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당신의 생명을 파면한다 >
“급하지 않습니다.”
“급하지 않다?”
“예. 주공.”
“최영 장군이 개경으로 진군하고 있거늘 어찌 급하지 않다는 것이오?”
내용과 달리 이성계도 급하지 않아 보였다.
조준은 이마를 살짝 눌렀다.
“지금 가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작금의 진군은 전과 달리 최영 장군의 깃발만 나부끼게 될 겁니다.”
“······.”
“군웅할거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다른 군웅과는 다릅니다. 동북면은 원래 전주 이씨의 소유가 아닙니까. 군웅할거가 가져다준 땅이 아닙니다.”
“······.”
“어차피 최영 장군의 세상입니다. 그토록 강건한 무장이 개경을 장악하게 될 건데 어찌 틈이 발생하겠습니까?”
“······.”
“우리가 노려봐야 할 건 최영 장군의 이후입니다. 그걸 준비하시지요.”
최영이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는가?
조준은 정확하게 이를 언급했다.
이성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외적과 싸우신 분이외다. 명성에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주공의 말씀대로입니다. 또한, 장군과도 막연한 사이지요.”
“음. 그래도 체면치레는 하는 게 옳지 않겠소? 아예 방관만 하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개경 공성전이 펼쳐질 때가 적당하겠군.”
“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준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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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부천도.
이는 과거 연합군의 압박을 떨쳐내고자 한차례 꺼내든 정치적 수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대적을 경계하거나 정치적 노림수로 도출하기 위한 은밀한 수가 아니라 노골적이고 대대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하륜은 연일 민심을 호도하며 천도 준비에 매진했고, 임견미는 모든 장졸을 이끌고 임진강을 틀어막았다. 이는 최영의 북상을 차단하는 동안 결과와 무관하게 천도를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이에 개경의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변안열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군. 개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
“···어명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최영의 볼이 크게 씰룩였다.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치게.”
듣지 않은 어명은 거역한 게 아니다.
“이인임이 보낸 자에게 분명히 전하게. 나 최영은 이인임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또, 어명이 아니라 이인임이 보낸 사신으로 만들면 된다.
“단번에 임견미를 넘어서 개경으로 진군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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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중심이 개경이라면, 개경의 심장부는 십자로였다.
이 십자로에서는 연일 갑론을박이 발생했다. 화두는 당연히 평양부천도였다.
이는 중대사였기에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건 필연적이었으니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의 이름값이 보통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불이익은 없을 것이네. 만일 작은 손해라도 받으면 이 사람이 책임질 것이야.”
다름 아닌 포은 정몽주였다.
그는 사대부를 대동하여 개경 전역에서 천도 준비를 막아섰다.
“포은 선생.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예. 소인들의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천도 준비를 하던 병사들은 난감함을 피력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무력을 사용하겠으나 정몽주를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분명히 경고하겠네. 강제로 백성을 핍박한다면 내 이름을 걸고 자네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야.”
평소 온화한 정몽주답지 않게 서슬 퍼런 어조였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이에 평양부천도는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런 사실은 천도의 책임자인 하륜의 귀로 들어갔다.
“이거 골치 아프군.”
아무리 시끌벅적하게 천도 준비를 하고 있으나 내부에서 훼방을 놓는 무리가 있으면 곤란했다. 심지어 정몽주라면 일선의 부관이나 병사들이 감당할 수 없다.
“어차피 잡아 오라고 해도 못 잡아 올 테고.”
별수 없다.
직접 가야 했다.
“정말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군.”
하륜은 고개를 저으면서 정몽주의 사가로 향했다. 도착한 뒤로도 한참을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오늘은 날이 아니군.”
입맛을 다시면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
정몽주였다.
하륜은 빙그레 웃었다.
“사형을 뵈러 왔지요. 한참 기다리다가 돌아가려는 찰나에 이렇게 오셨군요.”
“가던 길 가게.”
“사형제지간입니다. 어찌 이렇게 박대하십니까?”
“자네와 농지거리할 시간 따위 없네.”
“차 한잔 안 내주십니까?”
“자네 처 백부 어른에게 가서 달라고 하게.”
“요즘 좀 바쁘셔서요.”
“나 역시 자네와 한가롭게 차 한잔할 시간은 없네.”
“그렇습니까?”
“그러니 물러가게.”
“편하게 좀 삽시다. 사형. 어차피 천도는 이뤄질 건데 뭐하러 이렇게 반대합니까? 사형 때문에 일이 막혀버렸습니다.”
“고려는 개경이고 개경이 고려일세. 감히 천도를 누구 마음대로 하는가?”
“누구긴요. 이 나라 최고 권좌에 있는 노친네 마음이지.”
“허.”
“계속 반대할 거지요?”
“반대만 하는 게 아니라 막아낼 것이야.”
“하긴. 포은 사형 고집을 누가 막겠습니까?”
하륜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 정말 이런 거 싫어하는데.”
그러면서 손을 내저었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움직였다.
“감히!”
병사들이 움찔하자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
싸늘한 하륜의 어조.
병사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정몽주를 잡았다.
“송구합니다. 포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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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배는 어떻게 구한 거요? 심지어 왜놈들의 배를?”
“일전에 주공께서 격멸하신 왜구들이 타고 왔던 배입니다. 소생이 잘 챙겨뒀지요.”
“그건 참으로 잘한 일이오.”
왕선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사방을 돌아봤다.
서해가 참으로 광활하다.
그랬다. 지금 왕선은 30여 척의 배에 1,000명의 병사를 태워서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이인임이라고 할지라도 이건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방치됐던 왜구의 군선을 챙겨두는 선견지명과 임진강에서 악을 쓰고 있는 이인임과 최영 장군을 대경하게 할 이 놀라운 계책. 하늘도 놀랐을 겁니다.”
정도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 이건 인정하자. 떡 하나 던져주자.
왕선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팔자 한번 기구하오.”
다른 말로 돌렸다.
정도전은 금세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견훤이 한 짓을 하다니. 그렇지 않소이까. 일찍이 견훤이 수군을 급파하여 고려의 수도를 위협했는데 말이외다. 명색이 왕족이라고 떠들어대는 내가 딱 그러고 있소.”
“뭐 어떻습니까. 궁예보다 낫지요.”
“그건 그렇지만.”
“이참에 의자왕의 한을 풀어보시지요? 아니면 비교적 최근인 견훤의 한을 풀어도 되고요. 의자왕과 견훤은 실패했지만, 주공은 다를 겁니다. 어떻습니까? 소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이런다.
왕선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 와 가는 거 같은데. 천목아. 어찌 되었느냐?”
“예. 이제 조만간 예성강 포구에 도착합니다.”
“좋군.”
개경을 도망쳤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러나 지금은 개경을 도모하고자 대군을 이끌고 왔다.
금의환향이라면 금의환향이었다.
“딱 적절한 말이 떠올랐다.”
“무엇입니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음.”
“왜?”
“좀 허전합니다.”
“보태보겠느냐?”
“왔노라. 보았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이게 어떻습니까?”
“적절하군.”
그 순간 사방에서 함성이 일었다.
드디어 예성강 포구가 눈에 보인 거다.
왕선은 진하게 웃었다.
“이제 싸우고 이기는 것만 남았군.”
“예.”
“상륙 즉시 총진군한다.”
선봉은 당연히 나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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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개경 상황.
1,000명의 병력이 거침없이 돌격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고려의 체계가 무너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지만, 모든 역량이 임진강 전선에 집중된 탓이다.
이인임으로서는 천도를 단행할 정도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기에 작은 역량까지 모두 동원한 것이다. 이건 당연했다. 예성강으로 적이 공격해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그 당연함은 이인임의 발목을 완벽하게 잘라버렸다.
그 날은 평소와 같은 개경이었다.
개경을 지키는 수비병들은 천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멀찍이서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무, 무슨 일이야?”
수비병들은 우와좌왕했다.
[전주 목사 왕선]
“!!!”
수백의 기병이 거침없이 달려왔고, 선두에 선 압도적인 기백을 보이는 무장이 외쳤다.
“나는 전주 목사의 수하, 백성의 위타천 나세이니라!”
나세가 언월도를 휘두르며 개경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수비병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세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개경으로 진입했다.
어찌나 세차게 돌격해왔던지 병사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막아서는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무혈입성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병사를 이끌고 왕선도 입성했다.
“강안전은?”
“나세 장군이 갔습니다.”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건 강안전을 확보하는 거다.
아무리 허수아비지만 왕이라는 존재는 상상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 일전에 연합군을 단번에 무력화시킨 것처럼.
“이인임은?”
“도당에 있습니다.”
“도당?”
“예.”
“누가 가 있지?”
“이옥 장군입니다.”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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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은 눈을 감은 채로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쾅!
도당의 문이 박살 났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빙그레 웃는 왕선이었다.
이인임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자네 왔는가?”
“예.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이 늙은이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군.”
“항상 걱정했지요. 다른 사람이 당신의 목을 취하면 어쩌지? 뭐 그런 걱정 말입니다.”
“음. 사실 내 목을 취할 사람은 없을 줄 알았다네.”
“뭐. 그건 아닙니다.”
“굳이 사람을 꼽으면 정몽주? 그에게 주려고도 했지.”
“그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목 가지고 알아서 한다는데 자네가 무슨 상관인가?”
“거. 말도 못 합니까?”
희한했다.
죽이러 온 사람과 죽을 사람의 대화치고는 너무나도 정겨웠다.
물론 내용은 아니었다.
“술 한잔 어떤가?”
대답도 하기 전에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술잔을 건넸다.
“묘하군. 자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잘 맞는 거 같았는데.”
“착각하신 겁니다.”
“아쉽군.”
이인임은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맛이 참으로 달군.”
“나도 좀 주십시오.”
“나 죽으면 먹게.”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이인임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진심일세. 나는 최선을 다했어.”
“압니다. 최선을 다한 거. 사리사욕을 위해서.”
“다 좋자고 하는 걸세. 그리고 의외이긴 하지만 자네라면 충분해. 몰락한 왕족이 여기까지 왔으니 능력은 충분히 입증한 거지.”
“뭐가요?”
“나 대신 이 나라를 책임질 사람 말일세.”
“누가요? 당신이 이 나라를 책임졌다고요? 죽을 때가 됐습니...아. 죽을 때가 됐군요. 그러니 헛소리를 하는군요.”
“허락하겠네. 이만하면 됐어. 충분히 잘 이끌어 나갈 것이야.”
“큭.”
왕선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술잔을 기울이던 이인임의 손이 멈췄다.
그의 오른손에 반쯤 가려진 시선이 왕선에게로 향했다.
“큭큭. 진짜 지랄도 풍년이군.”
“······.”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 나라를 거덜 낸 권신이 뭐? 사람의 입은 말을 만들고, 권신의 주둥아리는 똥을 만들어낸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군.”
“······.”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허락을 운운해?”
왕선이 조소를 날리자 이인임은 술잔을 내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왕선.”
“왜?”
“꼭 이 나라의 정점에 올라가라.”
“뭐?”
“이 이인임이 무명잡졸에 당하지 않았다는 걸 후대가 알아야 하지 않겠나?”
“허.”
“또한, 그래야만 너를 발탁한 내 이름이 만대에 남을 것이 아닌가. 이 이인임이라는 인물의 최대 업적이 바로 너를 알아본 거로 기록되지 않겠는가?”
“미쳤군.”
“반드시 천년 고려의 반석을 세우도록. 하면, 나는 천년 고려의 문을 세운 사람이 될 것이니라.”
이인임은 미친 듯이 키득거렸다.
“그렇게 나와 너의 이름은 얽혀서 천년, 만년 이어질 것이다.”
“죽음이 지척이라는 게 느껴지지?”
“반드시 이 나라의 정점에 올라가라. 반드시.”
“이제 죽자.”
이인임은 비릿하게 웃었다.
“사약을 가져오라. 이인임답게 죽을 것이다.”
“사약?”
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라?”
이인임이 눈을 부릅떴다.
“사약을 가져오라!”
“하나 말해줄 게 있는데.”
“나 이인임이다! 사약! 당장 사약을 가져오라!”
“사실 나는 왕족이 아니야.”
“!!!”
이인임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왕선은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래서 한마디 더 해줬다.
“나는 미륵이다.”
이인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왕선은 싸늘하게 비웃으면서 오른손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그리고 선언했다.
“수시중 이인임. 백성의 이름으로 당신의 생명을 파면한다.”
“!!!”
“고귀한 이름. 고려. 이 두 글자로서 당신이 기록에 남을 자격도 파면할 것이다.”
“!!!”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억!
위력적인 화살이 이인임의 목을 관통했다.
< 77화 당신의 생명을 파면한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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