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수렴청정(2) >
재상들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왕우의 행보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두서없이 과격했다. 해서, 손쉽게 도당의 중론은 명덕태후의 수렴청정으로 모였다.
하지만
“이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성계가 대놓고 반대에 했다. 이제 조금 숨통이 트이던 도당의 공기는 다시 뻑뻑해졌다. 불편한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이성계의 입을 닫게 할 수는 없다.
“주상께서 친정에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한데, 다시 수렴청정이라니요? 도당에서 이걸 논의하기에 앞서 주상 전하를 올곧게 보필하자는 결의를 다지는 게 우선입니다.”
“···주상께서는 보령이 어리시어 아직 정사를 돌보기는 어렵네. 해서, 수렴청정을 제안한 걸세.”
“수시중 대감의 말씀을 어찌 틀렸다고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소직은 그럴수록 도당의 결의를 한데 모아서 주상의 정무를 잘 거들 방도를 찾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군. 군왕의 보령이 어릴 때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하는 건 전례에도 있고, 명분도 합당하네.”
“금상은 선왕의 적통. 정무를 돌보는 데 이보다 더한 명분이 있소?”
카랑카랑한 목소리.
시선이 쏠렸다. 목은 이색이었다.
“이 사람 역시 이 장군의 의견과 같소. 주상께서 보령이 어리시긴 하지만 친정에 의욕을 보이고 계시오. 한데, 도당이 나서서 수렴청정을 청한다? 이는 신하 된 도리가 아니외다.”
이성계와 이색.
문과 무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반대에 나서자 안건은 표류할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판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 최영의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태후의 수락까지 받은 상황이다. 설마 도당에서 제동이 걸릴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다.
“이래서 이인임이 있을 수 있었지요.”
까칠하고 조롱이 담긴 어조.
이번에는 왕선이었다.
이색은 불편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말 그대로입니다. 주상의 보령이 어리시어 이인임이 정치적 후견인이 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결국 권신이 되었습니다. 지금 수렴청정은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막고자 논의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허. 대동군은 이 사람과 이 장군에게 흑심이 있다고 보시오?”
왕선이 웃으면서 대꾸하려고 할 때
“두 사람 모두 그만하시오.”
최영이 개입했다.
왕선은 헛웃음을 삼켰다.
...진짜 분위기 파악 못 한다. 지금 어떻게든 이성계와 이색을 흔들며 전체 분위기를 교란해야 한다. 지금은 두 명에 불과하지만 언제 인원이 더 늘어날지 모른다. 즉, 오늘 끝을 봐야 한다. 그런데 거들지는 못할망정 초를 치고 있다.
정말이래서 이인임, 이인임 하는 가보다. 그는 어떤 안건이든 능수능란하게 도당의 재상들을 움직였다. 정말로 그랬다. 악행을 떠나서 그의 정치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일개 신하가 군왕의 후견인이 될 수 있었다.
최영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칼을 들고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게 백배는 편하오. 매사 이렇게 반대가 있으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노기가 잔뜩 담겼다.
...그러나 도당에서 화를 낸다고 되는 건 없다. 이 사람들은 상명하복에 익숙한 전장의 부관이나 군부의 무장이 아니라 고려의 재상이다.
오히려 최영의 정치적 수가 얕은 걸 증명하는 자충수에 불과할 뿐이다.
“이 문제는 다시 논의하겠소이다. 최대한 빨리 회의를 소집하리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도당회의는 마쳤다. 정몽주는 황급히 이색을 붙잡았다.
“사부님.”
“됐네. 내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야.”
“어찌 제자가 사부님의 뜻을 꺾으려고 하겠습니까? 그걸 여쭙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대동군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실은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와 이렇게 적대하십니까?”
“대동군은 위험한 사람이야.”
“예?”
“심지어 왕족일세. 경계하는 게 마땅하지.”
듣기에 따라서 왕선이 역모를 획책한다고 느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다. 정몽주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사부님. 대동군은 그럴 인사가 아닙니다.”
“포은. 역적이 왜 역적이 되는지 아나? 딱 한 번 역적질을 해서 역적이 되는 거야. 그 이전까지 그가 행한 행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제아무리 충직한 신하라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 용상을 한 번이라도 탐하면 역적이라는 거지.”
“대동군이 언젠가는 변심할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의 생각은 무척이나 위험해. 당연히 경계해야 하네.”
“···생각이라니요?”
“몰라서 묻나?”
“대동법이 과하기는 하지만 취지가 틀린 건 아닙니다.”
“···지금 너는 이 사부가 이권 때문에 대동군을 적대한다고 보는 것이냐?”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대동군의 생각을 이르셨기에 언급한 겁니다.”
정몽주의 해명에도 이색의 안색은 경직됐다.
“위무제 조조를 치세에는 능신, 난세에는 간웅이라고 했지. 지금 대동군 왕선의 길은 어떤가? 참으로 비슷하지 않나?”
정몽주는 더 물을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탓이다.
이색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포은. 이제 확실히 하게.”
“사부님.”
“도당을 언제까지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나. 너무 번잡하고 어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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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연신 땀을 닦으면서 입을 움직였다.
“여러 재상과 무장들이 이성계 장군과 목은 선생의 사가를 오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친정과 수렴청정 사이에서 조율하는 거 같습니다.”
“친정과 수렴청정을 두고도 저울질을 하는 건가? 참 고약한 인사들이군.”
“···아.”
“왜 그러나?”
남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왕선을 눈치를 살피자 정도전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들 주공이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거. 군사는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시오.”
“군사의 말대로입니다.”
“······.”
거. 사회생활 못하는 인사 같으니라고.
아주 그냥 둘이서 죽이 잘 맞아?
아. 정도전, 남은 이 두 사람은 최후를 함께한 혁명 동지였지?
“이대로 수렴청정이 철회되면 어찌 되오?”
“도당의 주도권이 넘어가겠지요.”
“누구한테?”
“말하면 뭐합니까. 입만 아프지. 이성계 장군에게로 넘어갈 겁니다.”
“목은 선생은?”
“소생의 사부님이시긴 하지만 그분은 정치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성미대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무엇보다 이 난세를 지탱할 무력이 없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앞으로 체계적으로 손을 잡을 가능성은?”
“이성계 장군이 고려를 갈아 마시려고 하지 않는 이상 아주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한 번씩 정도전의 말을 들으면 소름이 확 돋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뭔가 알고 하는 말 같다고 해야 할까?
“우선 문제는 두 사람이 언제 입을 맞췄냐는 겁니다.”
“아. 그건 아니외다.”
“예?”
“짜고 친 게 아니라는 말이오.”
“확실합니까?”
“내 손목을 걸지.”
“오. 확실한 게 아니길 바랍니다.”
“아쉽겠구려.”
“예.”
두 사람의 헛소리를 듣던 남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환기하듯 말을 꺼냈다.
“만일 양쪽이 서로 손을 잡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역시 남은.”
“역시 남은.”
이럴 때는 참뜻이 잘 통하는 왕선과 정도전이다.
“주공. 이번 일은 남은에게 맡겨보는 게 어떻습니까?”
“모략질의 대가. 남은이라면 충분하지.”
“모략질의 대가라. 참으로 합당한 표현입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오. 김성우를 궁예로 덮어씌우지 않았어도 이겼을 거라고 말이외다.”
“맞습니다. 모략질의 대가 남은이 김성우의 내부를 사분오열 삼십 번은 냈을 겁니다.”
“바로 그거요.”
두 사람은 참으로 죽이 잘 맞았다.
남은은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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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뒷짐을 한 채로 개경 십자로를 거닐었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나 눈알은 좌우로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며칠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남은이 발길을 끊었을 때 십자로의 곳곳에서 묘한 내용이 나돌았다.
이색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흥분한 기색으로 찾아와서 따지듯 말하는 재상들 때문이었다.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것이오? 이 사람은 소문과 무관하오.”
“목은 선생. 지금 소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오?”
조민수였다.
“그래. 뭐. 다 좋소. 한데, 주상께서 친정하면 대동법은 어찌할 거요?”
“조 장군. 그건 도당에서 군왕을 잘 보필하면 되오.”
“잘 보필 못 하면?”
지금 떠도는 소문.
[군왕의 친정은 대동법의 집행이 아니라 군웅할거의 종식을 가져오게 된다.]
철저한 이권과 연결된 재상들로서는 또다시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목은 이색은 군웅이 아니다.]
재상들의 눈총이 이성계가 아니라 이색에게 쏠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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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은 이마를 긁적였다.
“이거 대동군의 수작이 보통이 아니군요.”
하륜은 감탄한 듯 말했다.
소문을 내긴 했는데 일반적인 소문의 흐름과는 궤를 달리했다.
말 그대로 권문세가를 대상으로 한 철저하게 비밀스러운 소문이었다.
하여, 백성들은 군왕의 친정과 군웅할거, 대동법의 상관관계와 관련한 소문을 듣지도 못하고 있다.
이건 보통 역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입을 타면 반드시 말이 새어나기 마련인데 이번은 철저하게 정해진 대상에게만 말이 흘러갔지 않은가?
실로 놀라웠다.
그리고 이러는 이유는 결국 하나밖에 없다.
왕선이 군웅할거의 종식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금상의 역량으로는 해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수준의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니. 이거 아무래도 대동군의 역량을 다시 평가해야겠습니다.”
“어쨌거나 목은 선생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 넣어버렸군.”
“예. 철저하게 사부님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장군과 사부님이 분명하게 손을 잡지 않은 걸 파악하고 공고하게 엮이는 걸 차단한 겁니다.”
“우리가 목은 선생을 돕지 않을 가능성이 클 때 손을 써버리다니. 정치도 전장과 비슷한 게 맞군. 그래. 이제 어쩌면 좋겠나?”
“장군. 이쯤 하면 된 거 같습니다.”
“음. 아쉽군. 어쩌면 수렴청정을 막아낼 수 있을 거 같긴 했는데.”
“그러면 가장 좋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주상의 어심에 확실하게 각인 되었으니 충분합니다.”
“어심에 각인되었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하륜은 빙그레 웃었다.
“장군. 소생이 원래 누구의 책사였는지 잊으셨습니까?”
“······.”
“개경에서 강안전의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소생일 겁니다.”
이성계는 쓰게 웃었다.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 광평군 이인임의 책사였던 자네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 곁에서 큰일을 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군웅할거가 펼쳐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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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남은.”
정도전도 화답했다.
“모략질의 대가.”
남은은 멋쩍게 웃었다.
“과...찬입니까?”
세 사람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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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태후는 자애롭게 웃었다.
“이번에 자네의 공이 아주 컸다고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아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나.”
명덕태후는 아주 흡족한 거 같았다.
역시 권력욕이 보통이 아닌 여인이다.
“이 사람이 최선을 다할 것이네. 주상이 장성하면 친정하면 될 것이야.”
“예. 마마.”
“다만 이 늙은이가 언제까지 숨을 쉬고 있을지 걱정이네.”
“마마. 천수를 누리시어 고려 왕실을 튼튼하게 하실 겁니다. 한데, 어찌 그토록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마마.”
“해서, 하는 말이네. 이 늙은이가 죽으면 자네가 왕실을 잘 이끌어주게.”
“왕족의 일원으로 왕실의 기강은 반드시 잡겠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주상을 잘 보필하란 말일세. 이 늙은이는 자네가 주상의 후견인이 되었으면 좋겠네.”
명덕태후는 한스럽게 웃었다.
“비록 재주가 부족하지만 어쩌겠나. 이 나라의 군왕이니 말이네. 수렴청정이 거둬지면 주상의 손에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이 들어가지 않겠나?”
...마마. 주상이 권력을 되찾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왕선은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주상이 어설프게 국정을 운영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예. 맞습니다.
이번에 명확하게 증명됐습니다. 무능한 인간이 권력을 가지면 어찌 되는지 말입니다.
왕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듣기만 했다.
“나라에 큰 우환이 생길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네.”
혹시 아십니까?
이번에 고려의 사직이 거덜 날 뻔했습니다.
주상께서 권력을 잡은 그 짧은 순간에 말입니다.
이래서 이인임, 이인임하는 겁니다. 이 위태로운 나라를 그가 부여잡고 있었다는 걸 증명한 겁니다. 바로 주상이.
주상의 권력을 가지면 나라는 망합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왕선의 표정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수렴청정하면서 자네를 물심양면 지원하겠네.”
“마마.”
“그러니 훗날 자네가 주상의 후견이 되어주게. 주상이 권력을 올곧게 쓸 수 있게.”
...송구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 이 나라 고려는 재상 총재제로 운영될 거니까요
최영이 재상 총재제의 길을 열고, 당신이 재상 총재제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이 사람도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 테니까.”
...당신 두 명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재상 총재제라는 걸 꿈에도 모를 겁니다.
왕선은 천천히 나지막하게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얼마 뒤 다급한 장계가 올라왔다.
[왜적이 대마도로보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적의 형세가 너무나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막아내는 것이 역부족이옵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왜구의 공세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 규모는 지금까지 없던 실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사상 최대의 왜구였다.
< 84화 수렴청정(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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