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사상최강의 연좌(2) >
연좌.
그것은 도당 혹은 군왕에 대한 불복종 의미를 담은 정치적 행위였다.
이건 군왕의 독선적인 행보에 제동을 걸어서 정치의 담론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혹은 도당의 횡포에 대항하여 나라의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때로는 시대적 요구를 주장하며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혹은 집단의 이해와 이해가 충돌했을 때 상호 간의 세 대결을 펼치는 방도이기도 했다.
이처럼 연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번 달랐다.
그러나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연좌의 주체.
어떤 경우의 연좌라고 하더라도 주체는 사대부였다. 그러니까 연좌는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사대부들이 창칼을 들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승려가 대동법의 존속을 위해서 외치고 있다. 이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일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가 지금 저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옴마니 반메홈.”
승려들의 주문은 멈추지 않았다.
“옴마니 반메홈.”
일천 승려의 외침은 장내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사대부들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일천 승려를 쳐다봤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대부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대로라면 고려 본궐 앞의 연좌는 승려들의 것이 된다.
사대부의 연좌는 객체가 되고, 승려가 주체가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전하!”
젊은 사대부가 온 힘을 다해서 부르짖었다.
이대로 밀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대동법은...”
그런데
“이 나라 고려의 백성을 위한 제도이옵니다.”
사대부의 말을 가로챈 사람.
왕선이었다.
그리고
“옴마니 반메홈.”
승려들이 화답했다.
사대부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다시 외쳤다.
“전주를 비롯한 일부 군현에서 시행되는 대동법을...”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보듬어 주시옵소서.”
“옴마니 반메홈.”
이번에도 왕선과 승려들로 인해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이색과 사대부가 악을 쓰면서 외쳤으나 이는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분? 현실? 민심? 다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을 지배하는 원칙은 단 하나.
목청 싸움이었다.
무려 일천 명의 승려와 백 명이 안 되는 사대부의 대결이 아닌가?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사대부는 가히 만부부당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외쳤다.
“옴마니 반메홈.”
승려들이 화답했다.
“옴마니 반메홈.”
승려들의 단결된 염불은 참으로 장대했다.
대단한 결기를 보이지만 다소 어수선하게 구호를 외쳐대는 사대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실로 일사불란하고 그 엄중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옴마니!”
분위기는 고조됐다.
“반메홈!”
승려들은 열성적으로 외쳤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동법은!”
“불국정토!”
“대동법을!”
“지켜내자!”
“대동법으로!”
“대동단결!”
쉬지 않고 구호가 난무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대부의 외침은 없었다.
그들은 얼이 빠진 채로 일천 승려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왕선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끝없는 염불이 멈췄다.
실로 대단한 일사불란함이었다.
흡족하게 웃던 왕선의 시선이 사대부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그의 웃음은 거두어졌다.
“조정에서 연좌를 허용한 건 이익을 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의를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 고려의 연좌는 누군가의 이권을 대변하는 행위로 전락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권을 뺏어오는 행위가 되었다. 이 싸움에. 이 아귀다툼에 백성은 끼어들지 못한다. 하여, 본궐 앞에서 연좌가 진행되었으나 구경 오는 백성은 단 한 명도 없다. 보라. 이는 연좌장의 외침이 그들만의 지껄임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나라의 정치가 백성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않는다는 걸 말해주는 참담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왕선은 오른손 검지를 내들었다.
“그리하여 말하겠다. 여기. 이곳은 이권을 다투는 곳이 아니라 이익을 나누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
매서운 눈으로 사대부들을 쳐다봤다.
“바로.”
쐐기를 박듯 강하게.
“이 순간부터.”
그 순간 왕선은 이색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안색은 수치심과 불쾌함이 가득했다.
이색의 입이 부들부들 떨리며 열리려는 순간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일천 승려의 주문이 다시 시작됐다.
이색의 노기는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그러자 혈기 왕성한 사대부들이 악을 쓰며 나섰다.
“대동군 대감이...”
“옴마니 반메홈.”
“무슨 자격으로...”
“옴마니 반메홈!”
하지만 그들의 말은 일천 승려의 염불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정도전은 눈을 반짝이면서 하륜을 쳐다봤다.
“캬. 아름답지 않나?”
“······.”
“이 사형은 말일세. 전율이 올라오고 있어. 전율. 그래.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지. 안 그런가?”
“···사형의 생각입니까?”
아니다. 왕선의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기가 막힌 분위기에서 초를 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해서, 적당하게 말을 돌렸다.
...짧은 순간 하륜의 정신을 가장 어지럽힐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곧장 실행에 옮겼다.
“옴마니 반메홈?”
하륜의 눈이 철렁였다.
그때였다.
“대동군의 말이 옳습니다.”
염불이 지배하던 공간의 틈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
그렇게 큰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모든 사람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왕선이 황급히 예를 취했다. 곧이어 사대부와 승려 그리고 관망하던 재상들 모두 예를 취했다.
“전하.”
목소리의 주인은 고려의 군왕 왕우였다.
“어찌 납시었사옵니까?”
그 순간 왕우와 눈이 마주쳤다.
-과인이 왔거늘 천세를 연호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니까. 이 혼잡한 연좌장에서 과한 예를 찾으면 곤란하지.
-무슨 소리! 군왕에게 천세를 연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예이거늘. 대동군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은가?
-대동군 만이 아니라 사대부와 도당의 재상들도 천세를 연호하지 않았는데?
-······.
-어째서 대동군에게 이토록 집착하지?
-집착이라니? 과인이 언제 집착했는가?
-집착이 아니면 시기? 질투? 뭐 그런 거일 수도 있지. 그냥 신하가 아니라 왕족이니까. 과인의 자리가 노릴 수 있는 위대한 태조 대왕의 후예, 고귀한 사해 용왕의 핏줄이니까.
왕우의 자아는 정말 치열하게 쟁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정도가 어찌나 강하던지 왕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내릴 정도였다.
“하하하. 이곳의 소란이 강안전까지 들립니다.”
“···결례를 범했사옵니다.”
“아닙니다. 참으로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과인의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그건 응당 군왕이 해야 했을 말이었다.
-대동법은 대동군의 정책. 그의 정치적 상징.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신하의 모든 행위는 군왕의 치적으로 연결되는 법.
-언제부터 제대로 된 군왕이었다고?
-...오늘 대동군은 단순히 대동법이 아니라 연좌의 정의를 내렸다.
-과인이 먼저 대동군을 이용했다. 신뢰를 깬 건 과인이야.
-군주는 신하를 이용할 수 있다.
이제는 어지러울 정도다.
이 정도면 정말 자아 분열이다. 용한 의원이 있으면 데려가야 할 정도다.
...어쨌든 이 혼란을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하. 신 대동군 왕선. 간곡히 청하옵니다.”
“아. 됐습니다. 대동법은 대동군의 정책이지요. 과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지요.”
왕우은 묘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어차피 개경으로 조세가 올라오지도 않지 않습니까. 또한, 해당 군현은 어명보다 대동군의 말을 따르는 곳인데 과인의 허락이 뭐가 필요합니까.”
뼈있는 말.
그리고 그 뼈는 왕선만이 아니라 군웅할거에 뛰어들었던 모든 재상을 경직시켰다.
분위기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어느새 대동법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물론, 냉정한 현실을 볼 때 군현은 영지였고, 이들은 영주다. 영지의 생산물은 영주가 취한다. 그러나 중앙에서 결의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집행된다? 이건 영주에게서 영지를 뺏어가는 시작점이 된다. 이제 와서 어떤 군웅이 이를 반기겠는가? 바로 왕우는 이처럼 엄청난 뇌관을 언급한 거다.
-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아니다. 군왕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야.
-저들이 나를 핍박하면 어찌하지? 내게는 힘이 없는데?
-대동군이라면 나를 지켜줄 거야.
-내가 먼저 대동군을 괴롭혔는데 도와줄까?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까.
-오, 옳다. 대동군은 어떤 말이라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왕선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려 조정을 휩쓸었던 대동법 정국은 종결됐다.
참으로 희한했다. 엄청난 힘을 가진 강풍이었으나 격렬한 논쟁은 없었다. 그러나 강풍이 넘어설 수 없을 만큼 높은 침묵의 힘이 증명된 정국이었다.
어쨌든 이 정국이 끝나면서 사람들의 희비는 엇갈렸다.
이색과 사대부는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도당은 침묵의 장벽을 보여주면서 고려를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는 걸 보여줬으면 말 그대로 식물처럼 별 효용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군왕 왕우는 처참할 정도로 권위가 무너졌다. 대동법 전국적 집행이라는 시작부터 헛걸음질했고, 군왕이 실제로 가진 힘이 미약함에도 막강한 사병과 재력을 가진 군웅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면서 고립을 자처했다.
반면, 왕선은 지금껏 없던 방법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더 튼튼하게 했다.
왕선이라는 이름 두 자가 고려 정계에 깊숙하게 새겨지는 날이었다.
“대사.”
“예. 대감.”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미륵사의 관선은 빙그레 웃었다.
“일찍이 대감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땡중들은 여전히 중생을 괴롭히며 살았을 겁니다. 심지어 그것이 중생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한다는 기만에 빠져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통곡하셨을 겁니다.”
“어허. 미륵불이오.”
“하하하. 이런. 이 땡중이 실언했습니다.”
일천 승려의 연좌.
이를 도출한 왕선은 즉각 사람을 보내서 미륵사의 관선에게 알렸다.
촘촘하게 짜인 밀교원의 정보망이 최대한 빠르게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에 관선은 미륵사와 은산사 그리고 일대 사찰의 승려와 함께 개경으로 입성한 것이다. 말 그대로 일천 승려의 집결이었다.
왕선은 훈훈하게 웃었다.
“다시 내려갈 것이오?”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해 내려가시구려. 그리고 미안하오. 속세를 떠난 승려들에게 이런 일을 부탁해서.”
“미륵불께서 불제자에게 중생을 구제하라고 하시는 게 어찌 부탁이라고 할 것이며, 미안하다고 하겠습니까?”
“하하하. 알겠소이다. 이 왕선 꼭 미륵불이 되어서 미륵사에서 노년을 보내리다.”
“이 땡중의 숨이 붙어 있을 때 그런 날이 오길 바랍니다.”
“물론이외다.”
관선과 일천 승려가 개경을 떠났다.
그리고
“순망치한이라고 했습니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거늘. 지금 고려 왕실의 잇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도전은 격앙된 발언을 쏟아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제대로 생각이 있다면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요. 주공을 우군으로 두려면 더 힘을 키워줘야 하는 겁니다. 한데, 대놓고 핍박하다니. 도저히 어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음.”
“주공. 생각 잘 하셔야 합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대로 주상만 믿고 가면 무슨 일이 터질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해서, 지금 그거 해결하려고 하오.”
“방법이 있습니까?”
“물론이오.”
정도전만큼이나 왕선도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일러주십시오.”
“우리 이번에는 정도로 갑시다.”
정도전이 멈칫하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렴청정입니까?”
“그래야지요.”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하면···.”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영 장군을 만나야겠소.”
“무운을 빕니다.”
“무운?”
“예. 무운.”
정도전은 고약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최영 장군을 만나는 건 적장을 만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니까요.”
“정말 군사는 눈치가 백단이구려.”
“기본입니다.”
< 82화 사상최강의 연좌(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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