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군현동맹 >
도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는 지금까지 없었던 사상 초유의 무게를 내린 것이다.
[충청도. 왜구의 군선 500여 척, 왜군의 규모 2만여 명]
[전라도. 왜구의 군선 120척. 왜군의 규모 5천여 명]
그리고 영해부, 송생, 울진, 삼척, 평해, 영해, 영덕 등등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규모였다.
말 그대로 고려의 남부지역이 모조리 공세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어지간한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나라 간의 총력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재상들은 이 미증유의 재난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았다. 특히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기반을 둔 재상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핏대를 세웠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과거 이인임 집권 시절 왜구는 나와 상관없는 내 나라의 강토를 어지럽히는 적이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재산의 일부인 사병과 군량을 동원해야만 하는 불편한 존재였다면 지금은 완벽하게 성격이 달랐다.
즉, 내 나라가 아니라 내 영지를 공격하여 내 재산을 직접 위협하는 날강도가 바로 왜구이다.
하여, 현 고려의 도당은 영지를 지키고자 악을 쓰는 영주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중앙에 모여서 이권을 논하는 형태가 취해진 것이다. 사실상 일종의 연합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성질이었다.
아쉽게도 작금의 고려 조정은 이 불합리한 구도를 어찌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일국을 책임지는 집정 대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다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희한하게 돌아갔다.
과거 이인임 집권 시절에는 도당의 중론을 모아서 개경에서 원수를 선출하고 재상들이 눈물을 머금고 사병과 군량을 토해내는 형식이었으나 지금은 완벽하게 달랐다.
영지를 지키고자 하는 영주들이 근처 유력 영주와 손을 잡고 보다 효율적으로 내 땅을 지키고자 나선 것이다.
즉, 군웅별로 짝짓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짝짓기는 늘 그렇듯이 쏠림 현상을 유발한다. 무릇, 상대의 구애를 받는 존재는 남다른 매력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은 즉각 사병을 동원하여 왜구와 맞설 것이오.”
조민수였다.
“이 나라 고려를 가볍게 여기는 왜놈들을 이참에 모조리 격멸해야 합니다.”
양백연이었다.
재상들은 성토하듯 한마디씩 거들었다. 당장이라도 출정할 정도로 격앙된 상태였다.
그리고
“험험. 수시중 대감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음. 이 장군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최영과 이성계.
고려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향해서 재상들의 구애가 쏟아진 것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중앙에 앉아서 군현 동맹 체결을 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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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과 정도전 그리고 나세, 이옥, 마천목의 눈이 남은의 입으로 향했다.
“최영 장군은 모든 청을 고사하셨습니다. 집정 대신인 수시중을 역임하시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최영 장군의 세력 범위는 강원도에서 경기도. 특히, 강원도에 왜구의 침탈이 발생했을 건데?”
“그건 변안열 장군과 이원계 장군이 나서기로 한 모양입니다.”
“음. 강력한 군웅이 두 명이나 당여로 있으니 좋군.”
“뭐. 어쨌든 결국, 최영 장군이 직접 전장에 나설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예상했던 내용이다.
“상승 불패의 명장께서는?”
“주공의 예상대로 많은 군웅이 이성계 장군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만.”
“거절했나?”
“예. 그런데 거절하고 한 말이 좀 희한합니다.”
“희한하다니?”
“···어명이 내려지면 언제라도 출병하겠다고 하더군요. 어떤 지역이라도.”
세력 기반이 동북면인지라 심드렁한 건 이해하겠는데 어명을 끼워서 팔고 있다?
이거 이성계가 제대로 노선을 잡은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떤 지역이라고 했다.
“본인이 명장이고 제일 군사인 조준도 전시 내정을 잘합니다.”
나세가 끼어들었다.
“결국, 어떤 지역으로 가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한 거지요.”
“나세 장군의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이겁니다.”
이번에는 정도전.
“나는 언제라도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선을 잘 대고 있어라.”
그의 말에 모두 쓰게 웃었다.
이성계라는 괴물이 똑똑한 책사를 끼고 있으니 너무 얄밉다.
남은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이었다.
“정지 장군과 박위 장군의 사가에도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습니다.”
“최선에 속하는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차선책에 사람들이 붐비나 보군.”
“예. 그리고 충청도의 지용기 쪽도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접선하고 있습니다.”
“멍청한 사람들이군.”
“하하하.”
웃자고 한 말이다.
왕선과 일진일퇴를 주고받았으나 지용기는 뛰어난 인물이다. 당연히 구애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군.”
“주공의 힘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직 방법이 있는데 굳이 여기까지 오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으니까요.”
“그래도 우리도 손잡을 상대를 정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지요. 그리고 서둘러야 합니다. 전주 지척에 있는 충청도 진포만 하더라도 왜놈이 2만 명입니다. 여차하면 아군의 거점은 쑥대밭이 될 겁니다.”
“다른 경로로 치고 올 왜구까지 하면 더 많겠지.”
“예. 게다가 작금의 상황은 심각한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이건 아군에게 무척이나 불리하게 작용하고요.”
“문제?”
“원수가 임명되어 중앙군이 진격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너도나도 왜구를 물리치자면서 악을 쓰고 있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 제 땅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즉 내 세력 범위와 멀리 떨어진 곳의 왜구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왜? 괜히 나섰다가 피해를 보면 어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니까요.”
정도전은 말을 덧붙였다.
“잊지 않으셨겠지요? 군웅할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소강 중일 뿐이고 상황에 맞게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는 겁니다. 단적으로 그 최영 장군조차 본인의 사병을 누구에게 위탁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현실입니다.”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왕선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거. 다 알고 있는 말을 뭐하러 꺼내서 분위기 무겁게 만드시오? 결론은 충청도에 들이닥친 2만 명을 막으려고 일부러 나설 인사가 없을 거라는 말이지요?”
정도전은 민망한 듯 입맛을 다셨다.
“예. 맞습니다.”
“그놈들은 충청도를 짓밟은 다음 아군의 세력 범위를 노릴 거고?”
“아군의 영역이 옥토인 이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알겠소. 고민해봅시다. 그리고 이옥 장군.”
“예. 주공.”
“먼저 전주로 내려가게. 천목을 데리고.”
“알겠습니다. 먼저 가서 전군에 경계 태세를 내리겠습니다.”
“아주 능동적으로 대응하게. 승산이 있다면 선제공격해도 무방하네.”
“그리하겠습니다.”
왕선은 숨을 내쉬면서 손뼉을 마주쳤다.
“모두 내 말 새겨들으시오. 이 미증유의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다른 군웅과 달라야 하오. 단지 아군의 영역만 지킨다면 영원히 왜구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소. 그건 백성을 버리는 행위.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이 땅 곳곳에서 왜구를 내칠 수 있는 작전을 수립해야 하오. 아군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이 땅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거요.”
남은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전주 일대만 수성할까 봐 걱정하던 터였으니까.
이거 아무래도 주인을 제대로 찾은 거 같다.
참으로 흡족했다. 슬쩍 정도전을 쳐다봤는데 미세하게 웃고 있다.
그러다가 왕선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하지 말고 일하게.”
“예. 주공.”
남은이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면 정도전과 세력의 이합집산을 분석한다.
나세가 군략의 초안을 세우면 정도전과 논의하면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판을 만들어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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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재상들이 제출한 명단을 읽었다.
그러니까 짝짓기의 결과물이었다. 그 결과물은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게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었다. 제 세력을 지키려는 자위적 수단? 뭐. 그런 수준이었다.
“이건 이대로 주상께 고하겠소.”
먼 산을 쳐다보던 왕선이 급히 나서려고 했으나 정도전의 말이 스쳤다.
[절대 중앙군을 편성하자거나 원수를 임명하자는 식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가뜩이나 미운털 박혔는데.]
이어서 스치는 나세의 말.
[주공. 전장은 내부의 적이 가장 위협적입니다. 아무리 손을 잡지 않더라도 전장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릅니다. 지금의 불편함이 그때의 불협화음으로 번질 가능성은 아주 큽니다.]
참기로 했다.
하지만
“대감. 이렇게 결정하면 곤란합니다.”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몽주였다.
최영은 슬쩍 정몽주를 쳐다보더니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가?”
“충청도를 침탈하는 왜구를 막아낼 방도가 수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음. 그렇군.”
최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봐라?
왕선은 시선을 슬며시 옮겼다.
-이인임이 이렇게 했었지.
또 한 번 옮겼다.
-최영 장군이 충청도를 넘길 리가 없다.
그리고
-지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갈 것이다.
-최영 장군은 군웅들과 군현 동맹을 잡지 않았다. 심각한 이합집산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겠지.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보던 왕선은 옅게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한 거 같다. 상황을 너무 고약하게 꼬아서만 본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여기저기 남아 있지 않은가.
“대사성의 말은 참으로 일리가 있소. 혹시 나설 사람이 있소이까?”
“충청도는 이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지용기였다.
“2만이 아니라 20만이라도 떨쳐내겠습니다.”
괜히 관우, 장비와 비교하는 게 아니다.
2만이라는 엄청난 규모에도 주눅 들지 않은 지용기의 용맹은 정말 대단하기는 했다.
최영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그와 군현 동맹을 맺은 군웅들의 안색이 와락 구겨졌다.
“험험.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외다.”
“그렇소. 조금 더 생각해보지요.”
은근슬쩍 만류하는 재상들.
“그들이 당장 충청도 내륙으로 진입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이까.”
...아예 대놓고 내뱉는 재상.
“험험. 내 생각으로는 전라도로 진군할 거 같은데.”
...저주를 퍼붓는 놈.
지용기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최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모두 시선을 피했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왕선의 시선이 이성계와 마주쳤다.
-예상대로군.
예상대로?
왕선의 머릿속으로 만 가지 생각이 스쳤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침묵하던 이성계가 출정을 청한다.
결론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내용. 그리고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왜?
꼬리를 물며 생긴 의문은 끝없이 움직였다. 잡고 싶은데 잡히지 않았다.
한껏 의식 속에서 의문을 잡으려고 발악할 때 다른 결론이 치솟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걸 선택했다.
“이 사람이 나서지요.”
모든 사람이 시선이 순식간에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다양한 감정이 보였다.
-미쳤군.
-개고생하고 싶나보지?
-그래. 가서 돌아오지 말아라.
-하긴. 어차피 그놈들이 전주로 갈 거니까.
-자기 땅 지키러 가는 건데 대단한 거 하러 가는 꼴이라니.
-망해버려.
...그냥 욕이었다.
그리고
-또?
이성계였다.
“그래 주겠소이까?”
다시 확 밝아진 최영의 목소리.
“물론입니다.”
“한데, 혼자서 가능하겠소?”
최영이 알기로 왕선의 군세는 3천여 명. 2만의 왜구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그리고 아직 군현 동맹을 맺지 않은 상황이다.
“그 문제는 이 사람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백방으로 지원하리다.”
“하하하. 장군께서 함께 가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대감이 아니라 장군이라고 불렀다.
최영은 옅게 웃기만 했다.
왕우는 시선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부분 시선을 피했다. 특히, 지용기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여유롭게 행동했다.
그렇게 모든 재상을 돌아본 왕선은 싱긋 웃었다.
아주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도당 회의가 끝난 직후 곧장 사가로 향했다.
정도전과 남은, 나세가 이미 당도한 상태였다.
“가장 합당한 방법은 정지 장군과 박 위 장군입니다.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소장도 군사의 생각과 같습니다.”
“소생의 결론도 그렇습니다.”
정도전과 나세 그리고 남은은 정말 열심히 분석하고 논의한 모양이었다.
“정지 장군과 박위 장군이라.”
이 사람들의 말대로 아주 좋은 조합이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최상의 선택이기도 하고.
정도전이 내민 명단을 쳐다봤다.
빼곡하게 군웅들에 대해서 적혀있었다. 거미줄처럼 군현 동맹도 표시됐다.
“군현 동맹의 대상자를 말해주겠소.”
군현 동맹이 회자할 때부터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도당에서 확실하게 결정했다.
왕선의 검지가 움직였다.
그리고 멈췄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군현 동맹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군웅의 이름에서 멈춘 거다.
[산청의 문익점]
정도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세는 눈을 껌뻑였고, 남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의 검지는 다시 움직였다.
소외된 또 한 명의 군웅.
[영천의 최무선]
억겁의 황당함이 내렸다.
강풍보다 더 강한 혼란의 바람이 불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골목에 맛집이 있는 법이라오.”
“······.”
정도전은 슬며시 일어나더니 허리를 굽혔다.
“그간 꽤 즐거웠습니다.”
“···거. 내 말 좀 끝까지 들으시오.”
“그간의 의리를 지키고자 다른 군웅을 찾지는 않고 그냥 낙향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세와 남은도 살며시 움직이고 있다.
...이 사람들이.
노발대발하는 정도전을 달랜다고 식겁했다.
< 85화 군현동맹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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