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79화 (79/187)

< 79화 대동군 >

각지의 군웅들이 어물쩍 개경으로 입성했다.

권신 이인임이 죽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니 서둘러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소란도 있었다.

“허. 지금 내 앞으로 막은 것이냐?! 감히? 이 조민수의 앞을? 네놈들이 진정 미쳤구나!”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하는 조민수.

병사들은 우물쭈물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썩 비켜라!”

“자, 장군. 사병은 들이지 말라는 어명이 있었습니다.”

“누가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어명을 내렸다는 말이냐?”

...어명을 누가 내렸을까?

병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건 한편으로는 그동안 고려왕의 어명이라는 건 왕의 의지가 아니라 신하의 뜻에 옥새만 찍힌 거라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감히 어명을 조롱한 것인가?”

묵직한 목소리.

조민수가 고개를 돌려서 쏘아봤으나

“자, 장군.”

최영이었다.

“어명은 오직 강안전의 의지. 이 지극한 사실을 모르는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면, 당장 사병을 돌려보내게.”

뒤늦게 개경으로 입성한지라 초기에 기세를 세울 생각에 더 과한 행동을 한 조민수였다. 그러나 최영의 개입으로 체면만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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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태후는 부드럽게 웃었다.

“왕 목사.”

왕선은 공손한 자세를 취하면서 답했다.

“예. 마마.”

“그대의 공이 아주 컸네.”

“일찍이 준비했던 거사가 실패하여 마마께서 큰 곤혹을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이 부족함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작은 공입니다.”

“아닐세. 끝없이 왕실을 오롯이 보좌하고자 한 자네의 노력을 이 사람이 어찌 모르겠는가?”

명덕태후의 덕담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이인임에게 당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서슬 퍼런 기세를 보이던 이인임을 기어이 잡아낸 왕선이 아닌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아봤네. 신종 대왕의 차자 덕양후의 6대손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군호도 없다고?”

“정통 왕족에서 멀어진 몰락한 왕족입니다. 어찌 과분하게 군호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해서, 이 사람은 자네가 마음에 드네.”

“어인 말씀입니까?”

“전주와 익주 그리고 김제와 부안. 이 나라의 옥토를 장악한 군웅이 아닌가.”

“천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천운이든 실력이든. 이건 분명한 사실이지. 그리고 보통 그 정도 세력을 가지면 군호를 만들어 사용하는 게 이 땅의 역사였고.”

“군호는 왕실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어찌 망령되게 사사로이 칭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네의 그런 태도가 이 사람을 더 흡족하게 한다는 것일세.”

“마마.”

명덕태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군호를 내리겠네.”

드디어. 드디어 군호가 내려졌다.

이럴 때 세 번은 거절하는 게 도리.

그러나 왕선은 번거로운 예법을 생략하기로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니까.

“이 나라 고려 왕실을 위해서 모든 걸 하겠습니다.”

“주상을 잘 보좌해주시게.”

“예.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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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수시중이 된 최영은 도당회의를 소집했다.

각지로 흩어졌던 군웅과 시절을 한탄하던 사대부까지 모두 모였다.

그러니까 이성계, 조민수, 정지, 박위 등 당대 최고의 무장과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 고려를 대표하는 석학이 총망라된 도당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도당회의가 개최된 것이다.

고려에 도당이라는 체계가 있는 건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 모이라고 한 건 일전에 주상께서 내리신 어명을 다시 언급하기 위함이오.”

최영의 중후한 목소리가 도당을 울렸다.

“주상께서 사병의 출입을 금한다고 하셨거늘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소.”

조민수는 사레 걸린 기침 소리를 냈다.

“또한, 사병을 노비나 마름으로 위장시켜서 기어이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소.”

곳곳에서 사레 걸린 기침 소리가 났다.

“주상께서 내리신 어명이외다. 이 사람 최영의 이름을 걸고 경고하겠소. 허튼수작 부리지 마시오. 만일 발각될 시 이 최영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수시중 대감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도당의 문이 열리면서 울린 낭랑한 목소리.

왕선이었다.

“자네가 여긴 왜 왔나?”

빈정거리는 어조.

최영의 책망으로 궁색한 표정을 짓던 조민수다.

“도당회의가 열렸다길래 참여하러 왔습니다만.”

“허. 도당은 이 나라 고려의 재상이 모이는 곳. 자네가 올 자리가 아닐세. 일전에 재상의 권한을 얻었으나 그건 이인임의 세 치 혀로 이뤄진 일. 지금은 아니지.”

“거.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허. 뭐라? 작은 공을 세웠다고 하여 참으로 안하무인이군.”

조민수는 훈계하듯 말했다.

“내가 들어보니 자네가 저지른 과오도 만만치 않네. 그런데도 처벌받지 않은 건 작은 공을 세웠기에 그렇더군. 하면, 이럴 때일수록 자중하고 몸을 낮춰야지 어찌 이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는가?”

“됐고.”

“뭐라?”

“이보시오. 조 장군.”

“뭐, 뭐라?!”

“언제부터 일개 신하가 왕족에게 그렇게 말하오?”

“하. 왕족? 왕족?! 누가? 하. 몰락한 왕족이 언제부터 왕족...”

조민수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더니 결국 끝을 내지 못했다.

왕선이 내민 한 장의 서찰 때문이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다.

[대동군]

재상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선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대동군. 오늘부터 이 사람의 군호이외다.”

“그, 그런···.”

“군호를 받았다는 건 이 사람이 정통 왕족으로 인정되었다는 걸 의미하오.”

“말도 안되는...”

“하. 일개 신하가 왕실의 일에 시비를 거는 거요? 심지어 왕실 최고 어른이신 태후 마마께서 재가하신 일에?”

“그, 그게 아니라···.”

대동군.

왕선의 군호를 이렇게 정한 대목에서 명덕태후의 정치적 안목이 절대 하수가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민심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 대동법을 정면으로 내걸고 왕선을 왕권 강화와 왕실의 권위를 올리는 첨병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선이 군호를 받았다는 건 일전에 이성계가 걸었던 작은 흠결을 완전히 상쇄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이성계의 입에서 나왔던 내용은 일등공신인 왕선의 성장을 경계하고 불편해하던 재상들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기에 은연중에 광범위하게 공감을 얻고 있었다. 조민수가 괜히 그걸로 왕선에게 시비를 건 것이 아니다.

조민수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흘렀다.

만만하다고 생각해서 괜한 시비를 걸었는데 완전 거물이 아닌가?

도당에 참여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이 높은 정통 왕족은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심지어 왕실의 권위를 되찾는 일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일을 오롯이 인정받은 상태가 아닌가? 조민수는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작금의 조정은 이인임이 지배하던 수시중의 조정이 아니었다.

그랬다. 왕실이 숨을 쉬기 시작한 조정이었다.

“그러면 앉아도 되겠소? 조 장군?”

“무, 물론이외다.”

“거참. 주상전하와 태후 마마께서 윤허하신 일을 조 장군에게 다시 허락을 받다니. 이거 이 나라의 실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조민수는 순식간에 자라목이 됐다.

왕선은 조롱을 이어갔다.

“아. 주상 전하께서 조 장군의 공을 잊지 않으시겠다고 했소.”

“···무슨 말이오?”

“반 이인임 연합군의 와해에 조 장군이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 않았소이까.”

기어이 결정타를 날렸고 조민수의 안색은 사색이 됐다.

왕선은 가볍게 조민수를 짓밟으며 도당의 첫 출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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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군 대감.”

도당회의 직후 들린 목소리.

왕선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포은 선생.”

“일전에는 결례를 범했소.”

“담아두지 않고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참으로 감사하오.”

“별말씀을.”

왕선은 고개를 슬쩍 돌리면서 어물쩍 말을 이었다.

“거. 그래도 미안하면 술 한잔 사시오.”

“응당 그리할 생각이었소.”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개경 근처 박연 폭포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절경이지 않소이까.”

“좋군요. 이곳에서 포은 선생이 이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나 보오.”

정몽주는 쓰게 웃었다.

“다 책상물림이었소. 이번에 다시 느꼈소. 입으로 떠드는 정의는 너무나도 무기력하다는 걸 말이외다. 입으로 백성들에게 전하는 희망은 고문이라는 것도 말이외다. 대동군 대감이 개경을 도모하여 이인임을 척결할 때 내가 한 것은 감옥에서 숨 쉬는 것이었소. 이인임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나라의 운명이 끝나지 않았음에 감사했으나 무기력한 이 사람의 현실이 한탄스럽더이다.”

왕선은 자조적으로 웃는 그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맞소. 난세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건 세 치 혀라오. 가장 위력적인 건 창과 칼이고. 그러나 천년 고려를 만들어갈 수 있는 건 창과 칼이 아니오. 바로 당신처럼 나라의 내일을 그릴 수 있는 솜씨 좋은 화공이오.”

“나라의 내일이라.”

“포은 선생. 당신의 진정한 힘이 쓰일 수 있는 나라를 만들 것이외다.”

왕선은 뜨거운 눈으로 정몽주를 바라봤다.

“대감의 당여가 되라는 것이오?”

“부정하지 않겠소.”

“그건 거절하겠소.”

“어째서?”

“이 사람의 몸이 이 사람의 것은 아니라오. 포은 정몽주가 대동군 대감의 당여가 된다는 건 이 나라의 사대부가 그리되는 것이오.”

정몽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여, 포은 정몽주는 누군가의 당여가 될 수가 없소. 이게 나의 운명이외다.”

오롯이 정도만을 가겠다는 의지의 피력이었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모든 세력의 부정과 부패를 질타하겠다는 고결함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름다운 세상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왕선은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절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서 마련됐다고 하오만.”

“참으로 훌륭한 말이오. 해서, 이 사람은 감내할 생각이외다.”

여기까지.

왕선은 더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많다.

“아.”

“오. 생각이 바뀌었소?”

“그게 아니라 김성우를 격멸했다고 들었소만.”

“음. 그렇게 되었소.”

“그의 군사가 범세동이었는데.”

“아. 이 사람이 큰 가르침을 내렸다오.”

정몽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그를 지그시 보던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별건 아니외다. 융통성이 없길래 세상 사는 이치를 좀 일러주고 있다오. 좋은 시종을 하나 붙여줬소.”

“하긴. 범세동은 그런 부분이 좀 있지요.”

“이렇게 말이 통하다니 누구와는 참으로 비교되오.”

“하하하. 삼봉을 이르시오?”

“어찌 그렇게 내 속을 잘 아시오?”

“하하하. 사람들이 삼봉을 평가절하하지만 이 사람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일국을 경영할 능력이 있는 인재입니다.”

“그건 잘 모르겠소만 일국을 창업해낼 능력은 있는 거 같더이다.”

“하하하. 그게 더 대단한 거지요.”

“모처럼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데 이상한 사람 이야기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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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정도전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내 욕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러워?”

툴툴댔다.

“그래. 전주는 어떤가?”

“전 선생께서 잘 다독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지금은 개경에서 옹기종기 모였지만 여전히 군웅할거는 진행 중일세. 언제라도 이 평화는 파국을 맞을 것이네. 잘 대비해야 해.”

“빠르다면 언제라고 보십니까?”

“최영 장군이 급사할 때.”

“느리다면요?”

“최영 장군이 만수무강할 때.”

“허. 이 나라의 운명이 최영 장군의 수명에 달렸군요.”

“그동안 우리가 어찌하는가에 따라서 이후가 달라지겠지.”

“과연 그렇습니다.”

남은이 고개를 끄덕일 때 정도전은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이성계의 책사를 알아냈나?”

“예. 밀교원을 총동원했습니다. 정말 의외의 인물이 나왔습니다.”

남은의 목소리에는 황당함과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정도전은 진중한 눈빛을 보이면서 물었다.

“누구던가? 그런 모략질을 일삼은 인사가.”

“하륜이었습니다.”

정도전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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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이 군호를 받으면서 그를 끌어내려는 계책은 무위로 돌아갔네.”

“어차피 적아를 규정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왕선을 불편해하는 인사를 분명하게 확인했으니까요. 그들은 장군의 든든한 우군이 될 겁니다.”

다소 느린 말투.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왕선을 찍어 내야 합니다.”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대동법으로 흥한 인사는 대동법으로 끝내는 게 옳습니다.”

“좋아. 자네를 내 책사로 쓰지.”

하륜은 빙그레 웃었다.

“소생 하륜. 견마지로를 다할 것입니다.”

< 79화 대동군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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