버틸 명분이 없어.”
“동북면은 변방일세. 변방은 언제라도 변고가 발생하고.”
“자네 지금 동북면의 위기를 과장하자는 건가?”
“과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만 하자는 걸세. 도와주게. 우재. 이건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조준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백성은?”
“구해야지.”
“버티자면서.”
“이 장군이 구해야지.”
“······.”
“상승 불패의 명장이 구해야지. 안 그런가?”
조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논의를 이어갔다.
이성계의 사가를 나온 하륜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다가 이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과거에는 이런 협잡은 없었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멀찍이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한참 쳐다보던 하륜의 눈이 커졌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하륜 선생.”
“오랜만일세?”
“하하하. 그렇군요.”
하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그동안 의아한 게 많았는데 오늘 제대로 알게 됐어. 그래. 자네가 있었지. 내가 왜 이걸 놓쳤을까?”
“하하하. 소생은 선생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조합이네. 자네와 삼봉 사형이라니. 내가 그토록 함께하자고 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더는 발뺌할 수 없다.
어차피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남은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어찌 권신의 슬하에 있겠습니까?”
“이 사람의 처 백부 어른이 집정 대신으로 있던 시절과 작금의 군웅할거. 어느 쪽이 더 태평성대일까?”
“하하하. 혼란의 원흉이 그런 말을 하다니 하늘이 노여워할 것이외다.”
호탕한 웃음소리.
왕선이었다.
“개소리는 개만 내는 거로 생각했는데, 사람의 입에서도 개소리가 나오니 참으로 놀랍소이다.”
하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온했던 내 삶을 더럽게 꼬아낸 인물.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륜의 볼이 아주 잠시 살짝 씰룩였다.
“요즘 살만하오?”
“아주 살만합니다.”
“그래. 인생은 편안하게 살아야지. 안 그렇소?”
“물론입니다. 해서, 소생이 반드시 대동군 대감도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거는 기대가 크오.”
“내일이면 개경을 떠나신다고요?”
“아. 소식을 들었구려? 이 사람에게 아주 관심이 많소?”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장군도 출정한다는 말을 들었소. 상승 불패의 명장과 가별초라. 거는 기대가 아주 크오.”
하륜은 진하게 웃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소. 이 장군에게도 이 사람이 응원하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리하지요.”
왕선은 히죽거리면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표정은 아주 싸늘했다.
...쌩 양아치 같은 놈.
< 87화 밀월과 밀월 사이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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