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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76화 (76/187)

< 76화 견훤을 취하십시오 >

분위기는 무거웠다.

정도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최영 장군이 개경으로 진군할 줄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

“정보를 관장하는 밀교의 교주라는 사람이 그처럼 중차대한 일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왕선의 어조는 날카로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영 장군의 행보를 놓쳤다는 게 말이 되오?”

“···송구합니다.”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최영이 변안열, 이원계 등을 규합하여 북상하고 있다.

...만일 이대로 개경을 점령하면?

정국의 주도권이 어찌 되겠는가?

소수의 충의지사가 군왕을 올곧게 보좌하고자 싸울 동안 지역의 패권이나 다퉜던 군웅의 위치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다.

군웅할거든 뭐든 고려라는 나라의 테두리에서 아웅다웅하는 이상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정도전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지금 우리가 결합하는 건 어떻소?”

“지금이라도 결합한다면 체면은 세울 수 있습니다.”

“체면이라. 그건 곤란하지. 그 정도로는 상황만 꼬아질 거니까.”

“예. 그래서 지켜보는 것도 방법이긴 합니다.”

왕선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정도전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운다면 상황은 바뀌겠지요.”

“그 방도를 찾아야겠구려.”

“예.”

“찾아야겠구려?”

“소생이 가능한 모든 수를 검토하겠습니다.”

“알겠소. 일단 공주목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시오.”

“예. 그렇지 않아도 지용기 역시 아군이 물러나기만을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그 인사도 참 딱하오. 이 시국에 자존심이나 세우다니.”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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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후회 가득한 눈으로 임진강을 쳐다봤다.

“이 강을 또 이렇게 넘게 될 줄은 몰랐네.”

“장군.”

“그때 왕 목사의 말을 들었다면 고려가 이렇게 절단 나지도 않았을 것이야.”

“당시 연합군의 체계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잠시 반 이인임 연합군 시절을 회상하던 변안열은 애써 담담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소장과 이원계는 장군의 수족을 자처했습니다. 어찌 통제에 혼란이 있겠습니까?”

군웅할거가 개막된 이후 변안열은 원주, 이원계는 남경을 거점으로 삼아서 세력을 팽창시켰다. 그런데 최영이 서찰을 보내서 개경 진군의 의지를 피력했고 두 사람은 흔쾌히 동참하기로 했다. 이건 연합군 시절처럼 참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세력을 들어서 최영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최영은 당연하거니와 두 사람 역시 지난 연합군의 최대 난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 세력을 규합하는 연합군의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고, 군웅들에게 격문을 날리지도 않았다.

하여, 이곳에는 오직 최영의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었다.

최영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장군.”

“왕 목사에게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는 건가?”

“실은 그렇습니다. 개경에서의 거사와 반 이인임 연합군까지. 장군께서 왕 목사를 곁에 두시지 않았습니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왕 목사가 나를 곁에 둔 거지. 나는 단지 거들었을 뿐이네.”

“···장군.”

“해서, 따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네.”

...혹시라도 실패하거나 또 다른 변수가 생기면 왕선의 역할이 필요하니까.

최영은 말을 아꼈고, 변안열도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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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군사.”

남은이 서찰을 잔뜩 들고서 정도전을 찾았다.

“어찌 됐나?”

“역시 연합군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런가?”

“예. 모두 최영 장군의 슬하로 들어갔습니다.”

이대로 북상해서 결합하더라도 큰 공을 세우는 건 불가능했다. 연합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실상 최영의 단독 진군이었다. 섣불리 들이댔다가는 어정쩡하게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허. 어쨌거나 그 사람들도 대단하군. 열심히 일군 세력을 모두 포기하다니.”

군웅할거의 종결?

이건 다른 말로 말하면 지금까지 고생하여 쌓아 올린 세력을 모두 날리게 되는 거다. 나라의 안정을 위한다면 군웅할거가 끝나는 게 맞다. 그러나 그게 왕선만 끝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대로 군웅할거가 평정되더라도 뿌리 깊은 나무에 해당하는 다른 군웅들은 가문의 위세가 확대되고 군웅의 개경 진출이 쉬워지고 입지가 커지겠지만 왕선은 아니다.

왕선은 맨바닥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문의 후광이나 풍족한 가문의 인맥 혹은 학연, 지연 아무것도 없다.

왕족?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건 개한테 던져줘도 안 먹을 거다.

정통 왕족도 존재감이 없는 세상에서 몰락한 왕족이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왕선이라는 존재의 분명한 한계였다. 정도전은 이를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는 거고.

“최영 장군이 개경에 입성하는 순간 군웅할거가 종결될 것으로 판단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게다가 가졌던 세력은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게 될 겁니다. 뭐. 전주 이씨의 일원이었던 이원계가 좀 애매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가문의 힘을 일정 가진 사람입니다. 풍족하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남은의 분석도 정도전과 비슷하다.

“군웅할거가 종결될까?”

“때가 되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군사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않습니까.”

“색이 변할 수는 있겠지. 그걸 준비해야 하는 거고.”

정도전의 표정은 이상야릇했다.

남은은 목소리를 더 낮추면서 말했다.

“그런데 전주를 비롯한 주요 거점의 민심은 압도적으로 주공의 편입니다.”

“그걸 부정할 수 없지. 그러나 전주를 오롯이 주공의 것으로 만들려면 오랜 세월 뿌리를 박은 나무가 필요해. 압도적인 민심? 그건 마치 바람과도 같은 거야. 어지간한 강풍이 아니라면 나무를 감당하지 못해. 해서, 민심을 기반으로 한 세력은 들불처럼 일어나지만 금세 꺼지지. 아주 미약해.”

“음.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이 지역은 그 바람의 막아설 나무도 없지요. 주공이 어지간한 가문을 다 뿌리 뽑았으니까.”

“하나 남아 있지.”

“전주 이씨의 이문정이요?”

“그렇지.”

“혹시 주공께서 전주 이씨만을 중용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정도전은 옅게 웃었다.

“그 속을 내가 어찌 알겠나?”

“음. 밀교의 일을 소생에게 맡겨놓고 비밀을 만드십니까?”

“정보를 만지는 일은 이 사람보다 자네가 나으니까.”

“더 많습니다. 소생이 더 잘하는 거.”

“그렇게 생각하게. 이 사람이 그 정도 아량은 있어.”

“이거 참 감사한 일이군요.”

잠시 농이 오갔다.

잔잔한 웃음소리가 끝나자 정도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 이번 일은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최영 장군의 북상을 우리가 은폐했다는 걸 주공께서 아시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니까.”

“예. 아무리 주공을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성미에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이 그거일세. 어차피 최영 장군도 우리와 함께 갈 생각이 없었고.”

“예. 굳이 참가하려면 세력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형편에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훌륭한 말일세.”

“아. 한데, 이 난국은 어찌 돌파하실 생각입니까?”

“원래는 관망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만들어봐야지.”

“방법이 없지만은 않군요.”

“나 정도전일세.”

“소생은 남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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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뜨거운 차를 마셨다.

그리고 쓰게 웃었다.

“참으로 고약한 인사들이군.”

설마 이걸 비밀로 했을지는 몰랐다.

그 이유를 알지만 헛웃음이 났다.

일단은 넘어갔으니 만일 제대로 된 계책을 가져오지 않으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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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은 콧잔등을 만졌다.

“골치 아프군.”

“그렇습니다.”

“골치 아프군.”

“그렇습니다.”

“골치 아프다고.”

하륜은 멋쩍게 웃었다.

“송구합니다.”

이인임은 혀를 찼다.

“일전에 쐐기를 분명히 박았어야 했거늘.”

“···송구합니다. 소생의 탓입니다.”

“그때 이성계의 움직임만 제대로 파악했으면 군웅할거도 안 생겼을 거고.”

“···송구합니다. 소생의 탓입니다.”

“됐네. 이제 와서 탓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실컷 타박해놓고는.

하륜은 입맛을 다셨다.

“험험. 처 백부 어른. 어쨌거나 지금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최영이 임진강을 넘을 수도 있는 엄중한 상황이 아닙니까.”

“내가 골치 아프다고 했네.”

“아. 골치만 아프신 거군요.”

“딱 그 정도지.”

“역시.”

이인임의 표정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만일 최영이 임진강 전선을 돌파하면 곧장 시행할 수 있도록 천도를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소란스럽게.”

“물론이지요.”

“이 나라 고려의 뿌리가 뽑히고 백성을 혼돈에 빠트리는 건 최영을 위시한 군웅할거의 주역들이 될 것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서 움직이게. 이 사람은 주상을 알현하여 어명을 받아올 테니까.”

“예.”

그리고 이인임은 손쉽게 어명을 받아내고 강안전을 나섰다.

“수시중.”

고개를 돌렸다.

빙긋 웃는 정몽주가 있다.

“오늘따라 걸음이 아주 어지럽습니다? 물론 그 덕에 소생은 참으로 기쁘군요.”

“허. 자네 몰라서 묻나? 최영이 거병하여 개경으로 진군하고 있네. 어찌 편할 수가 있나? 자네처럼 강심장은 방긋 웃고 다닐 수 있겠지만 이 늙은이는 아니라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도를 집행해야 하니까 말일세. 참으로 바쁘다네.”

“하하하. 거병이라. 그리고 방도? 이런. 졸지에 최영 장군이 역적이 되겠군요.”

“역적은 당연하고.”

“다른 방도가 또 있다는 거군요. 음. 이거 소생이 궁금증이 도졌습니다.”

“알려달라?”

“예.”

“자네 갈수록 뻔뻔해지는군.”

“뻔뻔해야 수시중을 내칠 수 있으니까요.”

“만일 그게 가능한 힘이 있으면 내치지 말고 죽이게.”

“단 하루를 살아도 권력 없이는 못 산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정말 불나방이 따로 없습니다.”

“음. 훗날 자네가 권세를 잡고 난 뒤에 나를 다시 상기해주게나. 지금처럼 권세의 맛을 보지 못한 처지와는 다를 거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내가 장담하지. 최영은 절대로 개경을 점령하지 못해.”

“말씀해주시지요.”

“남의 지혜를 듣고자 한다면 술이라도 한 병 사 와야지. 안 그런가?”

“독을 타서 한 병 드리지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넉살 좋게 대꾸하는 이인임.

정몽주는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나라의 집정 대신을 역임하셨는데 백주에 참수형은 과하지요.”

“당연하지. 반드시 사약 준비하게.”

“그냥 독 먹고 죽으세요.”

“이런. 고약한 사람을 봤나.”

이인임은 진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자. 이쯤 하면 자네가 만족할 정도로 장단에 춤을 춘 거 같으니 이만 가보겠네.”

“하하하. 수시중.”

“또 뭔가?”

“무운을 빕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이 사람이 금방 난리를 평정할 거니까.”

“하면, 소생은 강안전에 들리겠습니다.”

“고생하게. 그런데 강안전은 언제나처럼 침묵할 거야. 자네 아직도 주상을 모르겠나?”

“어심은 모르지만 수시중의 속내야 뻔하지요. 평양부로 천도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조만간 시끌벅적할 건데 대단한 수가 있는 거처럼 숨기는 걸 보니 이번에는 위기감이 크게 들었나 봅니다. 이 정몽주.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자네 기분이 좋다니까 나도 좋군.”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린 이인임의 표정은 무척이나 사나웠다.

그리고 그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정몽주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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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눈빛이 참으로 진중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진심으로 들으리다.”

“궁예 버리시고 견훤을 취하십시오.”

왕선은 정도전을 지그시 쳐다봤다.

“다 좋은데 꼭 표현을 그렇게 해야 하오?”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군사한테 무슨 말을 하겠소? 됐고. 준비는?”

“충분합니다.”

왕선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아올 줄 알았다.

정도전이 고개를 숙이면서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출정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 전에 군사.”

“예. 주공.”

“이번만 용서하리다.”

“예?”

“정보 은폐한 거.”

그 순간 왕선은 처음 봤다.

정도전의 눈이 흔들린 거.

이 사람도 동요라는 걸 하는구나.

무릎을 '탁' 치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 76화 견훤을 취하십시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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