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사상최강의 연좌 >
이인임 축출 이후 활기를 찾아가던 도당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군왕의 어명은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집행은 요원해 보였다.
어명이라는 압도적 명분이 내려졌음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상당수의 재상은 ‘대동법 전국적 시행’이라는 사상 초유의 어명에 불편한 심경을 내비치면서 여러 이유를 들어 도당에 발을 들이밀지 않았다.
이는 일련의 과정들이 오롯이 군왕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 아니므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대동군 왕선이 군왕을 충동질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으나 어디를 봐도 왕선이 얻어가는 건 없었다. 또한, 아무런 기반도 없이 전라도의 북부를 움켜쥔 유력 군웅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악수를 던질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결국 이는 강안전의 의지였다. 하여, 군왕의 정치력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물론, 대놓고 군왕을 욕해댈 수는 없으니 상대적으로 만만한 왕선이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왕선은 사람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관심법의 권능을 얻으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속으로 욕하는 경우가 하도 많은지라 일상이 욕받이라서 그랬다. 원래 듣던 욕이기에 그나마 태연할 수가 있...
“아. 짜증 나네.”
...아니다. 태연할 수가 없다. 속에서 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천지 차이다.
또 욕이라는 건 들을수록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열이 뻗치는 것이 지극한 이치다.
“그때 적절하게 대처 안 했으면 지하에 파묻힐 뻔했어.”
어명이 내려졌을 때 곧바로 최영에게 족쇄를 채웠다.
그 덕분에 최영도 적당한 욕의 지분을 가져갔다.
국정의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칼만 잘 휘두르는 집정 대신?
뭐. 그런 욕이었다.
물론 그 역시 대놓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대놓고 들리는 욕은 왕선에게 집중된 거다.
그리고 선봉에 선 사람은 참으로 정겨운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거. 오랜만이외다?”
얼마 전까지 접전을 벌인 지용기였다.
왕선은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의생은 잘 지내오?”
지용기의 미간이 크게 씰룩였다.
그러자 왕선은 더 진하게 웃어댔다.
“아. 한데, 조의생이 나와 대적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이보시오.”
“설마 안 했소? 허.”
“적당히 하시오.”
“이거 아무래도 다시 가르침을 내려야겠소.”
“더는 참지 않으리다.”
“그러라고 하는 말이오만?”
지용기의 안색이 험악하게 굳어지자 마천목이 슬쩍 나섰다.
왕선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적이라니. 참으로 질긴 악연이오. 일전에는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이번에는 어명에 맞서고. 참으로 위대하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조소를 날렸다.
“귀하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과 발전이 있기만을 바라오. 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용기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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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어찌 되었소?”
“순탄하오.”
나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안심할 수 없었다. 나세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런 욕받이 정국처럼 살얼음판에서는 완벽보다 더 완벽한 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걸 느꼈을까?
나세는 정도전을 향해서 몸을 살짝 내밀었다.
“계책의 이익을 헤아려 듣게 되면 그것이 곧 유리한 형세가 되고, 그 바깥으로 출병한 군대를 도와주는 것이오. 세란 유리함에 따라 권변을 만드는 것이지요.”
손자병법이었다.
“능력이 있는데 적에게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병사를 쓰되 적에게는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상책이오.”
“······.”
“나를 믿으시오.”
이보다 더한 자신감이 있을까?
정도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진행되는 경과는 반드시 보고해야 하오.”
“그리할 것이외다.”
“좋소. 아. 그런데 이옥 장군은요?”
“보이지 않게 주공을 보좌하고 있소이다.”
“적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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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묵직한 목소리.
왕선은 신경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이성계다.
지용기를 가볍게 밟아주고 상쾌한 마음으로 귀가하려는데 이 사람이 불러댔다.
“이 장군.”
“대동법. 이대로 강행할 생각이오?”
“음. 그건 어명이오만?”
“어명의 형식을 빌린 대감의 정치겠지요.”
“허. 설마 이 사람이 주상을 흔들어댔다는 거요?”
“대동법은 대감의 정책이오.”
“이 사람은 아니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기가 막혔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시비를 걸어대다니.
...이성계답지 않다. 대체 무슨 짓일까?
-적정선을 유지하면서 말하는군. 더 도발해야 할까?
이것 봐라?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놓고 싸움을 걸겠다?
계산 끝났다.
“예.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무척이나 중요하지요.”
왕선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기가 막힌 처세를 보였던 전주 이씨의 처세를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궁금하오.”
침 뱉으면 가래침 뱉어주고.
삿대질하면 손가락을 꺾어주면 된다.
왕선은 조롱하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전주 이씨의 종착점이 부디 이 땅이었으면 좋겠소.”
이성계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부디. 간곡히. 열렬히?”
“···지금 뭐하자는 거요?”
싸늘한 어조.
“설마 옆에 있는 애송이와 구석에 숨어서 활을 겨누고 있는 자를 믿고 설쳐대는 거요?”
오. 이옥이 근처에 있는 것도 알았어?
이건 거의 무협지 수준인데?
왕선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설마 상승불패의 명장이신 이성계 장군과 백주에 싸움박질하려고 하겠소?”
“······.”
“이 사람.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두 번은 없을 것이외다.”
“너무 감사해서 감개가 무량하오.”
“허.”
“그리고 아까 한 말을 조금 수정하겠소.”
“······.”
“종착점 말이외다. 이 땅이 아니라 이 나라 고려가 되었으면 좋겠소.”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린 왕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하륜이 눈을 껌뻑이며 나타났다.
“어찌 되었습니까?”
“흥분해서 날뛰더군.”
“되었습니다. 격장지계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한데, 이 정도로 대동군이 생각대로 움직이겠나?”
“심려치 마십시오. 정도를 피하는 삼봉 사형을 믿으시면 됩니다.”
“하하하. 그 정도전이라는 인사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군.”
이성계는 시원하게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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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성계 장군이 그랬다고요?”
“그렇소. 왜 그랬다고 보시오?”
“하륜이 시켰겠지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소?”
“아는데 물어보는 거 같아서 빈정 상했지요. 마치 소생을 시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정말 눈치는 백 단이다.
그런데 왜 술 먹다가 칼 맞고 죽었을까?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물음.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괜한 호기심은 미친놈 소리를 듣게 하는 법이니까.
“어쨌거나 이성계 장군이 그리 나왔다는 건 아주 간단하게 보시면 됩니다. 조만간 재상들이 총공세를 감행할 거라는 거지요.”
“천인공노할 작자들이군. 강안전을 상대로.”
“지금 그거 농이지요?”
“재미없소?”
“예.”
“사과하리다.”
“예.”
정도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륜이 판을 잘 만들었군요.”
“현 대동법 정국을 끝내고자 나를 끝낸다?”
“지금 주공께서 주상의 호위무사가 아닙니까. 주공만 무너뜨리면 강안전은 곧장 어명을 철회할 겁니다. 뭐. 사실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시작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철없는 정치 놀이에 불과했으니까요.”
“거. 말이 과하오?”
“맞는 말을 한 겁니다.”
“잘났소.”
“그나저나 하륜. 역시 판을 지저분하게 잘 만드는군요.”
“지저분하기로는 군사도 못지않소.”
“지금 계속 말꼬리 잡으면서 말장난 할 때입니까?”
“···험험. 미안하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십시오.”
이거 크게 혼나게 생겼다.
왕선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륜의 다음 수는?”
“어명을 철회한 다음 대동법을 박살 내려고 하겠지요.”
“내 정치적 생명을 아주 완벽히 끊어버리려고 덤비겠군.”
“그 인사가 지저분할 정도로 집요합니다.”
“그건 군사가 더...”
“예?”
쌍심지를 뜨고 노려보는 정도전.
왕선은 다시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 아니라오.”
“사태가 심각합니다. 주공.”
“그래서 내게 생각이 있소.”
“···들어나 보지요.”
“군사. 만부부당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예.”
“그러면 그런 장수는 정말 일만 명과 싸울 수 있겠소?”
“불가능하지요. 일만 명의 병력과 같은 힘을 낸다는 말이 칼 춤춰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말이 그 말이외다. 작금의 대동법 정국은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불가능하오.”
“그렇지요.”
“그러면 이를 엎어야지요.”
“엎는다고요?”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지요.”
말을 덧붙였다.
“반드시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유리한 지형에 적이 들어오게 하면?”
정도전의 눈빛이 차분해지더니 턱을 긁적였다.
“이거 정말 놀랍군요. 정치에도 매복이 있다니.”
“군사는 많이 배워야 하오.”
“이번만큼은 정말 제대로 배웁니다.”
“오. 그 자세. 아주 바람직하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칼춤 한번 추기로 했다.
아주 거하게.
지금까지 없던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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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대동법 정국에 일대 전환점이 생겼다.
“하여, 주상께 청하여 어명을 철회해야 합니다.”
왕선이 대동법 전국적 집행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상황이 이리되자 재상들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결국, 왕우는 어명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사실 이건 애초 군왕이 가지지 않은 힘으로 해보려던 것이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륜은 통통 걸어서 이성계의 사가로 달려갔다.
“장군.”
“어서 오시게.”
“일이 아주 잘 풀렸습니다. 설마 대동군이 직접 어명 철회를 청할 줄은 몰랐습니다.”
애초 격장지계로 왕선이 최영을 통해서 사태의 수습을 청하게 하는 정도가 목표였으니 지금은 아주 일이 잘 풀린 게 확실했다.
“아주 훌륭한 계책이었네.”
“이제 시작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강한 수를 준비하는 게 좋습니다.”
“도당을 어지럽힌 죄를 물어 대동군을 탄핵하려던 게 원래 계획이었네. 한데, 다른 수가 있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소생을 믿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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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문을 열었다.
어찌나 세게 뛰었는지 알 수 있었다. 참으로 힘들어 보였다.
물론, 왕선은 그의 안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소?”
“생각대로입니다.”
“딱 좋군. 아주 적절해.”
“내일이 기대됩니다. 진심으로.”
“이 사람도 마찬가지라오.”
다음날
개경 본궐 앞은 긴장감이 고조됐다.
곳곳에 도당의 재상들이 삼삼오오 모여있긴 했으나 그들의 이 결기의 원인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
“전하!”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가 피를 토하듯 격렬하게 외치고 있다.
“전주를 비롯한 일부 군현에 시행된 망국적인 대동법을 철회시켜야 하옵니다!”
그러자
“철회시켜야 하옵니다!”
수십 명의 사대부가 따라 외쳤다.
그랬다. 바로 연좌였다. 실로 오랜만에 본궐 앞에서 연좌가 발생한 것이다.
정도전은 멀찍이서 그들의 행동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 공존했다.
“사형.”
“······.”
“이거 어찌합니까? 이 나라 고려의 유종이라고 불리는 사부님께서 나셨습니다.”
그랬다. 연좌를 이끄는 사람은 바로 목은 이색이었다.
정도전은 굳은 표정으로 하륜을 바라봤다.
“허. 왜 그러십니까? 설마 사부님께서 나서실 줄은 모르셨던 겁니까?”
“······.”
“아니면 사부님을 끌어들인 일로 저를 책망하시는 겁니까?”
하륜은 방긋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 나라 고려에서 사대부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이지요. 사부님과 포은 사형. 하지만 포은 사형을 움직이기는 힘들고. 차선으로 사부님이 나설 수 있는 판을 만들었습니다.”
“······.”
“하하. 이거 전혀 예측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바뀐 세상이 아닙니까? 대동법 전국적 집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어명을 내리고 철회하는 과정에서 우군을 잃고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주상께서는 연좌를 뿌리칠 수 없지요. 아쉽습니다. 이로써 대동군 대감은 제대로 포효하기도 전에 잠들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사형과 저의 승부도 싱겁게 끝나게 되었지요.”
“잘했네.”
“하하...예?”
“사부님은 많은 토지를 보유하신 대지주이시네. 대동법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네.”
“···사형?”
“그러나 제자 된 도리로서 그건 틀렸다는 걸 말씀드려야지. 또, 사형된 도리로서 자네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고자 하네.”
하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준비될 수가 있나 봅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네.”
“허.”
그때였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불교의 주문을 외우는 엄청난 수의 승려가 나타났다.
목이 터지라고 외치던 이색과 사대부들의 기세는 찬물이 덮어 쓰인 듯 잠잠해졌다.
이색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서려고 할 때 승려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이 나라 고려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불국정토가 되길 바라는 법회이자.”
낭랑한 목소리.
“이 나라 고려 백성의 내일을 이끌어갈 최후의 보루. 대동법의 존속을 강하게 청하는 연좌이외다.”
왕선이었다.
그의 뒤로 일천 명의 승려의 입에서 주문이 끝없이 새어 나왔다.
“옴마니 반메홈.”
“대동법은 불국정토의 길.”
“옴마니 반메홈.”
“대동법은 불국정토의 길.”
일천 승려의 주문은 장내의 모든 걸 잡아 삼켰다.
그리고 정도전이 하륜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리면서 말했다.
“가르침을 내리겠네.”
하륜의 눈가가 떨렸다.
정도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강경에는 초강경. 연좌에는 사상최강의 연좌로 맞서는 법이지.”
< 81화 사상최강의 연좌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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