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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78화 (78/187)

< 78화 개경의 동상이몽 >

저돌적인 진군이었다. 그러나 작은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일사불란한 군마의 이동이 아닐 수 없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장엄했다.

선두에 선 이지란이 명령을 내렸다.

“개경에 가별초가 왔음을 알려라. 그리하여 적들의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천에서 대라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전군의 움직임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저돌적인 돌격이 순식간에 중단된 것이다.

가별초의 대라 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개경이 지척이었는데도 돌격은커녕 주둔 준비에 돌입했다.

“지란이.”

“예. 형님.”

“개경과 최영 장군의 동향을 파악하게.”

“알겠습니다.”

주둔 준비가 한창일 때 저 멀리서 수십 기의 군마가 다가왔다.

대라 소리를 울려서 이성계의 가별초가 왔음을 알리자 득달같이 달려오는 군마.

군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치밀었다. 그러나 누구도 동요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랬다. 지금 보이는 긴장감의 성질은 승리를 만끽하기 직전에 가지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지란이 전군에 경계 태세를 이르자 가별초는 곧장 정비했다. 실로 순식간이었다.

이성계 역시 활을 고쳐잡고 선두에 섰다.

단번에 적장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가늘어진 눈으로 쏘아보던 이지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 적은 아닌 거 같습니다.”

“사신?”

“예.”

“···최영 장군이 벌써 개경을 도모하신 건가?”

“그럴 리가요. 이인임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러는 동안 점차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런데

“오랜만이외다. 이 장군.”

선두에서 언월도를 든 무장의 입에서 나온 말.

이성계의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나세 장군?”

“이제야 알아보시오?”

“장군이 어찌 이곳에 있소?”

나세는 빙그레 웃으면서 답했다.

“이미 개경은 전주 목사께서 탈환하셨소.”

나세의 목소리가 이성계의 귀를 지나서 뇌로 들어갔다.

전주 목사? 왕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최영 장군도 아니고 왕선이라니.

...아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개경 점령의 일등 공신이 최영이 아니라 이제 약관을 넘은 전주 목사 왕선이라는 게 중요하다. 심지어 왕선은 왕족이다.

...이리되면 상황은 아주 복잡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움직이는 게 옳았다.

그 순간 이성계의 입이 움직였다.

“허. 대단하오.”

감탄성을 내지르며 호탕하게 웃었다.

“참으로 대단하오.”

“수군을 동원하셨소.”

수군?!

이성계는 둔기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기상천외한 군략을 수립했다는 말인가?

이성계의 머릿속은 바쁘게 생각을 이어갔고

“어쨌거나 이거 한발 늦었군요.”

입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나세는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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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임견미가 지키던 임진강 전선을 저돌적으로 돌파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곧장 총진군을 명하여 개경의 지척에 당도했을 때 활짝 열린 성문에서 왕선이 웃으며 나올 때 황당했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영 장군.”

“아. 이 장군. 자네도 왔는가?”

“예. 한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네. 왕 목사가 예성강을 통해서 개경을 점령했다는 정도.”

“이인임은 어찌 되었습니까?”

“죽었네.”

“죽다니요? 응당 국문을 열어서 죄를 추궁해야 할 죄인입니다. 한데, 그냥 죽였다는 말입니까?”

이성계의 목소리에는 불편함이 잔뜩 실렸다.

“다른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도전은 한편에 서서 그런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최영은 딱 무장이었다.

작금의 개경은 사실상 무주공산이다.

거대한 권력을 가졌던 이인임이 죽었다. 그로 인해서 권좌는 사실상 공백이었다. 만일 최영이 개경을 점령하였다면 자연스레 권좌의 주인은 최영이 되었겠지만, 공을 세운 사람은 왕선이었다. 심지어 최영과 논의하고 연계한 작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왕선이 당연히 권좌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큰 공을 세우긴 했으나 이름의 무게가 모든 이를 자연스럽게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랬다.

만일, 이럴 때 최영이 능수능란한 수완을 발휘할 수 있다면 정국의 주도권은 그에게 확 쏠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반면 이성계는 아니었다.

개경을 도모하고 이인임을 죽인 최고 공신인 왕선의 흠결을 찾아내서 자연스럽게 공론화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죄가 되어 추궁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겠으나 왕선에게 쏠리는 무게의 추를 가져올 수는 있다.

“최영 장군께서 임진강 전선을 잘 구축하지 않았다면 어찌 왕 목사가 개경을 도모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연스레 왕선의 공을 깎아내린다.

그 방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의 무게를 가진 최영을 거론하여 그 공을 치켜세우는 거였다.

“응당 장군의 입성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절대 자신의 이름을 내밀지 않는다.

최영의 이름만 꺼냈다.

정도전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성계가 이 정도로 모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나?

백 승의 장수와 노련한 정객은 늘 평행선을 그린다.

전장의 칼부림과 정계의 붓놀림은 사용법이 다르다.

전장의 명령과 정계의 세 치 혀는 의미가 달랐다.

이성계는 백 승의 무장이었으나, 정략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정도전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둘 중 하나다.

한 가지는 이성계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완전히 틀렸다.

나머지는?

...모략질에 능한 책사가 이성계의 곁에 있는 거다.

그런데 대체 누구일까?

조준이 이성계의 제일 군사인 건 알고 있다.

한데, 조준은 전녹생처럼 전형적인 내정가가 아닌가.

지금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최대한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그때

“다들 모이셨습니까?”

낭랑한 목소리.

빙그레 웃으면서 도당에 들어오는 왕선이었다.

최영을 비롯한 장수들의 시선은 집중됐다. 이성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랜만일세. 왕 목사.”

“이 장군이 오셨다는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도당에 왔으면 응당 최영 장군께 예를 취하는 게 옳네.”

또다시 은근하게 최영의 뒤에서 왕선을 건드렸다.

정도전의 눈썹이 꿈틀였다.

반면, 왕선은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했다.

“혼자 왔으면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누구와 함께 오더라도 응당 최영 장군이라면···.”

그때

“모두 모였습니까?”

참으로 가냘픈 목소리가 도당을 울렸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한 사람이 옅게 웃으면서 도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왕선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태조 대왕의 후손.

고귀한 사해 용왕의 핏줄.

이 나라 고려 왕족의 적통.

이 나라의 정점에 있는 존재.

이 나라 고려의 지존.

대 고려의 국왕 왕우였다.

왕선을 힐난하던 이성계의 말문이 막혔고,

누가 말을 하기도 전에

“천세 천세 천천세.”

왕선이 천세를 연호했다.

그 즉시 최영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세 천세 천천세.”

이성계와 나머지 장수들도 다급하게 일어났다.

“천세 천세 천천세.”

한때 이인임의 손위에서 조롱당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 존재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었다.

심지어 작금의 정국은 권신이 조정을 농단하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충의지사들이 권신을 몰아낸 그야말로 국왕을 위한 조정이 아닌가?

왕우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되었습니다. 그만 하세요.”

“전하. 도당까지는 어찌 납시었습니까?”

최영이었다.

왕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과인을 위하는 진정한 충의지사들이 모였으니 응당 와야지요.”

“이 나라 모든 신하는 전하의 신하이자 충의지사이옵니다.”

“어제까지는 아니었지요.”

“···전하.”

“하지만 오늘부터는 장군의 말처럼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하여 온 겁니다. 혹시 과인이 괜한 발걸음을 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오늘 과인은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보위에 오르고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은 없어요.”

“그간의 불충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최영의 절절한 목소리.

왕우는 그를 슬쩍 흘겨보면서 말했다.

“과인이 보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경들의 앞에서 어명을 내리고자 합니다.”

“어명을 내리소서.”

“첫 번째. 개경의 사방을 에워싼 경들의 사병을 모두 물리세요.”

당연한 일이었다.

“응당 그리할 것이옵니다.”

“두 번째. 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단 한 명의 사병이라도 개경에 들이면 대역죄로 다스릴 겁니다.”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시절 귀족이라면 소수라도 사병을 사가에 배치했다. 그런데 왕우가 이를 원천 봉쇄한 것이다.

“왜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은 따를 수밖에 없다.

권신의 척결과 함께 군왕의 권위가 살아나는 날이 아닌가?

...그리고 무위가 뛰어난 병사는 따로 마름처럼 부리면 되긴 하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어,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이 모든 걸 최영 장군이 해결할 수 있겠지요?”

“신이 말이옵니까?”

“예. 하여, 과인은 장군에게 수시중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인임이 비운 자리에 최영이 앉는다.

그런데 성질이 달랐다. 자리를 차지 한 게 아니라 받은 거다.

이인임도 수시중이고, 최영도 수시중이다.

전자는 권좌였으나 후자는 도당의 수장일 뿐이다.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껌뻑이며 이 상황을 지켜봤다.

모든 사람이 이인임 사후 누군가가 차지할 권좌에 관심을 보였으나, 군왕이 이렇게 주도적으로 상황을 정리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 최영. 충심을 다하겠사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선은 싱긋 웃었다.

이로써 고려라는 거목에 질 좋은 거름을 뿌렸다.

그리고 정도전과 시선이 마주쳤다.

-합당하다. 최영이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는가. 지금부터 그 이후를 준비한다.

참 고약한 인사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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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을 잘 설득하셨군요.”

정도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영 장군이 집정 대신으로 있는 동안 주공께서는 더 힘을 키우실 수 있을 겁니다.”

“음.”

“또 왜 그러십니까?”

“거. 또라니? 말이 과하시오.”

“소생이 힘을 키우라고 했다고 이상한 생각 했지요?”

“안 했소.”

“그럼 됐지요.”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논리 구조?

됐다. 파고 들어가봤자 머리만 아프다.

“내가 설득한 건 아니오.”

“설득한 게 아니라고요?”

“음. 원래 가졌던 생각 같던데?”

정도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러자 왕선이 손을 내저었다.

“됐소. 그 정도는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유약한 금상께서 그렇게 강단진 생각을 하셨다니 놀라서 그러지요.”

“유약한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봅시다.”

“이런.”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합시다.”

“아.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이성계를 경계해야 할 거 같습니다.”

“······.”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정도전의 입에서 이성계를 경계하자는 말이 나오다니.

“왜 그러십니까?”

“말해도 이해 못 할 거요.”

“소생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없습니다.”

“장자방이 한 고조를 공격했다오.”

정도전을 장자방, 이성계를 한 고조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를 빗댄 말이니 정도전이 알 리가 없다.

“이해 못 할 거라고 했지요?”

“소생. 바빠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78화 개경의 동상이몽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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