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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86화 (86/187)

< 86화 투자와 비용 >

최무선과 문익점은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막상 이런 신세가 되어보니 참으로 고독하구려.”

“문관에 불과한 이 사람이 군웅할거에 발을 걸치면서 어려움은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최 장군께서도 이렇게 홀대를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가진 힘이 부족하니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더이다.”

“그러고 보면 다들 참으로 박합니다.”

“그렇지만 원망할 것도 없소이다. 나 역시 군웅할거에 뛰어들었고, 그들과 경쟁 관계를 수립했으니까. 한데, 이제 와서 인정에 호소하며 군현 동맹을 체결하자고 청하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여타 군웅의 입장은 아주 명확했다. 약소 세력에 속하는 최무선, 문익점과 어설프게 군현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허구한 날 원군만 보내게 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결국, 최무선, 문익점과 군현 동맹을 체결하는 일은 쓸데없는 출혈의 발생을 유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최무선과 문익점 역시 다른 군웅의 잠재적 경쟁자다. 내 피를 흘리면서 경쟁자를 일방적으로 도울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 두 사람은 이 엄중한 정세와 함께 발생하는 짝짓기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즉, 아무런 매력이 없는 존재였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서 이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건 별다른 효용성이 없었다. 애초 사병으로 상대를 도울 정도의 여력이 되었다면 이런 처지에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일 도움을 받더라도 그게 문제다. 그건 그만큼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상황은 고약했다.

그저 지금처럼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점만이 이 두 사람에게 내려진 유일한 혜택이었다.

“장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최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국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으니까.

“누구더냐?”

“대동군 대감입니다.”

최무선과 문익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서 모시거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빙그레 웃는 왕선이 모습을 보였다.

“아이고. 두 분이 함께 계셨군요.”

“어서 오시오. 대감.”

“혹시 이 사람이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늙은이끼리 술을 마시니 영 밋밋하더이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이거 그러면 제대로 찾아왔군요.”

“어서 앉으시구려.”

“예.”

왕선이 자리를 잡고 몇 차례 술잔이 오갔다.

최무선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왕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군현 동맹을 청하려고 온 걸까?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한데, 이 누추한 곳은 어찌 오셨소?”

“두 분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세간의 평이 어떻든 왕선은 전라도의 절반을 움켜쥔 군웅이다.

심지어 김성우를 멸하면서 충청도의 3할 정도를 확보한 상태.

말 그대로 유력 군웅이었다.

최무선과 문익점과 같은 군소 군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현재 두 사람의 처지에서 왕선이 동맹을 청한다면 절대 거절할 수 없다.

그러나 왕선은 이 절박한 두 사람과 일시적인 동맹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하여,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 사람을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우선 이 사람과 동맹을 맺어주십시오.”

“!!!”

두 사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토록 타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

그런데 이토록 강성한 군웅의 입에서 듣게 됐다.

심지어 제안이 아니고 부탁이라고 했다.

이 세심한 단어의 선택이 두 사람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의 미소는 부드러워졌다.

“영천과 산청에 각각 3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내서 왜구를 토벌할 생각입니다.”

원군이 아니라 왜구 토벌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려 600명이다.

그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두 사람의 전력을 모두 합쳐도 1천 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한다면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것보다 더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왕선의 말은 이어졌다.

“두 분께 동맹을 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군세이지만 이 사람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아니외다.”

“하면, 동맹을 수락하시는 겁니까?”

최무선과 문익점은 의아했다.

동맹이 좋긴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손을 내미는 걸까?

심지어 왕선은 2만 명의 왜구를 상대해야 하는데 600명이나 내보내면서?

의문은 미궁 속에 빠졌다.

“아. 결례를 범했군요. 도움을 청한다고 했는데 그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들어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들어보시고 내키지 않으시다면 편하게 거절하십시오.”

“···말씀하시오.”

“화포와 목화. 가능하겠습니까? 화포로 적의 대군을 격멸하고 목화로 백성을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자면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해서, 오늘 두 분께 군현 동맹을 청하는 겁니다.”

옥쟁반에 구슬이 구르듯 자연스럽게 말은 이어졌다.

“단어 몇 개를 수정하겠습니다. 이 사람 대동군 왕선은 두 분께 투자하고자 합니다. 어떻습니까? 투자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십니까?”

두 사람의 눈이 철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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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연신 한숨을 쉬었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장군. 이 사람이 이상한 거요?”

나세 역시 한숨을 쉬었다.

“···아니외다. 나 역시 주공의 이번 결정은 이해할 수 없소.”

“그렇지요?”

“그렇소.”

정도전은 분통을 터트렸다.

“동맹을 선택해도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건지.”

“···따신 옷 입고 화포 쏘자? 나도 당황스럽소이다.”

“딱 깨 놓고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화포를 도입한다고 왜구를 감당할 수 있소?”

“아군 전력이 3천. 두 세력의 병력을 합쳐도 1천 명이 안 된다고 들었소.”

“왜구는 2만 명이 넘고!”

“무리수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정도전은 다시 격분했다.

“화포 쏘기도 전에 적군이 개떼처럼 몰려와서 아군을 도륙할 거요.”

“백성은 따신 옷을 입기도 전에 왜구에게 당할 거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나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세력과 동맹을 맺으면 아군의 전력을 이동시켜야 하지 않소?”

“가뜩이나 불리한데 그건 최악이오.”

“한데, 벌써 주공께서 동맹을 청하러 가셨으니.”

“막아야 하오.”

그때

“막긴 뭘 막소?”

여유롭게 웃는 왕선.

정도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 주공. 혹시 벌써 다녀오신 겁니까?”

“아. 성대하게 군현 동맹을 체결하고 거하게 한잔했소.”

“낙향하겠습니다.”

“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왕선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전주에 있는 전 선생에게 사람을 보내시오.”

“···무슨 내용을 전달할 생각입니까.”

“영천에 300명, 산청에 300명을 보내야 하오.”

“!!!”

“그리고 최무선 장군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라고도 전하시오. 금이든 은이든 뭐든.”

“!!!”

“전폭 지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서, 설마 동맹을 맺은 것도 부족해서 원군을 보내는 것을 넘어서 지원까지 약조하셨습니까?”

“원군이 아니라 신뢰의 표현. 지원이 아니라 투자.”

“쓸데없는 비용이 드는 겁니다.”

왕선은 슬쩍 쳐다보면서 비꼬듯 말했다.

“사대부들은 대국에 조공하는 건 이 땅을 지키기 위한 투자라고 하면서, 강군을 육성에 드는 건 쓸데없는 비용이라고 하오? 두 가지 모두 이 땅을 지키려는 방편인데 말이외다.”

정도전은 말문이 막혔다.

“거. 우리만 따신 옷 입지 말고 백성도 따신 옷 좀 입혀봅시다.”

“좋습니다. 다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한가하게 옷 타령하실 때가 아닙니다. 그 따신 옷 입기도 전에 죽을 수가 있다고요.”

“화약 병기로 적을 궤멸시키면 되오.”

“좋습니다. 다 좋아요. 화약 병기로 적을 이길 수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런데 200척이 넘는 적의 군선은 어쩔 겁니까? 아군의 배를 다 끌어모아도 20척에 불과합니다.”

“그러게 군선을 좀 증강하지. 뭐. 이건 어쩔 수 없이 조정의 지원을 좀 받아야겠지. 그렇지 않아도 태후전을 들릴 생각이오. 모르시오? 태후 마마께서 이 사람을 아주 좋아하신다오.”

“그래 봤자 수십 척에 불과합니다.”

“충분하오. 화약 병기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오?”

“그들이 바다를 떠다니는 데 무슨 수로 화포를 쏠 수 있습니까?

왕선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가르침을 내리겠소이다.”

“······.”

“군선에 화포를 실으면 되오.”

화약 병기로 적을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군선에 화포를 설치한단다.

정도전과 나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선은 오른손을 내저었다.

“미륵의 권능? 뭐. 그런 거로 생각하시구려.”

“······.”

“거. 그냥 합시다? 시간 없소.”

그냥 쐐기를 박았다. 언제까지 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전투의 주역은 최무선과 화약 병기가 될 거니까.

그때 남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륜이 강안전을 은밀하게 다녀갔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남은의 보고를 들은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륜이? 강안전을? 왜? 어떤 이유로?”

“그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시기는 언제인가?”

“도당 회의 전날이었습니다.”

...도당 회의 전날이라.

시기가 참으로 묘했다. 그리고 도당 회의에서 끝없이 꼬리를 물고 설쳐대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성계가 갑자기 나선 이유.

...뭐라고 해야 할까?

온몸 구석구석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손가락이 마구 비벼졌다.

이 간지러움을 어찌하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

머릿속은 의문을 풀어내기는 너무 어지럽다.

결론은 하나.

직접 만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래서 강안전으로 갔다.

“하하. 대동군이 어쩐 일입니까?”

“출정을 앞두고 있사옵니다. 응당 전하를 알현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응? 출정하는데 왜 과인을 봅니까?”

이것 봐라?

상당히 까칠하다. 왕선은 슬쩍 시선을 틀었다.

-우군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우군으로 보기 싫은 거겠지.

또 자아분열.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분열된 자아의 내용에서 처음으로 공통점이 나왔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

“아. 곡해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태후 마마께서 수렴청정하지 않습니까? 그걸 이른 겁니다.”

-당신이 나를 친정에서 끌어내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지?

“어쨌거나 전주를 잘 지켜내세요.”

-이번 출정은 내 땅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당신의 영지를 방어하는 게 아니더냐.

...갑자기 정신이 맑아진 걸까?

이 순간 왕우의 자아는 분열하지 않았다.

군왕의 권력욕을 표출하는 대목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진정한 충신을 찾았으니 고맙긴 하군.

진정한 충신?

왕선은 곧장 입을 열었다.

“신 왕선 오직 주상전하의 충신이 될 것이옵니다.”

“하하. 거는 기대가 큽니다. 늘. 언제나.”

왕우는 빙그레 웃었다.

-이성계야말로 나의 신하지.

-당신만 아니었다면 그로 인해서 내 권위는 하늘을 찔렀을 거야.

...이 양반아. 당신 이성계한테 죽는 운명이야. 내가 지금 그걸 막아 주고 있는 거고.

왕선은 공손하게 예를 취하며 물러났다.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일이 더럽게 꼬일 뻔한 거다.

일단, 수렴청정 정국부터 지금까지 이성계의 행보가 어심에 들어간 거다. 아주 잘.

그리고 이성계가 자처한 이유. 그것도 알았다. 중앙군 원수로서 전투에 참전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왜구 격멸을 중앙군의 이름으로 주도하려고 한 것이다. 심지어 이성계의 가별초를 주력으로 해서.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이성계는 왜 이를 수용했을까? 이건 군웅할거와 역행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원래도 고려를 그냥 삼킨 사람이다. 그로서는 군웅이 설쳐대는 상황보다는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게 먹기 좋을 거다.

물론 역사가 틀어졌으니 이성계가 그런 사악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왕선은 이성계가 고려의 신하로 살아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아름다운 낭만 따위는 절대 품지 않았다. 그건 고민할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짓이라고 판단 내렸으니까.

이성계는 반드시 이 땅을 탐하려고 할 것이다. 무조건.

“어쨌거나 적절하게 막긴 막았네.”

왜구를 소탕하려면 이성계의 가별초가 움직여야 하지만, 중앙군 원수가 되어서 미쳐 날뛰는 건 막아야 하니까.

“출정하기 전에 밑밥 다 깔아 놓고 가야겠군.”

< 86화 투자와 비용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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