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갈대같은 남자 >
이성계의 사가를 나온 하륜은 물끄러미 밤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그대로인데 주인은 바뀌었도다.”
이인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정치적 안목으로 500년 거목을 손바닥에 올린 정객이 아닌가.
최영의 공세로 위기에 봉착하긴 했으나 평양부 천도를 단행했다면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죽었다. 말 그대로 충격적인 수군의 공세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왕선의 병력이 개경을 집어삼키는 걸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지켜만 봐야 했다.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그리고 이인임은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었다.
고민했다.
이제 어찌해야 할 건지.
우선 지금까지 온갖 비바람을 막아줬던 이인임이 없어졌으니 다른 자리를 찾아야 했다.
다시 고민했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당장 안위를 위한다면 최영이 옳다.
...그러나 비명에 간 이인임을 생각하면 최영은 아니다.
해서 선택했다.
왕선을 제압할 힘과 잠재력이 있는 사람.
개경의 입지가 부족한 사람.
정치적 책사가 필요한 사람.
딱 한 명이었다.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
그라면 안위도 챙기고 이인임의 복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이성계를 찾아갔고 지재를 내밀었다.
그렇게 그의 책사가 됐다.
하륜은 쓰게 웃었다.
원래 이렇게 어지럽게 살고 싶은 건 아니었거늘.
“인생 참 복잡하게 꼬이는구나.”
“그러니까 편안하게 살게. 뭐하러 이 번잡한 정치판에 끼어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륜은 누군지 대번에 짐작했다.
“오랜만이군요.”
고개를 돌렸다.
“삼봉 사형.”
“오랜만일세.”
“사형제가 우연히 만났으니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우연히 만났을까?”
“하하하.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걸치지요.”
“그럴 시간은 없고.”
“다행이군요. 실은 저도 그럴 시간이 없거든요.”
“한창 바쁘겠지.”
“예. 대동군 대감을 넘어뜨려야 하니까요.”
하륜은 빙긋 웃고 있었으나 노골적인 적의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정도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능할까?”
“대동군 대감과 이 장군을 비교하면 누가 뛰어날까요?”
“하하하. 지금 개경에서 칼 들고 활이라고 쏠 건가? 이곳은 칼부림으로 싸우는 곳이 아니야.”
“음. 그러니까 전장이 아니라면 대동군 대감이 뛰어나다?”
“그건 상관없어.”
“오. 그렇습니까?”
“내가 자네보다 뛰어나니까.”
“이런. 저는 사형이 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일세.”
“차라리 포은 사형이 그런 말을 했으면 수긍이라도 했을 겁니다.”
“음. 포은은 빼지.”
“음. 그게 좋겠지요?”
“아마도?”
“좋습니다. 그러지요. 사형. 이 사제가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자네 처 백부 어른을 만나게 해주지.”
“하하하. 저는 사형의 노년을 걱정하건만, 사형은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죽기 싫으면 이 판에서 빠져.”
“이길 자신이 충만했으면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경고까지 하지도 않겠지요.”
정도전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애써 참는 모양새다.
“잘해보자고.”
하륜도 시원하게 웃었다.
“예. 최대한 지저분하게 가보지요.”
“좋지. 정도? 이런 건 우리하고 안 맞으니까.”
“예. 그런 건 포은 사형이 하면 됩니다.”
마주한 두 책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
“전하. 신 대동군 왕선이옵니다.”
“어서 오세요.”
왕우는 빙그레 웃으면서 왕선을 맞이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사옵니다.”
“하하. 실은 과인이 대동군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요.”
“전하. 받자옵기 민망하옵니다. 어찌 가르침이라고 하시옵니까.”
“이 나라 고려의 옥토를 거머쥔 군웅이 아닙니까.”
“이 나라의 모든 땅은 주상 전하의 것이옵니다.”
“그래요? 그러면 과인이 달라고 해도 됩니까?”
왕선은 고민하지 않고 곧장 답했다.
“어명을 내리시어 수령을 보내시옵소서.”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아니지. 사람을 함부로 믿을 수는 없지.
-그래도 왕족인데?
-왕족이니까 더 위험하지.
-그런데 전주에 수령을 보내라고 하는데? 그러면 거점이 흔들리는데도 흔쾌히 수락했어. 이걸 보면 이 사람에게는 사심이 없는 것이다.
-한심하군. 거점이니까 보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왕이 보낸 수령 따위는 군현에서 씹어 먹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래도 이를 수용했다는 건 왕의 치국에 협조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갈대야?
내색할 수는 없었으나 왕선은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그 정도로 왕우의 속내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생각 속에서 상당히 냉철한 현실 인식도 갖추고 있다는 건 상당히 놀라웠다.
그랬다. 이 시국에 전주 목사가 새롭게 임명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전주의 모든 집단은 완벽하게 왕선의 손에 올라가 있으니까. 그런데도 새로운 관리가 임명된다는 건 남다른 의미가 있기는 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건 백 가지 생각을 하더라도 입을 거치고 행동으로 집행되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합당한 생각을 했더라도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면 그건 망상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리고
“하하하. 아닙니다. 농이었는데 대동군이 이리 반응하니 영 재미가 없군요.”
왕우의 판단은 제법 괜찮은 것이었다.
만일, 왕우가 전주 목사를 새롭게 임명하게 된다면?
왕선의 불행을 즐거워할 군웅들이 아주 많겠지만, 그들을 포함한 더 많은 군웅이 왕의 친정에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해서, 왕우의 고찰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신이 아둔하여 어심을 어지럽혔사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실은 과인이 어려서부터 권신에게 휘둘렸던지라 배우고 할 줄 아는 건 이런 농지거리밖에 없습니다. 학문 같은 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해서요.”
이건 대체 무슨 자학일까?
왕우는 천진무구하게 웃으면서 계속 자학했다.
-이러면 나를 더 만만하게 볼까?
-아니지. 연민을 가지고 더 충성할 가능성이 크지.
-그렇지만 왕의 권위가 너무 추락하는데.
-언제부터 왕의 권위가 있었다고. 오히려 탄탄한 왕족의 손을 잡고 용상이 굳건해질 때까지 방패로 사용하는 게 좋지.
-방패라.
-이왕이면 더 튼튼한 방패가 좋지.
-방패라.
-그래. 방패.
자학하는 동안에도 왕우의 자아는 계속 분열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왕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게 이렇게 곤혹스러운 건 처음이었다.
“과인은 대동군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큽니다.”
“신 대동군 왕선. 어심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정말일까?
-일단 믿어보는 게 좋겠지?
왕우의 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왜 계속 방패를 되새겼을까?
하지만 왕우 자신도 방패를 되새길뿐 구체적인 생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지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
최영이 빙그레 웃으면서 재상들을 쳐다봤다.
“주상께서 어명을 내리셨소.”
...어명이라.
재상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살짝 감돌았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왕의 어명에 담긴 내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게 옳았으나 권신을 끌어낸 직후였기에 수렴청정과 같은 말은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금상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정무에 임했다.
백 보 양보하여 군왕이 의욕적으로 정사를 돌보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금상은 정치적 경륜이 없다시피 한 존재라는 거다. 능력과 경험이 없는 이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는 중이라고 할까? 즉,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어명이 나오고 있었다.
이를테면 버젓이 사병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사병을 도성이 들이지 못하게 한 문제부터 그렇다. 차라리 사병 혁파라면 호불호를 떠나서 말이라도 되는 정책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왕에게 제대로 간언을 해야 할 최영이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최영은 어명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니까 군왕이 내린 교지를 들고 도당에 그냥 온 것이다.
최영은 목을 가다듬더니 교지를 펼쳤다.
“!!!”
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고, 손은 경직됐다.
동시에 재상들의 눈이 교지로 향했고
“!!!”
왕선의 시선은 재상들의 눈으로 향했다.
-대, 대동법 전국적 집행?!
그와 함께 왕우가 계속 되새기던 말이 떠올랐다.
[방패]
왕선의 표정도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왕선의 대표적인 정책을 선두에 꺼내서 다른 귀족의 반응을 보려는 것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라 왕선으로 하여금 칼을 들고 귀족들과 피 터지게 싸우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본인은 용상에 편안하게 앉아서 신하들의 아귀다툼을 지켜볼 것이고.
머릿속으로 백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정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재상들의 험악한 시선이 집중된 탓이다. 심지어 최영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대동군 대감. 어제 강안전을 들리셨다고 들었소만.”
“허. 강안전을 들리셨소?”
“참으로 대단하오?”
노골적인 적의가 쏟아졌다.
왕선은 잠시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차피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들을 진정시킬 수 없다.
하면, 군왕의 방패 역할을 자처한다. 아니구나. 이건 방패가 아니라 창이구나.
공고하게 뭉치는 상대에게 선제공격을 취한다.
“해서, 어명을 거역할 겁니까?”
모름지기 이런 상황에서는 불특정 다수에게 던지는 말보다 특정 인물에게 하는 게 백배는 더 효과적이다. 해서, 정확하게 대상을 지목했다.
“수시중 대감?”
최영의 눈이 흔들렸다.
하여, 한 번 더 말해줬다.
“어명을 거역할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정확하게.
“최영 장군.”
아직은 ‘수시중 대감’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배려해준다.
최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
도당의 습도가 거세게 올라갔다.
-----
“어처구니가 없군요.”
거침없이 씰룩이는 그의 볼 상태를 보면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상대가 군왕만 아니었다면 육두문자를 날렸을 게 분명했다.
왕선은 정도전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왕우의 속내를 떠나서 이렇게 대동법으로 도당을 들쑤시는 건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고려 조정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왕권과 왕실에도 큰 해악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번 어명은 최악의 정치적 수였다.
“그래도 도당에서 잘 대응하셨습니다.”
“허. 지금 나 칭찬하는 거요?”
“예.”
“건방지게? 상하가 분명하거늘?”
“이제 대응책을 마련해야지요.”
정도전은 잽싸게 말을 돌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 개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지만 언제라도 일이 터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다니지 마십시오.”
“특정 세력이 무력을 동원할 수 있다?”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딱 깨 놓고 개경 안에 사병 진입 안 시킨 군웅은 없습니다. 다들 대충 눈 감고 아웅 거리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도 사병을 잘 챙겨야겠구려.”
“물론입니다. 그건 나세 장군에게 잘 일러뒀습니다.”
“경계할 건 또 없소?”
“하륜이 어떤 모략질을 할지 기대됩니다.”
...그걸 왜 또 기대하고 앉아 있을까?
그러나 정도전의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뭐라고 하기도 어렵다.
< 80화 갈대같은 남자 > 끝
ⓒ 날아오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